-
경제 기타
주식 시장의 거래를 활성화시키는 주식브로커
성공이 확실시되는 사업 아이템은 있는데 이를 제품화할 자금이 없는 사람, 밀려드는 주문으로 공장을 확장해야 하는데 자본금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 주식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주식을 통해 자금을 모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자금이 필요할 때 가장 흔히 이용하는 방법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신용이나 담보가 있어야 하며, 만약 대출을 받았다 하더라도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러나 주식을 통해서 자금을 모집하면 이자를 갚아야 할 부담도 없으며, 담보가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보다 구체적으로 주식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먼저 주식과 증권 그리고 주권에 대한 정확한 개념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들 용어가 정확한 개념 정리 없이 혼용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먼저 주식이란 회사에 투자한 자금과 이 투자금을 통해 얻게 되는 주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말한다. 이러한 주식의 내용을 표시한 문서를 주권이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권은 유가증권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유가증권이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표시한 증서들을 말한다. 이 증서를 통해 재산권이 발생, 행사, 이전되는데 어음, 수표, 채권, 주권, 상품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요컨대 주식이란 회사에 투자한 자금단위와 그로 인해 획득한 권리와 의무 등을 나타내는 말이고, 이는 주권을 통해서 내용이 문서화된다. 이러한 주권은 유가증권, 즉 증권의 한 종류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주식의 내용을 표시한 문서를 주권이라 한다.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권은 유가증권을 줄여 부
-
역사 기타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개항 이후 조선은 내부의 근대적 개혁 요구와 외부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동시에 들이닥치는 위기의 순간이자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지난호에서 보았듯 1884년 급진개화파가 중심이 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딱 10년 뒤 이번에는 조선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시대의 개혁을 온몸으로 요구한 그들, 바로 전봉준과 동학 농민 운동입니다.시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일어선 농민들비록 갑신정변 이후 정부는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각 지역의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1880년대 이후 내륙으로 진출한 청과 일본의 상인들이 판매하는 값싼 영국산 면직물 등에 의해 경제적 타격을 심하게 입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삼남 지방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많은 공감을 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학은 기존 양반 중심의 신분제를 거부하고 평등 사상과 함께 이른바 ‘후천개벽’이라 하여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가 다가올 것을 설파하였습니다. 당연히 조선의 지배층은 동학을 용인할 수 없었지요. 반대로 농민들에게 동학은 새로운 희망의 빛 줄기였지요. 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 활동과 좀 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한 전봉준의 활동으로 동학은 하나의 사회 세력으로 성장해 갑니다.처음에는 동학 포교의 자유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종교적 운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탐관오리 숙청과 외세에 반대하는 사회 정치 운동으로 확장되어 갔지요. 결정적 사건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발발합니다.반봉건, 반외세를
-
경제 기타
주택을 높은 가격에 빨리 팔아주는 매매주택연출가
주택, 특히 아파트 등의 공동주택을 짓기에 앞서 완공 후의 모습이나 구조 등을 알아볼 수 있도록 미리 지어 보여주는 견본주택을 모델하우스라고 한다. 집을 사고자 하는 수요자에게 모델하우스는 자신들이 살게 될 집의 구조가 어떤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게 하고,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여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밀지를 계획할 수 있게 해준다. 최근에는 내부 인테리어에 사용하는 마감재는 무엇이고,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혹은 추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설비와 기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모델하우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수요자에게 모델하우스는 단순한 모형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들)의 미래 거주 모습을 명확히 형상화할 수 있는 표본으로 작용하고 있다.한편, 집을 판매하는 공급자의 입장에서 모델하우스는 주택의 판매 촉진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작용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공동주택은 완공되기 전, 시공 과정에서 주택을 판매하는 선(先)분양 방식으로 지어지고 있다. 이 경우 수요자는 아직 실재하지도 않는 주택을 그것도 거금을 들여 사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분양이 저조해지면 건축업자의 수익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때 모델하우스가 수요자들의 선택을 유도하여 주택 거래를 활성화하면 건축업자의 이익을 향상시키는 증폭제가 될 수 있다.문제는 주택을 판매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문제가 비단 건축업자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건축업자로부터 구입한 집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때로는 이주의 필요성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주택 판매와 수익 창출이라는 동일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통근이 불가능한
-
역사 기타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저녁 7시 종로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에서 이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개최됩니다. 당시 실세였던 민씨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민영익부터 청을 위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 간섭하던 묄렌도르프 등이 대거 이 연회에 참여하였지요.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곧 창문밖으로 불이 난 광경이 포착됩니다. 사람들은 불이야 불이야 라고 소리지르고 있었지요. 놀란 민영익은 우정국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곧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옵니다. 급진 개화파가 주축이 된 개화당의 칼에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국가를 지향한 사건, 바로 갑신정변의 시작이었습니다.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겠다는 김옥균제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정변의 핵심 인물인 김옥균이 남긴 말입니다. 그는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개화당)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이 영국의 17세기의 명예혁명처럼 왕정을 유지하면서도 근대 입헌 체제로 나아가는 것에 비교하여 우리나라는 프랑스혁명처럼 근대 국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김옥균은 명확하게 당시 세계 정세와 역사의 흐름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처럼, 근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기득권 세력과 구체제를 강한 의지로 밀어부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사실 조선은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근대 경제 체제, 즉 자유 무역이라는 틀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정치적 근대 개혁을
-
경제 기타
기업의 회계업무 담당하는 '전산 회계 전문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입사한 회사의 출근 첫날, 그동안 우리 회사가 어떤 성과를 보여 온 회사인지 단숨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회사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고, 친절해 보이는 회사 선배에게 물어봐서 회사의 상황에 대해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용기 있게 사장님을 직접 찾아가 회사에 대해 물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회사의 경영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는 방법 중 재무제표만큼 유용한 도구는 아마 없을 것이다.회계란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경제 주체들에게 기업의 경영활동에 대한 정보를 화폐 단위로 측정해 제공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배운 바 있다. 재무제표란 이러한 목적을 가진 회계정보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보고되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회계가 회사의 경영성과에 대해 성적을 매기는 방법이라면, 재무제표는 회사의 성적이 표시돼 있는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재무제표는 기업 외부에 있는 경제 주체들 다시 말해 기업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업과 관련된 회계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재무제표는 기초적인 회계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회사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작성돼 있다.학생의 성적표가 부모님이 알아보기 어렵게 작성돼 있다면 학생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기업 외부에 있는 경제 주체들이 재무제표를 통해 회사에 대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올바른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재무제표는 회계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
역사 기타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1863년 왕권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철종이 후사없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대까지 안동 김씨 등 세도가들이 오히려 조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신정왕후 조씨의 전교로 지명된 고종입니다. 그런데 그는 당시 12세밖에 안 되는 나이라 처음에는 신정왕후가 잠시 수렴청정을, 그리고 곧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맡게 됩니다. 왕의 적통이 없어, 종친 중에서 새 왕을 뽑았을 때, 그 아버지를 대원군이라 합니다. 흥선대원군 외에도 선조, 인조, 철종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불렀지요. 단 이들은 모두 죽은 후에 대원군이라 칭해진 것이고 살아서 대원군이라 칭해진 이는 흥선대원군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그는 10년 동안 살아있는 권력으로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였습니다.10년간 왕권 강화를 위해 일한 흥선대원군한 마디로 말하면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 왕을 대신해 10년 동안 집권한 것이지요. 훗날 임오군란 때 잠깐, 그리고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도 잠깐 집권한 적이 있지만 여러분은 주로 이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집권기에 대해 배웁니다. 당시 44세였던 그의 눈에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져 있었고 백성들은 이미 1862년 임술 농민봉기를 일으킨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외부에서 들여오는 소리는 큰 나라로 섬기는 청 왕조가 서양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으며, 바로 위의 러시아도 점차 세력을 넓힌다는 것이었지요. 안팎의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의 선택은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우선 외척일 뿐인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안동 김씨를
-
경제 기타
전업주부는 직업이 될 수 없다?
요즘 여학생들은 어떤 장래 희망을 꿈꾸고 있을까? 2012년 실시된 청소년 희망직업 조사에 따르면 여학생들은 교사와 의사, 연예인 등을 미래의 직업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직업들이 근래 들어 갑자기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이뤄진 비슷한 조사에서도 여학생들의 선호 직업은 비슷하게 나타났고, 이보다 앞서 1994년의 조사에서도 교사와 의사, 연예인과 변호사 등이 상위 순위에 포함되어 있었다. 눈 뜨고 나면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고 또 사라지는 시대인 요즘이지만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십여 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상황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많은 여학생이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장래 희망으로 삼고 살았다. 심지어 미인대회에 나온 참가자들이 심사위원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현모양처를 꿈으로 으레 대답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어진 어머니이자 착하고 좋은 아내를 뜻하는 현모양처는 얼마 전만 해도 많은 여성의 꿈이자 희망이었고 실제 그들의 미래 모습이었다. 즉,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아가며 그들이 사회에 나아가 책임을 다하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뒷바라지하는 전업주부(full-time housewife)가 대다수 결혼한 여성들의 소임이자 운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사회와 여성들 스스로도 이러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이견을 달지 않는 분위기였다.하지만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요즘이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의 대부분은 더 이상 현모양처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고
-
역사 기타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1795년(을묘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한 지 2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수원화성박물관 등에서 특별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지요. 1795년 당시, 윤2월 2일부터 8일 동안 치러진 이 행차를 찬찬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 두 행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바로 사도 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합니다. 둘째, 그 직후 정조는 자신이 만든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훈련을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주요 신하들과 직접 참관합니다.조선 왕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삶을 산 정조당시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만 1779명, 말도 779필이나 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나 한강을 건널 때는 배가 아니라 아예 수많은 배를 엮어 만든 배다리를 사용합니다. 아, 참고로 그 배다리를 제작하는 데 실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적극 참여하였지요. 자, 이렇게 대규모 행렬이 먼저 간 곳은 영조의 노여움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입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필수적 요소인 친위부대의 군사훈련을 참관한 것이지요. 사실 어머니 환갑잔치보다 이 두 가지가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죽음을 지지했던 세력 또는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신하들은 매우 불편한 자리이거나 왕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기 위해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정조, 그는 1776년 왕위에 올라 24년 여 동안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며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끈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18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매 순간이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