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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한민족 최고의 군주…중국을 압도했던 역사
숏폼의 인기가 치솟는 시대여서 공모전 당선 소설들도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예전에는 장편소설 공모 기준이 1000매(200자 원고지 기준) 내외였는데 요즘 500매로 줄었다. 긴 소설이 외면받자 대하소설을 내던 작가들도 대개 3권 혹은 2권으로 완간한다. 이러한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는 책이 출간되었다. 10권짜리 <광개토태왕 담덕>은 전체 원고량이 무려 1만1000매에 이른다.<광개토태왕 담덕>을 쓴 엄광용 작가는 2022년 7월에 1권과 2권을 출간하고, 2025년 2월 말에 10권을 냈다. 작가가 2000년대 초반에 이 소설을 처음 기획했으니 장장 20년에 걸쳐 완성한 셈이다.엄광용 작가는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벽 속의 새>로 문단에 데뷔했다. 장편 역사소설 <사냥꾼들> <천년의 비밀>,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징비록에서 역사의 길을 찾다> 외 다수의 책을 냈다. 2015년 장편 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류주현 문학상을 수상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12년간 기자로 활동한 이후 전업 작가로 나선 그는 고구려연구회 회원으로 국내 답사를 다니던 중 <광개토태왕 담덕>을 쓰기로 결심했다. 만주·백두산·실크로드 등 해외 답사를 다니면서 광개토태왕의 원정길을 추적하고,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기까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엄광용 작가는 왜 광개토태왕에 관해 이토록 긴 소설을 썼을까. 한 인터뷰에서 “중국의 <삼국지>나 일본의 <대망> 같은 국민 역사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그런 소설의 소재로 광개토태왕을 뛰어넘는 인물이 없었다. 우리의 옛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시킨 영웅의 이야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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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롱펠로에게 배우는 노년의 지혜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나이 든 이가 보내는 경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초서는 우드스톡에서 꾀꼬리를 곁에 두고예순에 캔터베리 이야기를 썼지.괴테는 바이마르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여든에 파우스트를 완성했고.( …중략… )우리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네.비록 차려입은 옷은 다르지만노년은 젊음에 못지않은 기회인 것을,저녁 어스름이 옅어져 가면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가득하다네.헨리 워즈워스 롱펠로(1807~1882)의 이 시를 읽다가 마지막 5행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비록 차려입은 옷은 다르지만/ 노년은 젊음에 못지않은 기회’라는 구절과 ‘저녁 어스름이 옅어져 가면/ 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가득하다’는 대목에는 두 번씩 줄을 그었죠. 원래는 엄청나게 긴 시인데, 그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앞부분에 나오듯이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는 예순에 최고 걸작 <캔터베리 이야기>를 썼고, 독일 문호 괴테는 여든에 <파우스트>를 완성했지요.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팔순을 넘기면서 성베드로 성당 천장을 어떻게 완성할지 고민했고,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아흔에도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잘스는 90세에 하루 6시간씩 연습하며 “난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62세에 ‘지동설’을 확립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68세에 ‘대성당’을 조각한 오귀스트 로댕, 71세에 패션계를 평정한 코코 샤넬, 62세 때 광견병 백신을 발견한 루이 파스퇴르….현대 경영학의 창시자인 피터 드러커는 93세 때 기자로부터 “언제가 인생의 전성기였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열심히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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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꿈을 잃어버린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어릴 때 꿈꾸던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15%가 안 된다고 한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조사한다면 더 낮은 수치가 나오지 않을까? <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을 쓴 고정욱 작가의 꿈은 의사였다. 하지만 소아마비로 인해 단 한 번도 두 발로 걸어본 적 없는 그에게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문과로 가라고 조언했다. 장애인은 응급환자에 빠르게 대처할 수 없고 쓰러져 있는 환자를 옮길 수도 없으니 의대 지원이 힘들다면서.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출신으로 문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두 번째 꿈이던 교수도 될 수 없었다. 역시 장애가 문제였다. 어릴 때 되고 싶었던 두 가지 일을 못 하게 되자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소설가가 되었다.고정욱 작가는 지금까지 384권을 발간해 우리나라에서 작품을 가장 많이 발표한 작가가 되었다. 누적 판매 부수가 무려 500만 권에 이른다. 대표작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120만 부나 판매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25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 후보에 올랐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이 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살아온 이야기 진솔하게 들려줘지금까지 주로 창작물을 발간해온 고정욱 작가가 <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에서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준다. ‘나, 사랑, 책, 용기, 소명’이라는 5개 파트에 46편의 에세이가 담겨 있다. 장애를 딛고 일어서기까지의 의지, 일상 헤쳐나가기, 남편이자 아빠의 모습, 장애를 제대로 알리는 일 등을 통해 ‘생활인 고정욱’을 만날 수 있다.사람들은 약간의 불편함에도 항의하고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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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별정진규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별들이 보이지 않는다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별들이 보인다지금 어둠인 사람들만별들을 낳을 수 있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별은 어둠을 먹고 자랍니다. 정진규(1939~2017) 시인은 ‘별’에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고 노래했지요. 또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별은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빛난다는 의미이지요.별들의 바탕인 우주는 실제로 어둡습니다. 광대한 우주 공간의 95% 이상이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로 이뤄져 있으니까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보통의 물질은 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지구와 태양 등 ‘우리은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전체 에너지의 0.4%밖에 안 된다죠? <천자문>도 첫 문장에서 “하늘(天)은 검고(玄) 땅(地)은 누르다(黃)”고 했습니다.암흑의 시작과 끝은 어디?모든 천체를 아우르는 우주(宇宙)는 넓고 커서 끝이 없지요. 한자로 ‘집 우(宇)’는 지붕과 처마처럼 넓고 큰 공간의 확대, ‘집 주(宙)’는 집의 기둥처럼 하늘과 땅을 떠받치는 시간의 격차를 뜻합니다.이 시간과 공간을 포함해 천지간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이 곧 우주(space, the universe, the cosmos)이지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합니다. 이런 시공간의 변화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니 놀라운 일이지요.암흑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요. 빈센트 반 고흐는 죽기 전에 별을 많이 그렸습니다. 1888년 남프랑스 아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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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서로에게 거짓말 한 셋, 친구가 돼 위로를 베풀다
“다섯 문장으로 자기를 소개하면 되는데, 그중 하나에는 반드시 거짓말이 들어가야 해.”전입생이 왔을 때 선생님이 이런 제안을 한다면? <이중 하나는 거짓말>의 무대는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학생들은 이미 이 발표를 했다. 다섯 문장 중에 어떤 게 거짓인지 알아맞히는 과정에서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이 게임의 이점이다. 사실 우리는 현실에서도 남이 모르는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누구에게든 밝힐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김애란 작가가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13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2024년 소설가가 뽑은 ‘올해 최고의 소설’과 알라딘·예스24 서점 선정 ‘2024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젊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김애란 작가는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과 1권의 산문집을 냈고,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비롯해 국내 주요 문학상을 거의 다 받았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 프랑스어판은 프랑스 비평가와 기자들이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을 받았다. 나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본다K시 파출소에서 보호자를 기다리는 지우의 모습이 소설 속 첫 장면이다. 그다음 채운과 소리가 등장한다. 소리는 꿈속에서, 오채운이 전학 온 첫날 담임이 ‘다섯 문장 소개’를 꺼낸 것과 채운이 문장을 하나하나 읊던 모습을 본다. 어느 순간 자신이 발표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소리가 내뱉은 마지막 문장은 “나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본다”였다. 교실은 찬물 끼얹은 듯 고요해졌는데,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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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양, 다람쥐, 춤추는 여인을 볼 틈도 없다면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던 길 멈춰 서서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또 그…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방랑 생활을 오래 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1871~1940)의 작품입니다. 그는 일에 쫓겨 허덕거릴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고 말합니다. 근심에 잠긴 사람에게는 눈앞의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지요. 희망의 눈이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만 있어도 충분하지요. 직선의 세상, 보듬어 안는 곡선의 미학‘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이나 ‘별들 반짝이는 강물’까지라면 더욱 좋습니다. 그 여유가 아름다운 여인의 눈과 발, 춤추는 맵시, 입술에 번지는 미소를 발견하게 해주고 진정한 인생의 의미도 깨닫게 해주니까요.뾰족한 직선의 세상을 둥글게 보듬어 안는 곡선의 미학! 그 오묘한 힘도 잠시 길을 멈추고 우리 주위를 둘러보는 것에서 나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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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무한 상상력이 빚어낸 예측불허의 이야기
2017년 초단편 소설집 <회색 인간>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걸 소설이라고 해도 되나?’라는 의구심이 떠다녔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사이트에서 인기 얻은 초단편 소설을 한 번쯤 휘잉 돌고 가는 바람일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8년이 지난 지금 30만 부를 돌파한 <회색 인간>은 100쇄 기념 에디션을 발간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김동식 작가는 주민등록증이 나온 17세에 독립해 바닥타일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따로 문학 공부를 한 일이 없다. 주물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하던 중 온라인 커뮤니티 공포 게시판에 소설을 올리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년 후 <회색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를 동시에 출간했다. 그동안 <양심고백>, <밸런스 게임> 등 총 10권의 소설집을 펴내면서 ‘초단편’이라는 장르를 확고하게 다졌다.김동식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초단편을 ‘말로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담긴 짧은 글’이라고 표현했는데 <회색 인간>에 실린 24편의 초단편은 일반적인 단편소설의 3분의 1 혹은 4분의 1분량이다. 각각의 짧은 이야기 속에 강렬한 스토리를 담았다는 특징이 있다.재미있으면서 섬뜩짧은 이야기인 만큼 허를 찌르는 반전이 눈길을 끈다. ‘소녀와 소년,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그린다. 서쪽으로 가서 벽 너머 세계에 가면 살 수 있다. 숨지기 전 엄마는 소녀에게 마지막 남은 초코바를 주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지면, 그때 먹어”라는 말을 남긴다. 몇 명의 사람과 함께 벽 너머 세계로 향하던 소년은 밤에 식량을 훔쳐 무리를 이탈한다.드디어 벽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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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산돌을 주워다 물을 주어 기르는 마음 [고두현의 아침 시편]
첫사랑의 시서정주초등학교 3학년 때나는 열두 살이었는데요.우리 이쁜 여선생님을너무나 좋아해서요.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그러면서 산에 가선 산돌을 줏어다가국화밭에 놓아두곤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미당 서정주 시인이 살아 계실 때 서울 관악구 남현동 자택으로 찾아가 뵙곤 했습니다. 지금은 ‘미당 서정주의 집’이라는 문화공간으로 개방돼 있지요.그 집 정원 한편에 작은 쉼터가 있습니다. 일반인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단장하면서 새로 만든 공간이죠. 방문객들이 앉아 쉬거나 간혹 시낭송회를 여는 곳인데, 몇 해 전 찾아갔을 때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미당의 시를 낭송하고 있었습니다.좋아하면 닮고 싶어지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지요. 저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미당의 ‘첫사랑의 시’를 읊조려 보았습니다. 어릴 적 이쁜 여선생님을 좋아하던 열두 살 소년 시절로 금방 돌아간 듯했지요.좋아하면 닮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땟국 꾀죄죄한 시골 촌뜨기의 눈에 여선생님의 연분홍 손톱은 얼마나 맑고 고왔을까요. 부드러운 눈빛과 목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런 여선생님을 닮고 싶었을 것입니다. 잘 보이고 싶어서 공부도 1등을 노려서 열심히 하고, 손짓발짓 온갖 행동도 더 착하게 하려고 노력했겠죠.여기까지는 그래도 열두 살짜리의 생각이라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그다음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요. 혼자 산에 가서는 속마음과 닮은 돌을 하나 주워 와서 국화밭에 놓아두고 물을 주다니요. 그렇게 물을 주어 기르는 생각을 했다니요! 날마다 물을 주어 기르면 산돌이 자랄 거라고 믿는 그 마음이 정말 이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