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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덧없는 권력의 상징 '오지만디아스' [고두현의 아침 시편]
오지만디아스 퍼시 비시 셸리고대의 나라에서 온 여행자를 만난 적이 있네.그가 말하길 "거대하지만 몸통 없는 두 다리의석상을 사막에서 보았네. 근처 모래 위에는부서진 두상이 반쯤 묻혀 있는데, 찌푸린 얼굴,주름진 입술과 독선적인 냉소가 감도는 걸 보니조각가가 그의 열정을 잘 읽었구나 싶었지.그 열정이 주인을 따르던 손과 심장을 뛰어넘어생명 없는 돌에 새겨져 여태 살아남았다네.그리고 받침대 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네.'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너희 강대한 자들아,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그 옆엔 아무것도 없었네. 뭉툭하게 삭아버린그 엄청난 잔해의 주위로, 끝이 없고 황량하게 외로운 모래벌판이 멀리까지 뻗어 있었네."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1792~1822)가 26세 때인 1818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제목의 ‘오지만디아스’는 이집트 람세스 2세의 그리스어식 이름이지요. 영국이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을 이집트로부터 들여온 것을 계기로 쓴 시입니다.오지만디아스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왕으로 불린 파라오였습니다. 선대의 투탕카멘, 후대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제왕입니다. 26세에 즉위해 64년간 제국을 통치하다 9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원할 것 같던 권력도 영화도…그는 시리아와 리비아 등을 정복했고,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거대한 조각상과 아부심벨, 라메세움 등의 신전을 곳곳에 건립했습니다. 수많은 전승기념비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권력과 영화도 세월과 함께 덧없이 스러지고 말았지요.셸리가 이 시를 쓰던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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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사계절 속 서울…이방인이 포착한 우리의 삶
서울을 다녀간 해외 유튜버들이 “깨끗하다. 질서를 잘 지킨다. 안전하다.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하면서 “고대와 현대가 잘 어우러진 점, 도심에서 바로 산에 오를 수 있는 점, 깨끗하고 편리한 지하철, 빠른 통신”에 놀라움을 표한다.사계절을 지낸 외국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에 삽니다>를 쓴 안드레스 솔라노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난 작가로, 영국 문학잡지 ‘그랜타’가 2010년 ‘스페인어권 최고의 젊은 작가 22인’ 중 1명으로 선정한 인물이다.콜롬비아는 한국전쟁 때 남미에서 유일하게 군인을 파병한 나라다. 안드레스는 2007년 첫 장편소설 <나를 구해줘, 조 루이스>를 발표한 이후 한국전쟁 콜롬비아 참전용사를 다룬 <네온사인 공동묘지>를 펴낸 바 있다.<한국에 삽니다>는 콜롬비아에서 먼저 발간되어 2016년 ‘콜롬비아 도서관 소설문학상’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안드레스의 아내인 이수정 씨가 번역해 2018년 출간됐다. ‘서울 이태원 4계절 체험기’부터 책과 영화,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 세계 여행 기록, 콜롬비아에서의 삶까지 광범위하게 담겨 있다. “버스는 오전 일곱 시에 부산 터미널을 출발했다. 흰 벽에 붓을 칠하듯 경부고속도로를 활주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문학적 향취를 듬뿍 풍기는 책이다. 이태원에서 사계절 보내기서울 이태원에 도착한 30대 중반의 안드레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앞에 짐을 내려놓고 부동산 중개소로 열쇠를 가지러 간 것이다. “보고타였다면 광장의 비둘기가 떼로 몰려와 한 줌의 쌀알들을 먹어 치우는 사이에 이미 가방은 없어졌을 것이다”라고 감탄한다.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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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 [고두현의 아침 시편]
푸른 밤의 여로-강진에서 마량까지김영남둥글다는 건 슬픈 거야. 슬퍼서 둥글어지기도 하지만 저 보름달을 한번 품어보아라. 품고서 가을 한가운데 서봐라.푸른 밤을 푸르게 가야 한다는 건 또 얼마나 슬픈 거고 내가 나를 아름답게 잠재워야 하는 모습이냐. 그동안 난 이런 밤의 옥수수 잎도, 옥수수 잎에 붙어 우는 한 마리의 풀벌레도 되지 못했구나. 여기에서 나는 어머니를 매단 저 둥근 사상과 함께 강진의 밤을 걷는다. 강진을 떠나 칠량을 거쳐 코스모스와 만조의 밤안개를 데리고 걷는다. '무진기행'은 칠량의 전망대에 맡겨두고 부질없는 내 시와 담뱃불만 데리고 걷는다. 걷다가 도요지 대구에서 추억의 손을 꺼내 보름달 같은 청자 항아릴 하나 빚어 누구의 뜨락에 놓고, 나는 박처럼 푸른 눈을 욕심껏 떠본다.구두가 미리 알고 걸음을 멈추는 곳, 여긴 푸른 밤의 끝인 마량이야. 이곳에 이르니 그리움이 죽고 달도 반쪽으로 죽는구나. 포구는 역시 슬픈 반달이야. 그러나 정말 둥근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거고 내 고향도 바로 여기 부근이야.마량은 ‘말을 건너 주는 다리’김영남 시인은 등단작이자 첫 시집의 제목인 ‘정동진역’이라는 시로 잘 알려져 있지요. 정동진은 우리가 아는 동해안의 그 정동진입니다. 그는 제주를 노래한 두 번째 시집 『모슬포 사랑』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세 번째 시집 『푸른 밤의 여로』에서는 고향인 장흥 일대를 집중적으로 보여줬습니다. 특히 표제시 ‘푸른 밤의 여로’는 강진만 햇살에 이마를 반짝이는 두륜산과 달마산, 아름다운 마량항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마량(馬良)은 ‘말을 건너 주는 다리’라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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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갈 곳 없는 철학자가 추적했던 마지막 늑대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전 국민이 기뻐하며 축하했다. 2025년 노벨문학상은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크러스너호르커이에 대해 “종말론적 공포의 한가운데서도 예술의 힘을 다시금 증명해내는 강렬하고도 비전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한다”고 평가했다.크러스너호르커이는 2015년 헝가리 작가 최초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며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떠올랐다. 한강 작가는 이 상을 2016년에 받았다.<사탄탱고> <저항의 멜랑콜리> <라스트 울프> <서왕모의 강림> <세계는 계속된다>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까지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 6권이 거의 팔리지 않다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라스트 울프’와 ‘헤르먼’ 두 작품으로 구성된 중편집 <라스트 울프>는 국내에 2021년에 소개됐는데, 2015년 해외 출간 당시 평단으로부터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문학적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책”이라는 평을 받았다.1954년에 태어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유학했고, 그리스·중국·몽골·일본·미국 등 여러 나라에 체류했다. 다양한 나라를 경험한 만큼 <라스트 울프>의 등장인물은 독일 철학자와 헝가리 바텐더, 스페인 통역사까지 다국적이다.종말론적 세계관종말론적 세계관이 두드러지는 그의 작품은 단락 구분이 거의 없는 데다 문장이 길다는 특징이 있다. 심지어 <라스트 울프>는 맨 마지막에 마침표가 단 한 번 찍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68페이지로 내용이 길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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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초원의 아이들을 품은 '우주적 대모'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진 것 한성례몽골의 초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가능한 한 덜고 버리고서 빠드득 물기 마른 지평선 한 자락 몰고 올라가 산뜻하게 걸린 무지개처럼 정말이지 몸이 가벼워지는 것. 지구라는 행성에 나란히 동거하면서도 우린 서로 가진 것이 달랐지요. 몇 마리의 양과 말, 한나절이면 거뜬히 접어 길 떠나, 발 닿으면 다시 세우는 서너 평 남짓한 '겔'. 고작 그 안을 채울 만큼이 온 가족이 가진 것 전부. 그러기에 몽골의 유목민들에게는 짙 푸른 하늘과 끝없는 초원, 머리 위로 열리는 밤하늘의 수박만 한 별들, 이 모두가 다 그들 차지였지요. 세상 모든 어머니보다 더한 우주적 사랑으로한성례 시인을 수식하는 말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우주적 대모(代母)’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거 같습니다. 혼자 살면서도 키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우주적 대모’라는 멋진 수식어를 붙여준 김영산 시인의 얘기를 잠깐 들어볼까요.‘어느 해 여름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는데 중고차 한 대가 옆에 와 섰다. 차창이 열리고 “잘 지내지?” “네……” 짧은 대화 속에 차가 떠났다. 그 안에 아이들이 네다섯 명 타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녀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보다 더한 우주적 사랑으로 한껏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풍경은 한 폭의 거룩한 성화(聖畵)와 같았다.’한성례 시인은 그날 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누구였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보다 훨씬 많은 소년 소녀를 거두어서 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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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마음 훈훈해지는 집시와 귀족의 사랑 이야기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돈키호테> 1편과 <돈키호테> 2편 사이인 1613년에 출간된 <모범소설>은 세르반테스 작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모범소설>은 총 12편의 중편소설 모음으로 <돈키호테>와 함께 ‘스페인 근대소설의 효시’로 불린다. 17세기에만 60여 회 출판되었고, 그 후 세계적으로 350회 이상 총서로 출간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발간됐다.국내에는 세르반테스 탄생 450주년인 1997년에 처음 선보였다. 박철 번역가는 12편의 소설을 “세르반테스 소설의 묘미를 만끽하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아울러 “아름다운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사랑의 승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세르반테스 <모범소설>의 핵심이기 때문에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순수한 영혼을 불어넣고 순결한 사랑을 느끼는 데 모범적 역할을 다하리라 여겨진다”고 덧붙였다.세르반테스는 제목을 <모범소설>로 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독자들께서 작품을 잘 읽어본다면, 그 속에 조금이라도 유익한 교훈이 없는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작품들은 아마도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당신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예의와 사리에 밝은 미모의 여인<모범소설> 12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인 중편소설 <집시 여인>은 세르반테스가 장담한 대로 ‘유익한 교훈이 있으며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안겨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집시 여인과 멋진 귀족 남자의 사랑, 현대 드라마에 단골로 나오는 출생의 비밀, 사랑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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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마감에 쫓기는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한 '힐링'
1인 미디어 시대를 맞아 블로그를 개설하거나 유튜브 채널을 오픈해 게시물을 올리는 이가 많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써서 내 마음대로 발표’할 수 있겠지만 구독자가 늘어나면 ‘정기 업로드’라는 마감에 쫓기게 된다.원고료를 받는 직업 작가, 방송사나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라면 ‘내 마음대로 써서 내 마음대로 발표’할 수가 없다. 원고 청탁서에 맞춰, 기획 의도에 맞게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취재의 어려움, 글쓰기의 고통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마감’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글은 마감이 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겼다.학생들에게 마감이란 과제 제출 기한일 것이다. 시험도 일종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인도 정해진 기한 내 맡은 일을 해야 하는 마감의 고통에 시달린다. ‘마감’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마감을 ‘데드라인(deadline)’이라고 하겠는가.<작가의 마감>을 기획하고 번역한 안은미 작가는 “수많은 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읽을 만한 책을 꾸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하나하나 고르고 언어를 찬찬히 매만졌다”고 출간의 변을 전했다. ‘책장 식당’이라는 일본 드라마에서 2명의 만화가가 원고 마감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자 책 속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장면을 보다가 ‘위대한 작가는 창작의 고통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그길로 일본 유명 작가의 전집 목록에서 마감과 관련된 글 50편을 하나하나 찾아내 이 책이 탄생했다.일본 유명 작가 30명의 마감 이야기추천의 글에서 장정일 작가는 “잡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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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성북동에서 건진 만해시편 연작 [고두현의 아침 시편]
심우장 가는 길고두현멀다.아직도 골목을 맴돌며소를 찾아 헤매는저 빈 집의오랜침묵!만해를 생각하면 두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尋牛莊)과 저 먼 만주의 굴라재 고개입니다. 하나는 현존하는 기념 공간이고, 하나는 역사 속의 기억 공간이지요. 이곳을 처음 방문한 날 저는 ‘만해시편’ 연작의 첫 번째 작품 ‘심우장 가는 길’을 썼습니다. 초고는 길게 썼는데 군말을 몇 번씩 헹궈냈더니 단출한 말만 남았습니다.“멀다.// 아직도 골목을 맴돌며/ 소를 찾아 헤매는// 저 빈 집의/ 오랜// 침묵!”심우장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고즈넉합니다. 도성 북쪽이어서 ‘성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울 성북동 산기슭 222의 1. 좁고 가파른 골목 사이로 올라가니 만해가 노년에 머물렀던 심우장이 나옵니다. 밖에서 본 심우장의 표정은 무심하고 무연합니다. 오랜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만해가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지은 이 집은 특이하게도 남향이 아니라 동북향입니다.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59㎡(17.8평) 규모의 소박한 단층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쪽 서재 앞에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알다시피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을 의미합니다.마당 한쪽에 만해가 심은 향나무 한 그루와 수령 90년이 넘은 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만해 시 ‘님의 침묵’ 중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이라는 구절이 두 나무의 그림자에 겹쳐지는 듯합니다.마루에 걸터앉아 한동안 상념에 잠겼습니다. 만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