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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초원의 아이들을 품은 '우주적 대모'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진 것                                  한성례몽골의 초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가능한 한 덜고 버리고서 빠드득 물기 마른 지평선 한 자락 몰고 올라가 산뜻하게 걸린 무지개처럼 정말이지 몸이 가벼워지는 것. 지구라는 행성에 나란히 동거하면서도 우린 서로 가진 것이 달랐지요. 몇 마리의 양과 말, 한나절이면 거뜬히 접어 길 떠나, 발 닿으면 다시 세우는 서너 평 남짓한 '겔'. 고작 그 안을 채울 만큼이 온 가족이 가진 것 전부. 그러기에 몽골의 유목민들에게는 짙 푸른 하늘과 끝없는 초원, 머리 위로 열리는 밤하늘의 수박만 한 별들, 이 모두가 다 그들 차지였지요. 세상 모든 어머니보다 더한 우주적 사랑으로한성례 시인을 수식하는 말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우주적 대모(代母)’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거 같습니다. 혼자 살면서도 키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우주적 대모’라는 멋진 수식어를 붙여준 김영산 시인의 얘기를 잠깐 들어볼까요.‘어느 해 여름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는데 중고차 한 대가 옆에 와 섰다. 차창이 열리고 “잘 지내지?” “네……” 짧은 대화 속에 차가 떠났다. 그 안에 아이들이 네다섯 명 타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녀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보다 더한 우주적 사랑으로 한껏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풍경은 한 폭의 거룩한 성화(聖畵)와 같았다.’한성례 시인은 그날 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누구였는지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보다 훨씬 많은 소년 소녀를 거두어서 학교에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마음 훈훈해지는 집시와 귀족의 사랑 이야기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돈키호테> 1편과 <돈키호테> 2편 사이인 1613년에 출간된 <모범소설>은 세르반테스 작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모범소설>은 총 12편의 중편소설 모음으로 <돈키호테>와 함께 ‘스페인 근대소설의 효시’로 불린다. 17세기에만 60여 회 출판되었고, 그 후 세계적으로 350회 이상 총서로 출간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발간됐다.국내에는 세르반테스 탄생 450주년인 1997년에 처음 선보였다. 박철 번역가는 12편의 소설을 “세르반테스 소설의 묘미를 만끽하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아울러 “아름다운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사랑의 승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세르반테스 <모범소설>의 핵심이기 때문에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순수한 영혼을 불어넣고 순결한 사랑을 느끼는 데 모범적 역할을 다하리라 여겨진다”고 덧붙였다.세르반테스는 제목을 <모범소설>로 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독자들께서 작품을 잘 읽어본다면, 그 속에 조금이라도 유익한 교훈이 없는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작품들은 아마도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당신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예의와 사리에 밝은 미모의 여인<모범소설> 12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인 중편소설 <집시 여인>은 세르반테스가 장담한 대로 ‘유익한 교훈이 있으며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안겨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집시 여인과 멋진 귀족 남자의 사랑, 현대 드라마에 단골로 나오는 출생의 비밀, 사랑에 이르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마감에 쫓기는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한 '힐링'

    1인 미디어 시대를 맞아 블로그를 개설하거나 유튜브 채널을 오픈해 게시물을 올리는 이가 많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써서 내 마음대로 발표’할 수 있겠지만 구독자가 늘어나면 ‘정기 업로드’라는 마감에 쫓기게 된다.원고료를 받는 직업 작가, 방송사나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라면 ‘내 마음대로 써서 내 마음대로 발표’할 수가 없다. 원고 청탁서에 맞춰, 기획 의도에 맞게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취재의 어려움, 글쓰기의 고통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마감’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글은 마감이 쓴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겼다.학생들에게 마감이란 과제 제출 기한일 것이다. 시험도 일종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인도 정해진 기한 내 맡은 일을 해야 하는 마감의 고통에 시달린다. ‘마감’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마감을 ‘데드라인(deadline)’이라고 하겠는가.<작가의 마감>을 기획하고 번역한 안은미 작가는 “수많은 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읽을 만한 책을 꾸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하나하나 고르고 언어를 찬찬히 매만졌다”고 출간의 변을 전했다. ‘책장 식당’이라는 일본 드라마에서 2명의 만화가가 원고 마감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자 책 속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장면을 보다가 ‘위대한 작가는 창작의 고통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그길로 일본 유명 작가의 전집 목록에서 마감과 관련된 글 50편을 하나하나 찾아내 이 책이 탄생했다.일본 유명 작가 30명의 마감 이야기추천의 글에서 장정일 작가는 “잡지 편집

  • 교양 기타

    성북동에서 건진 만해시편 연작 [고두현의 아침 시편]

    심우장 가는 길고두현멀다.아직도 골목을 맴돌며소를 찾아 헤매는저 빈 집의오랜침묵!만해를 생각하면 두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尋牛莊)과 저 먼 만주의 굴라재 고개입니다. 하나는 현존하는 기념 공간이고, 하나는 역사 속의 기억 공간이지요. 이곳을 처음 방문한 날 저는 ‘만해시편’ 연작의 첫 번째 작품 ‘심우장 가는 길’을 썼습니다. 초고는 길게 썼는데 군말을 몇 번씩 헹궈냈더니 단출한 말만 남았습니다.“멀다.// 아직도 골목을 맴돌며/ 소를 찾아 헤매는// 저 빈 집의/ 오랜// 침묵!”심우장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고즈넉합니다. 도성 북쪽이어서 ‘성북’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울 성북동 산기슭 222의 1. 좁고 가파른 골목 사이로 올라가니 만해가 노년에 머물렀던 심우장이 나옵니다. 밖에서 본 심우장의 표정은 무심하고 무연합니다. 오랜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만해가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지은 이 집은 특이하게도 남향이 아니라 동북향입니다.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59㎡(17.8평) 규모의 소박한 단층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쪽 서재 앞에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알다시피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을 의미합니다.마당 한쪽에 만해가 심은 향나무 한 그루와 수령 90년이 넘은 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만해 시 ‘님의 침묵’ 중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이라는 구절이 두 나무의 그림자에 겹쳐지는 듯합니다.마루에 걸터앉아 한동안 상념에 잠겼습니다. 만해는

  • 교양 기타

    "무슨 일 있어도 기죽으면 안 된대이" [고두현의 아침 시편]

    하석근 아저씨                            고두현참말로아무 일 없다는 듯이제 그만 올라가 보자고20리 학교 길 달려오는 동안 다 흘리고 왔는지그 말만 하고 앞장서 걷던 하석근 아저씨.금산 입구에 접어들어서야말이 귀에 들어왔습니다.너 아부지가 돌아가셨……그날 밤너럭바위 끝으로무뚝뚝하게 불러내서는앞으로 아부지 안 계신다고 절대기죽으면 안 된대이, 다짐받던그때 이후살면서 기죽은 적 없지요.딱 한 번, 알콩으로 꿩 잡은 죄 때문에두 살배기 딸 먼저 잃은 아저씨돌덩이 같은눈물 앞에서만 빼면 말이에요.그날 이후. 그날 밤 아저씨가 해준 한마디열네 살 때였으니까, 중학교에 들어간 첫해였습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의 작은 절집 곁방에 살았는데, 그 절에 나무도 하고 궂은일도 하는 하석근이라는 처사가 있었습니다.어느 날 그 아저씨가 학교로 찾아왔습니다.“…너그 아부지가…… 돌아가셨…….”금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산길을 오르는 동안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돌부리에 차인 발이 아픈 것도 몰랐고 그 소리에 산 꿩이 놀라 푸드덕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요.초등학교 때부터 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집도 절도 없이’ 지내던 저로서는 아버지의 죽음이 황망하고 두려웠습니다. 세속 동네의 단란한 모습이 부러워 친구네 집에서 일부러 끼니때가 되도록 눌러앉아 놀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국밥을 얻어먹곤 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부음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아리기만 했지요.그날 밤늦게 하씨 아저씨가 저를 밖으로 불러냈습니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엄마와 함께 달리며 서울대에 합격한 삼 남매

    엄마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 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자녀 문제일 것이다. <오늘도 불안한 엄마들에게>는 엄마들이 왜 불안한지, 자녀들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양소영 변호사는 2007년 KBS ‘아침마당’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대개 전문가로서 해박한 법 지식을 전하지만, 일반 토크 프로그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한다. ‘스타 변호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양소영 변호사는 한부모 가정을 돕는 칸나희망서포터즈의 이사장으로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오늘도 불안한 엄마들에게>는 변호사가 아닌 삼 남매를 서울대에 합격시킨 ‘엄마 양소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양 변호사의 두 딸은 서울대 경영학과, 아들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25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최종적으로 미국 MIT를 선택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풀어보기세 자녀도 사춘기 때 문을 쾅쾅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 부모 속을 태웠으며, 갑자기 성적이 떨어지는 일도 겪었다. 특히 아들은 기면증을 진단받아 엄마가 학기 초만 되면 담임선생님께 “아이에게 기면증 증세가 있어요. 수업 시간에 졸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체육·놀이 시간에 힘들어하면 쉬게 해주세요. 공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부탁을 써서 보냈다. 아픈 아이니까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 것이다.그런데 6학년 담임이 “건강 걱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이가 목표가 생기면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그때부터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아이와 대화하면서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모차르트가 쓴 편지, 천재의 열정이 살아 움직인다

    위대한 음악가를 꼽을 때 모차르트는 늘 맨 앞을 장식한다. 35년의 짧은 생애 속에서 남긴 620곡이 세월이 갈수록 더 사랑받기 때문이다. 흔히 모차르트를 천재라고 부르지만 그는 누구보다 노력했고, 수많은 작품을 남기는 동안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은 모차르트가 주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두 달 전에 쓴 내용도 실려 있다. 그가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토로한 글에는 위대한 작곡가의 치열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이 책에 실린 첫 번째 편지는 열세 살 때 엄마에게 보낸 것이다. 모차르트는 여섯 살 때부터 연주 여행을 했는데, 첫 편지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전하는 내용에 추신 형식으로 붙였다. “가장 사랑하는 엄마, 전 이번 여행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 모르겠어요”라고 시작한 짤막한 편지는 별 내용 없이 “엄마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내는 아들임을 보여드리고 싶어서랍니다”라고 끝냈다.이 책의 제목을 ‘천 번의 입맞춤’으로 지은 이유는 편지의 마지막에 꼭 “천 번의 입맞춤을 보낸다”라고 썼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한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자신을 힘껏 지원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무한한 사랑을 표현했다. 레오폴트의 편지에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 모차르트는 하나뿐인 누나 난네를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보냈다.누나에게 게임 얘기 써 보내여섯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모차르트의 창작 열정은 편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에게 “제 오페라가 잘되도록 빌어주세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발랄한 10대답게 누나에게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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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 '그림자의 섬'에 가고 싶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그림자의 섬김구슬그림자 섬 영도(影島),분홍 대문이우리를 맞이한다.작은 풀꽃 가득한 정원에 스민 차가운물기는진한 핑크빛 독일 장미의관능을 씻어내고,벽에 걸린 톨스토이의 노자적 표정은초록 풀들의 속삭임을 금한다.차가움과 뜨거움,움직임과 정지의 교란 사이에황홀한푸른 식탁이 펼쳐진다.진지한 런치 후의담백한 티 타임,'천 권 시집의 집'카페 '영도일보'는극지와 열대 사이의긴장과 조화를 구현한‘그림자의 섬’이다.이 시에 나오는 영도(影島)는 특이하게 ‘그림자 영(影)’ 자를 이름에 씁니다. 왜 그럴까요?부산 앞바다 섬 영도는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 국가가 경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자란 말이 워낙 빨라 그림자(影)가 끊어져(絶)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달리는 말의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이 시의 ‘그림자’ 모티브와 연결됩니다. 그림자는 실체와 함께 있지만 실체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지요. 영도라는 섬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영도는 지도 위의 한 섬일 뿐만 아니라 땅과 바다, 과거와 현재, 전쟁과 피란, 생과 사를 잇는 역사적 기억의 교차로입니다.시집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 ‘영도’김구슬 시인의 ‘그림자의 섬’은 최근 나온 시집의 표제작인데, 시집 속에 영도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묘박지’라는 시에도 “어린 시절 듣던 영도다리의 사연들이/ 이제 대교 저 높이 걸려 있다”, “배들은,/ 부두도 아니고 뱃길도 아닌 곳에서/ 부동도 움직임도 아닌 상태로/ 닻을 내리고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