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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무슨 일 있어도 기죽으면 안 된대이" [고두현의 아침 시편]
하석근 아저씨 고두현참말로아무 일 없다는 듯이제 그만 올라가 보자고20리 학교 길 달려오는 동안 다 흘리고 왔는지그 말만 하고 앞장서 걷던 하석근 아저씨.금산 입구에 접어들어서야말이 귀에 들어왔습니다.너 아부지가 돌아가셨……그날 밤너럭바위 끝으로무뚝뚝하게 불러내서는앞으로 아부지 안 계신다고 절대기죽으면 안 된대이, 다짐받던그때 이후살면서 기죽은 적 없지요.딱 한 번, 알콩으로 꿩 잡은 죄 때문에두 살배기 딸 먼저 잃은 아저씨돌덩이 같은눈물 앞에서만 빼면 말이에요.그날 이후. 그날 밤 아저씨가 해준 한마디열네 살 때였으니까, 중학교에 들어간 첫해였습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의 작은 절집 곁방에 살았는데, 그 절에 나무도 하고 궂은일도 하는 하석근이라는 처사가 있었습니다.어느 날 그 아저씨가 학교로 찾아왔습니다.“…너그 아부지가…… 돌아가셨…….”금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산길을 오르는 동안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돌부리에 차인 발이 아픈 것도 몰랐고 그 소리에 산 꿩이 놀라 푸드덕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요.초등학교 때부터 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집도 절도 없이’ 지내던 저로서는 아버지의 죽음이 황망하고 두려웠습니다. 세속 동네의 단란한 모습이 부러워 친구네 집에서 일부러 끼니때가 되도록 눌러앉아 놀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국밥을 얻어먹곤 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부음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아리기만 했지요.그날 밤늦게 하씨 아저씨가 저를 밖으로 불러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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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엄마와 함께 달리며 서울대에 합격한 삼 남매
엄마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 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자녀 문제일 것이다. <오늘도 불안한 엄마들에게>는 엄마들이 왜 불안한지, 자녀들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양소영 변호사는 2007년 KBS ‘아침마당’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대개 전문가로서 해박한 법 지식을 전하지만, 일반 토크 프로그램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한다. ‘스타 변호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양소영 변호사는 한부모 가정을 돕는 칸나희망서포터즈의 이사장으로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오늘도 불안한 엄마들에게>는 변호사가 아닌 삼 남매를 서울대에 합격시킨 ‘엄마 양소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양 변호사의 두 딸은 서울대 경영학과, 아들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25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최종적으로 미국 MIT를 선택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풀어보기세 자녀도 사춘기 때 문을 쾅쾅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 부모 속을 태웠으며, 갑자기 성적이 떨어지는 일도 겪었다. 특히 아들은 기면증을 진단받아 엄마가 학기 초만 되면 담임선생님께 “아이에게 기면증 증세가 있어요. 수업 시간에 졸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체육·놀이 시간에 힘들어하면 쉬게 해주세요. 공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부탁을 써서 보냈다. 아픈 아이니까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 것이다.그런데 6학년 담임이 “건강 걱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이가 목표가 생기면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그때부터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아이와 대화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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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모차르트가 쓴 편지, 천재의 열정이 살아 움직인다
위대한 음악가를 꼽을 때 모차르트는 늘 맨 앞을 장식한다. 35년의 짧은 생애 속에서 남긴 620곡이 세월이 갈수록 더 사랑받기 때문이다. 흔히 모차르트를 천재라고 부르지만 그는 누구보다 노력했고, 수많은 작품을 남기는 동안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은 모차르트가 주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두 달 전에 쓴 내용도 실려 있다. 그가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토로한 글에는 위대한 작곡가의 치열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이 책에 실린 첫 번째 편지는 열세 살 때 엄마에게 보낸 것이다. 모차르트는 여섯 살 때부터 연주 여행을 했는데, 첫 편지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전하는 내용에 추신 형식으로 붙였다. “가장 사랑하는 엄마, 전 이번 여행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 모르겠어요”라고 시작한 짤막한 편지는 별 내용 없이 “엄마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내는 아들임을 보여드리고 싶어서랍니다”라고 끝냈다.이 책의 제목을 ‘천 번의 입맞춤’으로 지은 이유는 편지의 마지막에 꼭 “천 번의 입맞춤을 보낸다”라고 썼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한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자신을 힘껏 지원한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무한한 사랑을 표현했다. 레오폴트의 편지에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난다. 모차르트는 하나뿐인 누나 난네를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보냈다.누나에게 게임 얘기 써 보내여섯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모차르트의 창작 열정은 편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에게 “제 오페라가 잘되도록 빌어주세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발랄한 10대답게 누나에게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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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그곳 '그림자의 섬'에 가고 싶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그림자의 섬김구슬그림자 섬 영도(影島),분홍 대문이우리를 맞이한다.작은 풀꽃 가득한 정원에 스민 차가운물기는진한 핑크빛 독일 장미의관능을 씻어내고,벽에 걸린 톨스토이의 노자적 표정은초록 풀들의 속삭임을 금한다.차가움과 뜨거움,움직임과 정지의 교란 사이에황홀한푸른 식탁이 펼쳐진다.진지한 런치 후의담백한 티 타임,'천 권 시집의 집'카페 '영도일보'는극지와 열대 사이의긴장과 조화를 구현한‘그림자의 섬’이다.이 시에 나오는 영도(影島)는 특이하게 ‘그림자 영(影)’ 자를 이름에 씁니다. 왜 그럴까요?부산 앞바다 섬 영도는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 국가가 경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자란 말이 워낙 빨라 그림자(影)가 끊어져(絶)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달리는 말의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이 시의 ‘그림자’ 모티브와 연결됩니다. 그림자는 실체와 함께 있지만 실체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지요. 영도라는 섬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영도는 지도 위의 한 섬일 뿐만 아니라 땅과 바다, 과거와 현재, 전쟁과 피란, 생과 사를 잇는 역사적 기억의 교차로입니다.시집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 ‘영도’김구슬 시인의 ‘그림자의 섬’은 최근 나온 시집의 표제작인데, 시집 속에 영도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묘박지’라는 시에도 “어린 시절 듣던 영도다리의 사연들이/ 이제 대교 저 높이 걸려 있다”, “배들은,/ 부두도 아니고 뱃길도 아닌 곳에서/ 부동도 움직임도 아닌 상태로/ 닻을 내리고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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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은하계를 건너온 시의 신호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은하계 통신 유자효저 세상에서 신호가 왔다무수한 전파에 섞여 간헐적으로 이어져 오는 단속음은분명 이 세상의 것은 아니었다그 뜻은 알 수 없으나까마득히 먼 어느 별에서 보내온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였다더욱이 이 세상에서 신호를 받고 있을 시각에신호를 보내는 저 세상의 존재는 이미 없다그 신호는 몇백 년 전, 몇천 년 전에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결코 만날 수 없는아득한 거리와 시간을 향하여 보내는 신호살아 있는 존재는 어딘가를 향하여 신호를 보낸다끊임없이 자신을 알리고자 한다그 신호가 영원을 향하고 있을때우리는 그것을 신이 보낸 신호라고 믿는다신이 살지 않는 땅에서 받는신들의 간절한 신호오늘도 저 세상의 주민들은 신호를 보낸다몇백 년 뒤, 몇천 년 뒤결코 갈 수 없는 세상의 주민들에게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 70편최근 프랑스에서 출간된 유자효 시인의 불역 시집 <은하계 통신>에 실린 표제작입니다. 유자효 시인은 <은하계 통신(Communication intergalactique)>을 프랑스시인협회에서 출간한 것과 동시에 한·불 대역 시조집 <청자주병(Celadon de Goryeo)>을 프랑스어권작가·시인협회에서 출판했습니다.<은하계 통신>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된 시 70편이 실렸고, <청자주병>에는 단시조 50편과 연시조 20편이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수록됐습니다. 두 시집 모두 손미혜, 장-피에르 쥐비아트 번역가가 공동으로 번역했군요.표제시 ‘은하계 통신’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기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주는 침묵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뿐인가.’ 그러면서 시인은 과학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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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두 아빠와 사는 호두…가족의 참모습은?
<특별한 호두>의 주인공 김호두는 정말 특별한 환경에 처했다. 제1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독특한 소재를 잔잔하게 풀어내며 깊은 감동을 안긴다. 우리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졌다. 이혼으로 인해 한쪽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한부모가정이 매년 늘어나는 중이다. 때로는 미혼모나 미혼부가 아이를 키우는 가정도 있다.그런가 하면 아빠만 둘, 엄마만 둘인 가정도 있다. 동성애자 가정을 떠올리게 되지만 김호두를 양육하는 2명의 아빠는 그와 거리가 멀다. 호두와 방과후수업에서 글쓰기를 배우는 지우는 엄마가 재혼하는 바람에 아빠가 둘이 된 케이스다.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가족 형태가 생겨날 수 있다. 우리 가정과 다르다는 선입견보다 각자 사정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아량이 필요하다.<특별한 호두>의 김호두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살펴보자. 엄마는 호두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2명의 아빠와 함께 살게 된 호두, 초등학교 입학 후 자신의 처지가 친구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가능한 한 자신의 처지를 숨기기 위해 애썼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지금 새 친구들이 자신의 독특한 상황을 알게 될까 봐 조마조마하다. 둘 중 누구와 살고 싶니?호두는 두 아빠를 큰 아빠, 작은 아빠로 구분한다. 큰 아빠는 외국계 대기업에 다니는 실력자로 차분하고 아는 것도 많다. 동네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작은 아빠는 장사도 잘 안되는 데다 덤벙대고 말이 많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큰 아빠는 멋있지만 좀 심심하다. 친구처럼 굴면서 피곤하게 하는 작은 아빠는 좀 귀찮지만 재미있고 만만하다.큰 아빠는 호두를 학원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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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더 이상 응축할 수 없는 서정시의 극치 [고두현의 아침 시편]
랑서정춘랑은이음새가 좋은 말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사랑하기 좋은 말올해 84세인 서정춘 시인의 제7 시집 <랑> 첫머리에 나오는 표제작입니다. ‘랑’이라는 말의 둥근 어감에다 ‘이음새가 좋은 말’이라는 의미까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지요. 고도로 응축된 언어로 서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입니다.여기에서 ‘랑’은 ‘너랑 나랑’을 이어주는 ‘사랑’의 접속 조사이면서 ‘또랑물 소리’로 우리와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시인이랑 독자랑’ 이어주는 교감의 이음새이기도 합니다. 이 시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랑’이라는 시를 볼까요.‘<피아노랑>은 피아니스트 박지나 님이 서정춘의 시 「랑」에서 영감을 얻어 여러 또랑물 소리를 모시고 연주 동아리 이름을 지은 거다// 정녕, 랑은 이음새가 긴 온음표 같은 것’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조사 하나에서 이렇게 놀라운 세계를 펼쳐내다니, 대단한 경지입니다. 이번 시집에는 이처럼 짧고도 웅숭깊은 시가 31편 실려 있습니다. 시만 짧은 게 아니라 수록 편수도 다른 시집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시집 앞머리의 ‘시인의 말’ 또한 짧습니다. ‘아하, 누군가가 말했듯이/ 나도 “시간보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 썼소.”’ 이전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의 ‘시인의 말’에 썼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이상 더 응축할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이 같은 시적 염결성은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합니다. 1941년 전남 순천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과 독학으로 시의 길을 헤쳐왔습니다. 신문 배달 중에 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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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재미난 소설 일곱 편이 만든 '생각의 블랙홀'
활자가 환영받지 못한다지만 작가들은 의미 있고 재미난 작품으로 쉴 새 없이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새로운 작가를 환영하며 지켜보는 독자들이 2024년에 예스24를 통해 선정한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1위’는 성해나 작가였다.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성해나 작가는 2024·2025 젊은작가상, 2024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 2024 김만중문학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동안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혼모노>, 경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을 펴냈다.소설집 <혼모노>는 종합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진입해 독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중이다. 올해 3월에 출간해 단 3개월 만에 10쇄를 돌파했다. <혼모노>에는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띠지에 인쇄된 배우 박정민의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말처럼 정말 재미있다.혼모노(진짜)와 니세모노(가짜)를 논하는 표제작 ‘혼모노’에는 흥미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30년간 점을 치고 굿을 해온 문수의 앞집에 스무 살 정도 된 신애기가 이사 온다. 그간 이곳으로 이사 온 무당들이 대부분 몇 달 못 버티고 떠난 음침한 골목인지라 문수는 신애기도 곧 떠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신애기가 문수에게 “신빨이 다했다더니 진짠가 보네. 할멈이 나한테 온 줄도 모르고”라며 조소하더니 살기 어린 눈으로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이라는 독설을 날린다.진짜와 가짜, 혼모노와 니세모노‘혼모노’ 속에서는 진짜와 가짜가 계속 교차한다. 바나나 우유와 바나나 맛 우유, 보이차 판별법 등도 양념처럼 등장한다. 진짜 따져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