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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문명은 손끝에서 태어난다 [고두현의 문화살롱]
이번 호부터 고두현의 아침시편, 문화살롱, 인생명언 코너를 돌아가며 게재합니다. 인생의 지혜가 담긴 시인의 다채로운 글들을 만나며 학생 여러분의 생각과 삶이 좀 더 아름답고 풍부해지기를 기대합니다.그날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2007년 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맥월드 기조연설 현장. 검은 터틀넥에 청바지 차림의 스티브 잡스가 무대에 등장했다. 조명이 그의 손끝을 비추는 듯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설명은 길게 하지 않았다. 버튼이 몇 개고, 어떤 칩이 들어갔고, 얼마나 빠른지 등은 생략했다. 그 대신 아주 단순한 동작을 보여줬다. 유리판을 손가락으로 슬쩍 쓸어 올렸다. 마치 잠든 얼굴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화면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버튼 없는 전화기를 그가 손가락으로 처음 연 것이다.그때까지 잊고 있었다. 인간은 원래 ‘누르는’ 존재가 아니라 ‘만지는’ 존재였다는 것을. 그날 무대에서 잡스는 신제품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손가락 문명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버튼의 시대를 살았다. 버튼은 한쪽만 작동하는 명령의 문법이었다. 누르면 켜지고 꺼지는 일방적 방식이었다. 이는 세계를 ‘명령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고, 사용자를 ‘명령하는 자’나 ‘명령을 따르는 자’로 정렬했다. 열 손가락은 십진법의 교과서그런데 터치는 다르다. 대화에 가깝다. 손가락이 화면을 스치면 화면이 반응하고, 그 반응이 다시 손가락의 속도와 촉감의 밀도를 바꾼다. 이 과정에서는 눈과 손과 머리가 한꺼번에 움직인다. 생각이 손끝으로 내려오고, 손끝에서 다시 생각이 올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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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자전거로 만나는 스페인·포르투갈의 역사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자전거 여행가 차백성 작가의 <이베리아 반도 기행>은 ‘친숙한 듯 낯선’ 두 나라를 우리에게 친절하게 소개한다. 이베리아 반도는 스페인·포르투갈·안도라·영국령 지브롤터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한 기록을 담았다.<이베리아 반도 기행>은 차백성 여행가의 다섯 번째 책이다. 그동안 그는 <아메리카 로드> <재팬 로드> <유럽로드> <자전거 백야기행>을 펴냈다. <아메리카 로드>는 북미 대륙과 하와이 7000km를 담았고, <재팬 로드>는 ‘일본 속에 남아 있는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으며 지리, 풍물, 사건, 인물, 만남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유럽로드>는 튀르키예,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8개국, <자전거 백야기행>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발틱3국)와 러시아,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노르딕 3국) 등 북유럽 7개국의 여행 기록을 선보였다. 모든 나라를 자전거로 달려 여행했다는 특징이 있다.여행가이자 작가인 차백성 저자는 인하공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1976년 대우건설 공채 1기로 입사해 2000년 상무이사로 퇴임했다. 많은 월급을 받으며 더 일할 수 있었지만, 어릴 때 꿈을 이루려면 체력이 남았을 때 실행해야겠다는 각오 아래 49세에 여행가로 나선 것이다.롤 모델 김찬삼의 뒤를 따른다차백성 작가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 주신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을 읽으며 세계여행의 꿈을 꾸었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모부에게서 미국산 자전거를 선물 받자 ‘자전거를 타고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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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사랑하고 싶다면 거울을 보세요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사랑 이후의 사랑데릭 월컷그때가 오리라.네 문 앞에 도착해네 거울 속의 너를큰 기쁨으로 반길 때가,둘이 서로의 환영에 미소 지으며,이렇게 말하리라, 여기 앉아라. 먹어라.넌 한때 낯설었던 너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되리라.포도주를 따르라. 빵을 주어라. 네 마음을자신에게 돌려주어라, 평생 너를 사랑해 왔으나네가 다른 이에게 마음을 빼앗기느라 외면했던너를 가슴 깊이 알고 있는 그 낯선 이에게.책장 위의 연애편지를 내려놓고,사진들을, 절박한 메모들을 걷어내라.거울 속에서 너의 이미지를 벗겨내라.앉아라. 네 삶을 잔치처럼 누려라.이웃집 젊은이가 실연을 당했습니다. 그는 방에 틀어박혀 자신을 책망하며 슬퍼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후회와 원망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폭음, 폭식에 ‘이불킥’으로 새벽을 맞기도 합니다. 밤새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위해 이 시를 골랐습니다.카리브해의 대표 시인 데릭 월컷은 이 시에서 이별 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이별의 감정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발로 오지요. 슬픔, 외로움, 분노, 억울함, 수치, 후회, 불면 등이 묶음으로 옵니다. 그 위에 얹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같은 생각을 반복해 곱씹는 ‘반추’입니다. 이 반추가 이별 뒤 고통을 오래 끌고 가며 우울과 자기 의심을 키웁니다.월컷의 시 ‘사랑 이후의 사랑’은 이런 감정을 해소하는 해독제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의 위기는 감정 자체보다 감정을 대하는 태도, 즉 자기 자신을 다루는 방식 때문에 증폭되지요. 이럴 때 월컷의 시가 도움을 줍니다. 시인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감정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일깨웁니다.그러면서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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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77편의 잠언시가 전하는 깊은 감동과 울림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시를 읽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최근 6년간 매년 1020세대의 구입 비중이 확대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 분야의 주요 구매층은 50대였으나 젊은 세대가 시에 관심을 가지면서 판매량이 늘었다는 것이다.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글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인생과 통찰력, 빛나는 문장이 전하는 감동, 나와 다른 시선까지. 나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은근히 차오르는 것도 시를 읽게 하는 힘이리라.교보문고가 지난해 상반기 시 부문 판매량이 27% 늘었다며 여러 이름을 거론했는데, 해마다 빠지지 않는 이가 있으니 바로 류시화 시인이다. 직접 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6)과 여러 작가의 시를 엄선해 엮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1998)은 오랜 기간 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 가운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잠언 시집으로 명명한 이 시집의 필자는 국내외 유명 시인을 비롯해 수녀, 유대인 랍비, 걸인, 에이즈 감염자, 가수, 도둑까지 다양하다. 이 시집에 실린 77편의 잠언시는 깊은 감동과 울림 속에서 독자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만든다.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하라‘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제목이 끊임없이 인용된다는 점도 이 시집을 오래 살아남게 한 요인일 것이다. 미국 작가 킴벌리 커버거의 시 제목 ‘If I Knew’를 매우 시적으로 번역해 큰 주목을 받고 있다.킴벌리 커버거는 ‘If I Knew’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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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목표보다 여정이 더 중요한 이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이타카 콘스탄티노스 카바피네가 이타카를 향해 길을 떠날 때,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모험과 발견으로 가득하기를.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네 생각이 고결하고숭고한 감동이네 정신과 육체에 깃들면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네가 맞이할 여름날 아침이 수없이 많으리니크나큰 즐거움과 기쁨을 안고미지의 항구로 들어서게 되면페니키아 시장에서 길을 멈춰어여쁜 물건들을 사라.자개와 산호, 호박과 흑단온갖 감각적인 향수를주머니가 허락하는 한 관능적인 향수를그리고 이집트의 여러 도시에 들러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그곳에 이르는 것이 네 궁극적인 목표이니그러나 절대 서두르지 마라.비록 그 길이 오래 걸리더라도늙어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므로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그 땅이 보잘것없다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 없고너는 그 가득한 경험으로 길 위에서 현자가 되었으니마침내 이타카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리라.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1863~1933)는 이 시에서 우리 인생의 여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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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인생은 여인숙…늘 새 손님이 오네 [고두현의 아침 시편]
여인숙잘랄루딘 루미인간이라는 존재는 한 채의 여인숙.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찾아오네.기쁨, 우울, 옹졸함,잠깐 스쳐가는 깨달음이뜻밖의 방문객으로 찾아오네.그 모두를 환대하고 맞아들이라!설령 슬픔의 무리라 하여네 집을 난폭하게 휩쓸고가구를 몽땅 없애버린다 해도,그 손님을 정중히 대하라.그는 어쩌면 너를 비워내고새로운 기쁨을 들이려는 것일지 모른다.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악의,그들을 문간에서 웃으며 맞고집 안으로 초대하라.무엇이 찾아오든 고마워하라.모두가 저 너머로부터 온인도자들이니.페르시아 시인 루미는 인간을 “한 채의 여인숙”이라고 표현합니다. 여인숙은 나그네를 받는 곳이지요. 주인이 손님을 마음대로 골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손님이 문을 두드리면 열어줘야 합니다. ‘기쁨’이 찾아오면 더없이 좋겠지만 ‘우울’과 ‘옹졸함’, ‘슬픔’과 ‘분노’도 찾아옵니다. 이런 감정은 문을 잠근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문을 두드리고, 벽을 흔들고, 잠을 깨웁니다.슬픔의 무리가 집을 부숴도…그래도 루미는 “그 모두를 환대하고 맞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설령 “슬픔의 무리”가 가구를 부수고 집을 난폭하게 휩쓸어도 “정중히 대하라”고 합니다. 그 손님이 “저 너머로부터 온 인도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이 역설은 고대의 지혜와 맞닿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낯선 손님은 신의 얼굴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를 ‘크세니아(ξενία, 영어 xenia)’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의 ‘환대’는 사적인 친절이 아닌 공적인 질서였습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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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모두가 겪고 있는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희망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솔솔 피어오른다. 과연 계획대로 잘될까, 끊임없이 초조한 마음이 밀려드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원인을 파헤친 뒤 해법을 제시한다. 불안을 다루는 서적이 넘쳐나는 가운데, 이 책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고고하게 순항 중이다.2005년 한국어 초판 출간 이래 20여 년 가까이 사랑받아온 <불안>은 국내 판매 40만 부를 기념해 교보문고 특별 리커버판을 새롭게 선보였다.1969년 스위스 취리히 태생인 알랭 드 보통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3년 펴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돌풍을 일으킨 후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다음 작품이 가장 기대되는 작가로 꼽히는 그의 책은 매번 2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돼 세계 각국에서 수십만 부씩 팔린다.불안을 불러오는 질투<불안>은 크게 ‘원인’과 ‘해법’으로 구성돼 있다. 불안의 원인으로 ‘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을 꼽았다. 그 가운데 ‘기대’ 부분이 특별히 흥미를 끈다. 봉건시대까지만 해도 극소수만이 부와 충족을 갈망했고, 다수는 착취당하면서 체념 속에서 살았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서양의 위대한 변화가 시작됐고, 20세기에 물질적 진보 속도가 빨라졌다.보통 사람들이 과거의 주인님과 마님만큼 잘살게 됐지만 불안은 훨씬 커졌다. 이유는 ‘자리, 성취, 수입’에 대한 걱정이 늘었기 때문이다. 많은 불안이 ‘질투’에서 비롯된다.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 나누는 대화’에서 불안이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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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늦게 온 소포 속 눈물겨운 유자 아홉 개 [고두현의 아침 시편]
늦게 온 소포 고두현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듯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개."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몇 개 따서너어 보내니 춥울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글썽글썽 녹고 있다.편집자 주) 아침시편을 담당하는 고두현 시인의 시 ‘늦게 온 소포’가 올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릴 예정입니다. 마침 시인이 자신의 심정을 담은 글이 있어 지면에 소개하면 좋을 듯 싶어 가지고 왔습니다.그날 밤 늦은 시간에 소포가 도착했다. 폭설 때문에 배달이 늦어진 듯했다. 글씨를 보니 어머니 필체였다. 미리 전화도 안 주시고 웬 소포?겉포장을 뜯는 데만 한참 걸렸다. 꽃게 등짝 같은 마분지를 벗겨내니 닳고 닳은 내의가 드러났다. 낡은 버선과 장갑도 나타났다. 그렇게 몇 차례 포장을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