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교양 기타

    여관방 벽지에 쓴 인생시 '죽편' [고두현의 아침 시편]

    죽편(竹篇)1 - 여행서정춘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 년이 걸린다.* 서정춘 :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죽편>, <봄, 파르티잔>, <귀>, <물방울은 즐겁다> 등 출간. 박용래문학상, 순천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인생을 대나무와 기차에 비유한 명시입니다. ‘죽편’은 가객 장사익의 노래로도 유명하지요. 서정춘 시인이 1980년대 후반, 허름한 여관방에서 누군가를 종일 기다리다 번개같이 떠오른 시구를 벽지에 휘갈겨 썼다고 합니다.“그날 혼자 여관방에서 ‘인생이란 대체 뭐길래 내가 여기까지 왔나, 왜 왔나,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온갖 상념으로 7시간을 뒤척였죠.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부터, -멀다’라는 시구가 번개같이 떠오르는 거예요. 종이가 없어서 그걸 여관 벽지에다 썼지요….”이 시의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는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닮았습니다. 시인은 ‘여기서부터,’라고 쉼표를 찍어 반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또 호흡을 조절하면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가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지요. 5행 37자 압축미의 극치입니다.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친 시원래 초고는 25행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관방도 등장하고 몇 시간이나 사람을 기다리던 얘기도 들어 있고, 이래저래 군더더기가 많았다는군요. 그는 이 시를 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그러면서 고향 순천에 많던 대나무와 대나무 막대를 가랑이에 끼고 기차놀이하던 기억, 거기에 대나무의 수직 이미지와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사랑-이별-사랑'의 오묘한 순환 고리에 빠지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외 작가 중 한 사람인 알랭 드 보통은 30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유명 작가다. 1993년에 발표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알랭 드 보통의 첫 번째 작품이다. 1994년 <우리는 사랑일까>, 1995년 <너를 사랑한다는 건>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세 작품을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으로 부른다. 이 장편소설들은 전 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출간되었는데, 이 독특한 연애소설 덕에 그는 ‘1990년대식 스탕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세 권의 연애소설 가운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우리나라에 2002년 소개된 이후 큰 반향을 일으켜 2022년 ‘70만 부 기념 리커버’가 발행되었다. 31년 전 발표한 작품이 지금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사랑과 이별이 안기는 감정은 어느 시대나 똑같기 때문이다.당시 24세이던 보통은 20대 중반 남녀를 등장시켜 직접 경험했을 법한 사실에 자신의 철학과 방대한 독서 지식을 접목,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통찰력을 선보이며 전 세계 독자를 매료시켰다.뜨거운 사랑과 죽음 같은 고통<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주인공 ‘나’는 일면식도 없는 ‘클로이’와 비행기에 나란히 앉아 두서없는 얘기를 나누게 된다. “짐을 챙겨서 세관을 통과했을 때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나의 고백처럼 사랑은 불시에 찾아온다. 두 사람은 곧 서로의 집을 오가며 사랑하게 되고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한다. 두 사람의 상태를 여러 고전에 반영하고 접목하면서 알랭 드 보통은 주옥같은 문장들로 사랑을 표현한다.“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

  • 교양 기타

    내 인생의 주행거리는 얼마나 될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인생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할머니 둘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유자효 :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직>, <심장과 뼈>, <사랑하는 아들아>, <성자가 된 개>, <내 영혼은>, <떠남>, <짧은 사랑>, <꼭> 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신설동에서 청량리까지는 시내버스로 네 정거장, 약 15분 거리입니다. 지하철로는 2구간 4분,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거리죠. 걸어가도 30분이면 됩니다. 이 짧은 거리가 두 할머니에게는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의 주행거리입니다.이 시는 속도와 시간, 거리와 공간의 의미를 사람의 일생으로 응축해 보여줍니다. 이런 장면을 포착해서 순간 스케치처럼 보여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의 한편에는 ‘느린 속도’와 ‘멈춘 걸음’과 ‘생의 비의’가 함께 있습니다.“속도를 늦추자 세상이 넓어졌다”그 속에서 깊은 성찰의 꽃이 피어납니다. 유자효 시인은 평생 시인과 방송기자라는 두 길을 바쁘게 걸어왔습니다. 부산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진해군항제 백일장 등의 장원을 휩쓸고, 대학 시절 가정교사로 바쁜 중에도 스물한 살 때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그 뒤로는 기자가 되어 KBS 파리 특파원과 SBS 정치부장, 보도제작국장, 논설위원실장 등으로 종횡무진했죠.은퇴 후 “어릴 때부터 걷고 싶었던 시인과 기자의 두 길”을 ‘한 길’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는 더 내밀한 세상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단순 스토리에 담긴 오묘한 은유와 넘치는 지식

    <모비 딕>은 완독하고 나면 스스로를 칭찬하게 되는 작품이다.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인 데다 내용이 쉽지 않으니 다 읽고 나면 뿌듯함이 밀려오면서 높은 자존감을 맛보게 된다.얼마 전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예비 고등학생에게 <모비 딕>을 선물하자 국내 도서 사이트에서 실시간 인기 도서 1위에 올랐다. 2년 전 높은 시청률을 올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가 읽은 소설도 <모비 딕>이었고, 당시에도 이 소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모비 딕>은 전 세계 수많은 유명 인사가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유명하다. 하워드 슐츠가 커피를 좋아하는 차분한 성격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에 매료되어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소설 속 인물들이 궁금할 만하다.힘든 삶을 작품으로 승화해 위대한 작가가 된 예는 수없이 많다. 허먼 멜빌 역시 13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은행이나 상점의 잔심부름, 농장일 등을 전전했다. 20세에 상선의 선원이 된 그는 22세에 포경선을 타게 된다. 그가 5년여 동안 포경선의 선원과 미 해군으로 남태평양을 누빈 경험이 <모비 딕> 집필의 바탕이 됐다.<모비 딕>이 1851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리얼리즘이 강세이던 19세기에 멜빌은 20세기를 풍미한 모더니즘을 앞서 구현하며 다양한 은유로 미국과 불합리한 여러 제도를 비판했다. 멜빌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탄생 100주년이던 1919년, 컬럼비아대학교 레이먼드 위버 교수의 극찬으로 역주행이 시작됐다. 현재 멜빌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모비 딕>은 세익스피어의 <햄릿>, 단테의 <신곡>과 어깨를 나란히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절망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우정·사랑

    <키친>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24세 때인 1988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이 작품으로 카이엔 신인문학상과 이즈미 쿄카상을 받았으며,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어 250만 부가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일상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문체에 친밀감 있는 표현’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목받으면서 ‘요시모토 바나나 현상’이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키친>은 세 개의 단편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로 구성되었다. ‘만월’은 ‘키친’의 주인공들이 몇 달 후에 겪는 일을 그려 ‘키친’과 ‘만월’은 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부엌’인 사쿠라이 미카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속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결국 휴학 중인 미카게의 곁을 떠나고 만다. 부엌에서 절망하며 뒹굴뒹굴 자고 있을 때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한 살 아래 남자가 나타난다.다나베 유이치가 아르바이트하던 꽃집에 할머니가 자주 들러 꽃을 사 갔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제안 앞에서 미카게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날부터 미카게는 유이치와 그의 어머니 에리코와 함께 지낸다. 미카게는 6개월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서 잠들며 조금씩 슬픔을 이겨낸다. 인생이란 한 번은 절망해봐야 알아유이치를 혼자 키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에리코는 미카게에게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아.

  • 교양 기타

    '닥터 지바고' 영화를 그대로 압축한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겨울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눈보라가 휘몰아쳤지.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여름날 날벌레 떼가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날아들고 있었네.눈보라는 유리창 위에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 비친 천장에는일그러진 그림자들엇갈린 팔과 엇갈린 다리처럼운명이 얽혔네.그리고 장화 두 짝바닥에 투둑 떨어지고촛농이 눈물 되어 촛대서옷 위로 방울져 떨어졌네.그리고 모든 것은 눈안개 속에희뿌옇게 사라져 갔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 날리고유혹의 불꽃은천사처럼 두 날개를 추켜올렸지.십자가 형상으로.눈보라는 2월 내내 휘몰아쳤지.그리고 쉬임없이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 러시아 시인이자 소설가.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닥터 지바고>를 그대로 압축해놓은 듯하죠?이 시 ‘겨울밤’의 배경은 암흑 속의 러시아 혁명기입니다. ‘눈보라’는 시베리아까지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하지요. ‘촛불’은 시대의 광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엇갈리는 ‘운명의 그림자’는 소설 주인공인 유리와 라라를 닮았습니다. 당국 압박에 노벨상도 거부해야 했던…비운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도 그랬지요. 그의 본업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습니다. <닥터

  • 교양 기타

    생업(生業)이 직업(職業)보다 숭고한 이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생업                                윤효종로6가 횡단보도원단두루마리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들이숨을 고르고 있었다.신호총이 울렸다.장애물을 요리조리 헤치며동대문시장 안 저마다의 결승선을 향해순식간에 사라졌다.좀처럼 등위를 매길 수 없었다.모두 1등이었다.* 윤효: 1956년 충남 논산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 <배꼽> 등 출간. 편운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풀꽃문학상 등 수상.벌써 12월 말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 짧으면서도 강렬한 시 ‘생업’을 소개합니다.생(生)은 윤효 시인의 문학적 화두 중 하나입니다. 생이란 ‘생명’과 ‘목숨’의 비밀을 여는 열쇳말이죠. 나무로 치자면 가장 큰 가지, 풀꽃으로 치면 가장 실한 줄기가 곧 생입니다. 갑골문에서 ‘생(生)’은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날 생(生)이고, 낳을 산(産)입니다. 이 글자는 살 활(活)과 있을 존(存)의 뜻까지 아우르지요.생업(生業)은 목숨 걸고 집중하는 일이 가운데 생업(生業)은 우리가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집중하는 일입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는 직업(職業)과 다르죠. 윤효 시인은 분초를 다투며 원단을 실어 나르는 시장통 오토바이 짐꾼들을 보면서 ‘생업’이라는 시를 썼습니다.이 시에는 ‘숨을 고르고’ 잔뜩 긴장해 있다가 ‘땅’ 하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튀어 나가는 달리기 선수들의 속도가 응축돼 있습니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사유의 힘' 강조한 사색집

    1662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블레즈 파스칼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단연 ‘천재’다. 12세에 유클리드기하학의 32번 명제를 증명했으며, 몇 년 뒤 파스칼 정리를 담은 수학 논문 ‘원추곡선론’을 발표했으니 당연한 찬사다.근대 확률이론의 기초를 세운 천재 수학자, 자동차나 비행기 기술에 꼭 필요한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파스칼을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하는 데에는 <팡세>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팡세(Penses)란 ‘사색집’이란 뜻으로, 파스칼의 <팡세>는 924편의 짧고 긴 글로 구성되어 있다.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파스칼은 28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여동생마저 수녀원에 들어간 후 깊은 고뇌와 비통에 빠졌다. 초대 신앙의 영적 순수성과 내면적 도덕의 엄격성을 강조하는 장세니스트들이 예수회와 대립할 때 장세니스트 편에 서서 변호하기도 했다. 일련의 일을 겪은 파스칼은 자유사상가와 무신론자에게 기독교의 진리성을 변증하기 위해 <기독교 호교론〉 집필에 들어갔고, 이 호교론이 <팡세>의 주요 내용이다.36세부터 건강이 나빠진 파스칼은 〈호교론>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39세에 별세했다. 그가 사망한 후 몇 편의 과학 논문, <은총론>을 비롯한 수기와 소품, 그리고 <기독교 호교론>을 위한 수기들이 발견되었다. 1669년에 이 단장들을 모아 출간했지만, 파스칼의 글은 거의 2세기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그 너머를 바라보라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파스칼에 대한 관심이 차츰 일기 시작했고, 20세기 중엽 각종 연구 끝에 파스칼이 남겨놓은 상태 그대로를 복원, 널리 읽히는 고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