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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정든 밥집이 있는 골목 [고두현의 아침 시편]

    밥집 골목이현승자주 가던  밥집이 하나 없어질 때그것은 익숙한 표정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이고가령 입맛을 다시는 것도 거기에 포함되겠지만몸의 분별력이란단순한 반복 속에서 예리해지는 것인데혀의 경우도 그렇다바람은 바깥양반이 피웠는데소태 같은 나물무침을 손님이 받아내야 하는 그런어떤 사람들이든 밥집이 있는 골목을 지날 땐금세 타인의 허기도 내 것이 되고이런 이상한 가족을 식구라고도 한다골목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셈인데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표정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그것이 배고픔의 표정이다정든 밥집이 있는 골목은 초입에만 들어서도거친 가슴을 다독이는 힘이 있다자주 가던 밥집이 하나 없어지는 것만으로도우리는 결딴난 연애보다 참혹한 표정이 된다쫓을 대상은 없고 그저 쫓기는 자의 심정으로“일상이 시고, 시의 재료이고, 삶 자체죠. 제 시가 구체적인 사건과 경험에서 나오다 보니 시를 쉽게 쓰기가 힘들어요. 한때는 좋은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었잖아요?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쓰던 시를 요즘은 저를 바꾸려고 써요. 제 시로 일상의 혁명 정도는 이룰 수 있겠지요.”이현승 시인에게 시는 ‘삶의 질료’이자 ‘일상의 혁명’을 꿈꾸는 씨앗입니다. 생활 속의 사건들은 모두 그에게로 와서 시가 되지요. 그는 이렇게 복잡다단한 현실의 단층을 깊이 들여다보고 민감하게 조응하면서 그 이면의 풍경까지 하나하나 그려냅니다.그의 두 번째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에 나오는 시 ‘밥집 골목’에는 다섯 개의 ‘표정’이 겹쳐 있습니다. “자주 가던 밥집이 하나 없어질 때/ 그것은 익숙한 표정 하나를 잃어버리는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반전에 반전…무더위 날리는 등골 오싹한 이야기

    여름이 되면 등골이 오싹하는 추리소설을 찾는 사람이 많은데, 애거서 크리스티 <0시를 향하여>는 두뇌 회전을 하느라 더위를 느낄 틈이 없는 소설이다. 미묘하게 제시되는 복선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스토리가 정신이 휘몰아치기 때문이다.애거서 크리스티는 설명이 필요 없는 작가로, 100권이 넘는 장편소설과 단편집과 희곡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은 1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40억 부 넘게 팔려나갔다. 성경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작가로 꼽히고 있다.많은 작품을 다 읽기 힘드니 애거서 크리스티가 직접 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10편’을 참고하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살인을 예고합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열세 가지 수수께끼> <0시를 향하여> <끝없는 밤> <비뚤어진 집> <누명> <움직이는 손가락>이 작가가 독서를 권하는 ‘베스트 10선’이다.단언컨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10권을 읽으면 사고가 논리적으로 바뀌면서, 매사를 다각도로 살펴보며 사태의 이면과 사각지대까지 더듬어보는 습관이 생길 것이다.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대개 그렇지만 <0시를 향하여>도 마지막까지 누가 범인인지 추리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300페이지에 이르는 이 작품을 읽으며 몇 페이지에서 범인을 알아내는지, 친구들과 경쟁하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이다.모두 5부로 구성되는데 프롤로그와 ‘문을 열자 사람들이 있었다’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사연이 소개된다. 이때 등장하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공부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까

    공부는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게 만드는 힘이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심심한 사과드린다”는 회사 게시판에 “성의가 없네. 미친 거 아냐?”라고 항의한 이들은 문해력이 낮아 <공부란 무엇인가>처럼 격조 높으면서 유익하고 재미있는 책을 읽기 힘들 것이다.공부와 관련된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공부 잘하는 법, 빠른 기간에 성적 올리는 법 등 공부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과 달리 <공부란 무엇인가>는 ‘공부가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김영민 저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는 김영민 교수는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때 마약을 하는 등의 일탈을 하지 않은 힘은 자신이 ‘배우는 와중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며 “배우는 사람은 자포자기하지 않는다”고 정의했다.저자는 우리나라를 일찍부터 입시에 정열을 바친다는 점에서 ‘교육열이 강한 나라’이지만, 진정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육에 냉담한 나라’라고 분석했다. 중·고교가 입시 기관으로 변화되었다면 대학은 취업 준비 기관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깊어진 지식과 섬세한 인식“계속 읽고 쓰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가능한 인간의 변화에 대해 믿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대학에 가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성숙한 시민으로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강조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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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에 '눈의 묵시록'을 읽는 까닭 [고두현의 아침 시편]

    눈의 묵시록송종찬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잔해가 없다그곳이 하늘 끝이라도사막의 한가운데라도끝끝내 돌아와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눈이 따스한 것은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눈이 빛나는 것은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촛불을 켜고눈의 점자를 읽는 밤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전쟁도 멈춰야 한다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혀를 내밀어보면뼛속까지 드러나는 과거갈 데까지 간 사랑은흔적이 없다사랑과 인생의 극점을 보여주는 한 편의 묵상록! 이 시는 송종찬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첫눈은 혁명처럼>(2017)에 실려 있습니다. 이 시집을 펴내기 전에 시인은 ‘눈의 제국’ 러시아에서 4년 넘게 지냈습니다. 그 특별한 시간과 공간이 이렇게 빛나는 시를 탄생시켰군요.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포스코에 입사한 시인은 2011년 러시아 천연자원 개발 프로젝트에 자원해 모스크바로 떠났습니다. 직함이 ‘포스코 러시아 법인장’이었으니 어깨가 무겁고 임무 또한 막중했습니다. 철광석과 석탄 등 질 좋은 철강 원료를 현지에서 값싸게 사들이고 포스코의 고급 철강 제품을 러시아에 판매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습니다.연해주의 하산과 북한의 나진 선봉을 연결하는 남·북·러 물류 협력사업 ‘나진~하산 프로젝트’까지 진행했지요. 그 덕분에 시베리아 석탄이 나진항을 거쳐 포항으로 들어오고, 우리 철강 제품이 포항에서 북한, 러시아로 가는 유라시아 대륙 물류의 첫걸음을 뗄 수 있었습니다.이렇게 중후장대한 일을 해내는 틈틈이 그는 광활한 러시아의 눈밭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시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민족의 아픈 역사 견디게 한 힘은 사랑과 믿음

    600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으면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우리 땅의 아픈 역사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김주혜 작가는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프린스턴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영어가 더 익숙한 작가는 <작은 땅의 야수들>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했다.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을 2021년에 펴냈고, 세 군데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오른 끝에 2024년 톨스토이 재단이 주관하는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야스나야 폴랴나상(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 전 세계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TV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작은 땅의 야수들>은 1917년이 배경인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1부는 3·1운동이 일어난 1918~1919년, 2부는 일제강점기에도 문화가 꽃피는 경성을 그린 1925~1937년, 3부는 태평양전쟁과 광복·정부수립 시기인 1941~1948년, 4부는 국가의 기강을 잡아나간 1964년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부터 마지막까지 각종 복선과 효과적인 소품, 필연적 관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긴 이야기지만, 의미 있는 장치들이 무게를 더하며 확산되어가는 과정이 묘미를 안기는 작품이다.소설 속에는 일본인과 친일파, 공산주의자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들은 정보가 없어 판단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다. 예를 들어 3·1운동을 준비하는 명보에게 친구 성수는 “진정한 권력이 없는 독립선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본인들이 행하는 압제를 더욱 강화할 뿐이야. 수천 명이 체포되어 연행될 거고, 더 심한 일도 벌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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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퓰리처상 수상 시인이 발견한 행복 [고두현의 아침 시편]

    행복                               칼 샌드버그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행복이 무엇인지 물었네.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유명한 회사 사장들에게도 물었네.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마치 내가농담이라도 하는 듯 웃음을 지었네.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데스플레인즈 강을 따라 산책 나갔네.그리고 보았네, 한 무리의 헝가리 사람들이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나무 밑에서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을.미국 시인 칼 샌드버그(1878~1967)의 시입니다.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인 그는 어릴 때부터 무척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대장장이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지요. 그는 11세부터 이발소 급사로 일했고, 우유배달과 벽돌공, 농장 일꾼 등 온갖 밑바닥 일을 다 했습니다.스무 살 때 미국-스페인 전쟁이 터지자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습니다. 이후 신문 기자가 되어 취재 현장을 누비면서 시를 썼습니다. 문예지에 작품을 활발하게 발표하면서 ‘시카고 르네상스’를 이끌었으며 시집과 링컨 전기로 퓰리처상을 연거푸 받았습니다.이 시는 38세 때 펴낸 첫 시집 <시카고 시편>에 실린 것으로, 행복의 의미를 한가로운 가족의 모습과 함께 묘사한 것입니다. 지식과 명예를 상징하는 교수,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사장이 아니라 휴일 오후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헝가리 이민자들로부터 행복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내용이지요.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일상의 즐거움을 한껏 누릴 줄 압니다. 행복은 감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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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드리면 바로 반응하는 미모사의 비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미모사김민서포트에서 차가 끓고 있다들꽃을 발로 차고 다니는몹쓸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손님이 말했다나는 하얗게 센 민들레를불지 않고 발로 차서 날려주었는데내가 어떤 말을 해도당신은 나를 몹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왜인지 그건 내가그동안 나를 탁월하게 변명해 왔다는 증거 같아요잎이 움츠러드는 것을 지켜보면서미모사 같은 사람에겐민감함이 건강함일까요2019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수상작입니다. ‘잎이 움츠러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모사 같은 사람에겐/ 민감함이 건강함일까요’라고 묻는 장면이 눈길을 끕니다. 젊은 여성의 내면 심리와 섬세한 감성 묘사가 돋보이는 시인데, 미모사 잎은 실제로 너무나 민감해서 손만 갖다 대면 금방 움츠러들지요.제가 미모사를 처음 만난 건 오래전 초여름 날 오후였습니다. 한적한 산길에서 얼떨결에 마주쳤지요. 첫눈에 봐도 참하고 보드라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지요. 어디에서 봤을까, 한참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습니다.그런데 미모사는 손끝을 안으로 오므리더니 아예 손을 밑으로 내려버렸습니다. 무엇엔가 섭섭해서 뾰로통하게 토라진 듯했습니다. 새침한 것 같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했지요.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잎 접는 풀미모사는 신경이 예민해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양쪽 잎을 접어버린다고 해서 별명이 ‘신경초(sensitive plant)’입니다. 특별한 자극이 없으면 낮 동안 잎을 펴고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잎을 닫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잠자는 것 같아서 ‘잠풀’이라는 이름도 붙었습니다.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가슴 저미는 따뜻한 실화에 담긴 선량함

    중국 작가 다빙이 쓴 <당신에게 고양이를 선물할게요>는 실화 소설이다. 소설 형식이라지만 옆에서 얘기해주듯 술술 읽히면서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안긴다. 모두 6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청소년이 주인공인 ‘당신에게 고양이를 선물할게요’와 ‘아미타불 뽀뽀뽀’가 특히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다빙은 자신을 유랑 가수·방송인·배낭여행가 등 다양한 직함으로 소개했는데, 버스킹을 하며 대륙을 떠돌던 시절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이 책은 2015년 출간 이후 한 달간 중국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다. 이 성공으로 다빙은 중국 아마존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에 2015년, 2016년 2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우리나라는 1980년대에 태어난 사람을 ‘MZ세대’라고 부르는데, 중국은 ‘바링허우 세대’라고 부른다. 덩샤오핑의 1가구 1자녀 정책 이후 태어난 바링허우 세대는 외동으로 자라 ‘소황제’로 불리며 나약하고 이기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반면 개혁개방 시기에 성장해 반항적이고 개성과 의식이 있어 새로운 사물을 잘 받아들인다는 평가도 있다.이 책의 주인공들은 양극화되고 모순으로 가득한 중국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대신 희망을 찾아 떠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엄마가 떠난 뒤 찾아온 고양이‘당신에게 고양이를 선물할게요’의 주인공은 고양이를 키우는 게 소원이다. 아이에게 도무지 관심 없는 부모는 날마다 싸우다 이혼하고 만다. 아홉 살 때 아빠가 사라진 이후 엄마도 아이를 냉랭하게 대한다. 불안으로 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