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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가려운 데 말고 엉뚱한 데를 긁는 사람

    이 가려움 김우태 코뿔소가 씨잉 바람을 가르며 나무둥치를 들이받는 것은 코끝이 불현듯 가려워졌기 때문이다. 벚나무가 송글송글 꽃망울을 매달고 허공을 어루만지는 것은 뿌리가 갑자기 가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동네 할아버지들이 나무둥치에 등을 비벼대는 것도 생이 참을 수 없이 가려워졌기 때문이다. 가려워서 잠 못 이루는 사람들 복권을 긁듯 뼛속까지 시원히 긁어보지만, 긁을수록 온 몸 번져 나는 꽃 반점 가려움은 끝내 재울 수 없다. 하느님도 가려우신지 봄밤 대책 없이 툭툭 불거지는 저 별들 어찌할꼬! * 김우태 : 1964년 경남 남해 출생. 부산대 국문과 졸업. 198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등. 오월문학상 수상. 김우태 시인은 1989년 등단한 이후 28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낼 정도로 우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학 졸업반 때 처음 응모한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된 뒤 오히려 백지가 두려워졌다”며 “막연히 꿈꾸던 시인이 됐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게 겁이 나서 시를 쓰지 못하고 한동안 ‘사막’을 헤매고 다녔다”고 말합니다. ‘시가 내리지 않는 백지는 절벽보다 캄캄하다./새가 깃들지 않는 숲이 사막보다 적막하듯이//모래시계가 열두 번,/사막의 밤을 뒤집을 동안/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떨고 섰는 낙타야!/잔뜩 짐을 진 너의 잔등은/허물어진 사원의 종루(鐘樓)처럼 힘겹게 솟아 있구나.’(‘백지 앞에서’ 부분) 다시 시를 쓰게 된 것은 결혼하고 자식을 셋이나 낳은 뒤부터였지요.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이 완전할 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모자란 상태에서 좀 더 완전에 가까워지기 위해,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쓸 때 쓰게 된다는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힘들지만 따뜻하고, 각박하지만 달콤한 풍경들

    20대까지는 그다지 차이가 크지 않아 노력 여하에 따라 앞날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말에 청소년, 아니 초등학생들도 “뭘 모르시네”라며 코웃음 칠지 모르겠다. 에 등장하는 세 명의 청소년이 처한 환경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확실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동조하게 된다. 이 소설의 시작은 다소 충격적이다. 주인공 란이가 중학교 3학년이 돼서야 생리를 시작했고, 하필이면 교실에서 그 일이 벌어진다. 옷에 생리혈이 묻은 줄도 몰랐던 란이는 아이들이 웅성거린 탓에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쓰러지고 만다. 도망가버린 엄마 때문에 여자,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란이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나팔관 절제를 결심한다. 자녀를 버리는 엄마 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 임신할 수 없는 몸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짐작하겠지만 란이의 생각은 점차 바뀌게 된다. 란이, 임대아파트에 사는 걸 몹시 창피하게 여겨 들키고 싶지 않다. 겨우 마흔 살에 방구석에서 TV나 보며 소일하는 아빠를 ‘그 남자’로 지칭하며 말도 섞지 않는다. 책임감 없는 부모 대신 칠순의 할머니가 집안 살림을 하며 생업 전선에서 뛰고 있다. 클레어, 란이와 같은 반이다. 200만원짜리 몽클레어 패딩을 입고 온 뒤로부터 본명 대신 클레어로 불린다.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산부인과 병원 원장 딸로 모든 아이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민성, 란이가 아르바이트하다 알게 된 조선족으로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엄마는 중국으로 추방되면서 민성이에게 어떻게든 한국에서 살아남으라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티는 게 힘들기만 하다. ‘넘사벽’ 클레어의 정체오래전 상영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 교양 기타

    사람을 알아보는 두 개의 눈 '안목(眼目)'

    낡은 벼루 구양수 흙벽돌이나 기와가 하찮은 물건이지만 붓과 먹 함께 문구로도 쓰였다네. 물건에는 제각기 그 쓰임이 있나니 밉고 곱고를 따지지 않는다네. 금이 어찌 보물이 아니고 옥이 어찌 단단하지 않으랴만 먹을 가는 데에는 기와 조각만 못 하다네. 그러니 비록 천한 물건이라도 꼭 필요할 땐 그 값을 견주기 어려운 줄 알겠네. 어찌 기와 조각만 그렇겠는가. 사람 쓰는 일 옛날부터 어려웠더라네. * 구양수(歐陽脩, 1007~1072) : 송나라 문인 겸 정치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문구 살 돈이 없어 어머니가 모래 위에 써준 갈대 글씨로 공부했다. 북송 황제 휘종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습니다. 그중에서도 그림 보는 눈이 유난히 밝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화가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독특한 그림 문제를 냈습니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췄다’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되 특히 ‘감춰진 절’을 제대로 표현하라.” 많은 화가가 골머리를 앓다가 희미하거나 작은 절을 그려 놓는 식으로 묘사했지요. 그런데 유독 한 작품에만 절이 그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절 대신에 깊은 산속 계곡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스님 모습만 있었죠. 이 그림을 본 휘종은 그에게 1등 상을 주었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절과 탑을 어떻게든 화폭에 담으려고 했지만, 그는 그냥 물을 길어 가는 스님 모습만으로 근처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지요.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은 뜻이나 가치를 제대로 찾을 줄 아는 게 곧 ‘안목(眼目)’입니다. 한 단어에 ‘눈 목(目)’ 자가 두 개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보는 눈이고 하나는 속을 비추는 거울이죠. ‘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훌훌 털고 싶으나 점점 견고해지는 가족의 끈

    입양은 ‘양자로 들어감 또는 양자를 들임’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입양의 역사는 1950년대 6·25전쟁과 함께 시작돼 지금까지 25만여 명(해외 17만여 명, 국내 8만여 명)이 국내외 새 가정에서 삶을 시작했다. 2006년까지만 해도 해외 입양이 많았으나 2007년을 기점으로 국내 입양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콜롬비아, 우크라이나에 이어 세계 3위의 ‘아동수출국’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복지 후원국인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외 입양을 보낸다. 국외 입양은 국적·인종·언어·문화 같은 태생적인 정체성을 모두 거스르는 일이다. 선택권이 없는 아이는 성장 과정에서 총체적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국내 입양은 어떨까. 같은 하늘 아래 나를 낳은 부모가 살고 있다는 걸 알면 충격에 빠질 게 분명하다. 은 국내 입양을 다룬 소설이다. 고등학교 2학년 서유리, 택시 기사인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다. 엄마 서정희 씨와 지낸 기간은 고작 3년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너를 가슴으로 낳았다”며 입양 사실을 말하고는 얼마 후 사라져버렸다. 유리는 스스로를 ‘입양됐고 버려졌다’고 생각한다. 2층에서 지내는 할아버지와 최소한의 소통만 하는 유리는 2년 후 대학 입학과 동시에 이 집을 떠나 이름까지 바꾸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무겁지만 발랄하면서 흥미롭다엄마 서정희 씨의 죽음과 초등학교 4학년 연우의 등장으로 상황은 뒤바뀐다. 떠날 날만 기다리던 유리가 느닷없이 동생을 떠맡게 된 것이다.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서씨 성을 가진 동생, 구구단도 못 외우고 학교에서 계속 문제만 일으킨다. 4년 장학금과 기숙

  • 교양 기타

    최선과 최고…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 193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등 출간.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후회는 꼭 뒤늦게 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삶의 ‘노다지’인 줄 한 참 뒤에야 깨닫게 되지요. 그때 ‘더 열심히 파고들고’ 그 사람에게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하고 뉘우쳐 보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늦게라도 그걸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어쩌면 남보다 빨리 발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땅에서도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이지요. 옛사람들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해서 어떤 일에 미치지 않고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년 전에도 그런 ‘미친’ 사람들이 많았지요. 타고난 재주는 없었지만 남보다 몇십, 몇백 배 노력해 일가를 이룬 인물들…. 그중에 머리가 너무 나빠 고생하면서도 엽기적인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당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오른 김득신(1604~1684)이 있습니다. 그는 나이 스물이 되어서야 겨우 글 한 편을 지을 정도로 ‘둔재’였지요. 우여곡절 끝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파산선고한 엄마 그리워하는 18세 딸의 분투기

    김설원 작가의 는 제1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으로 2020년 3월 발간됐다. 다양한 이유로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나는 세태 속에서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부모의 ‘파산선고’로 가족이 흩어지는 모습을 담았다. 속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비정하게 “힘들다. 헤어지자”고 선언한다. 열여덟 살 아란은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어느 날, 엄마는 장기 임대아파트의 임대 기간이 끝나가는데 분양금 넣을 돈이 없어 집을 비워야 한다며 또와 아저씨 집에 가서 지내라고 말한다. 또와 부부에게 돈을 좀 빌려줬으니 하숙비 미리 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참 쉽게도 말하는 엄마에게 아란은 자신이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며 매달린다. 하지만 엄마는 “여기는 일자리가 없다. 내가 대도시로 가서 돈을 벌어 올 테니 당분간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살자”고 일축한다. 또와아귀찜, 또와막창구이 등 개업하는 가게마다 실패를 거듭한 또와 아저씨네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 집에서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또와 아저씨는 어려운 형편을 밝히며 ‘나는 지쳤다. 이제는 숨 쉴 힘도 없다. 각자 어디로든 떠나라’는 선언이 담긴 종이를 두 자녀에게 나눠준다. “앞가림하려면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며 맞아주었던 아저씨의 파산선고에 아란의 선택은 떠나는 것뿐이다.치킨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다열여덟 살 아란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학교를 그만두고 7000원짜리 찜질방에서 지내며 생활정보지를 통해 살 집과 일자리를 찾아낸다. 23번 버스 종점에 있는 폐허 같은 집에 월세 10만원을 내고 들어갔고, 대학 휴학생이라고 속인 채 고고치킨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아란의 처지를 생각하면 기가

  • 교양 기타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던 풍경

    아버지의 빈 밥상 고두현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 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팔 때 감쪽같이 없어졌지 얘야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나무 아래 둥그렇게 앉은 밥상 간간이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물메기국 넘어가는 소리에 목이 메기도 하던 그런 풍경이 있었네 해 질 녘까지 그 모습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그날 정독도서관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의 짙푸른 녹음과 가지 위에 초가집처럼 얹힌 까치둥지 때문이었을까요. 어릴 적 밥상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이었지요. 그때 우리 식구는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에 살았습니다. 집도 절도 없어서 오랫동안 절집에 얹혀살다가 계곡 옆에 작은 흙집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죠. 마당 가 평상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키 큰 회화나무 가지 위의 까치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밥상은 대부분 아버지가 차렸지요.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절집이나 산 아랫마을로 일을 나가는 날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희미해서 더욱 간절한 그 시절의 매혹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첫 문장에 매료되어 속으로 빨려들면 오묘한 미로 속에서 수많은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모호하면서도 매혹적인 장면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위트가 운영하는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는 기 롤랑.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 롤랑이라는 이름과 신분증명서를 만들어준 위트는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라는 현실적 조언까지 한다. 8년간 함께 일한 위트가 흥신소 문을 닫자 롤랑은 늘 허전한 현재와 기대되지 않는 미래가 아닌 깜깜한 과거로 떠난다. ‘흥신소’와 ‘탐정’이 추적을 좁혀가며 과거를 선명하게 복원해 낼 것이라는 기대를 주지만, 라는 제목처럼 기 롤랑이 떠나는 길은 불확실하기 그지없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1945년 프랑스 불로뉴비양쿠르에서 이탈리아계 유대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3세에 발표한 첫 소설로 두 개의 상을 받은 그는 이후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유명 문학상을 휩쓸었다. 주요 작품으로 을 꼽는데, 는 현대 프랑스 문학이 거두어들인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노벨 문학상·공쿠르상·부커상을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는데, 모디아노는 33세에 로 공쿠르상, 69세 때인 2014년에는 노벨상을 받았다. 기억의 퍼즐을 맞추다기 롤랑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찾아 나갈까? 유일한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뿐이다. 그것을 단서로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