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영〈소녀 저격수〉
일본은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야욕에 불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점령국들을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셀 수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행태는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인간을 한낱 물건보다 못한 취급을 하며 갖가지 생체실험을 한 것이다.독일은 지난날의 과오를 자국민에게 알리고 인류 앞에 사죄했으며 기념 공간을 만들어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고 있지만,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며 엄연한 사실을 덮고 거짓말하기에 급급하다. 일본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국민을 ‘세계 속 바보’로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한정영 작가의 〈소녀 저격수〉는 일본의 생체실험이라는 드문 소재를 잘 녹여낸 역사 판타지물이다. 초등 국어활동 교과서 수록작 〈굿모닝, 굿모닝?〉의 저자인 한 작가는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면서 대학과 여러 강단에서 강의한 이론을 토대로 〈동화·청소년소설 쓰기의 모든 것〉을 펴내기도 했다.
한 작가는 ‘지어낸 이야기’지만 “그만한 현실이 없었다면 판타지도 만들어낼 수 없다”며 “일본군이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납치해 실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사실이고, 그들과 맞서 싸운 것도 엄연한 역사의 한 부분이지요”라며 〈소녀 저격수〉가 현실을 소재로 삼았다는 걸 밝혔다. 그와 함께 ‘지나간 이야기’를 쓰려는 이유는 그 ‘기억’을 다지려는 것이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자꾸만 지난 역사를 닮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이 부인하며 지우려는 역사를 되살리는 방법은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한정영 작가의 〈소녀 저격수〉가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일제 강점기, 생체실험’ 같은 단어만 봐도 마음이 어두워지지만 〈소녀 저격수〉는 처음부터 활기가 넘치면서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주인공 설아와 함께 산야를 누비면서 ‘일본군 타도’의 활약상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는 소설이다. 기억상실증 설아의 괴력열여섯 살 소녀 설아는 천보산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다. 이웃이라곤 장대할멈 단 한 집밖에 없는 첩첩산중이다. 할아버지가 “산에서 살려면 아무리 계집아이라도 웬만한 산짐승 정도는 잡을 줄 알아야지”라고 말하지만 설아는 총소리가 나면 귀를 막았고, 피 흘리는 짐승을 보는 일도 소름 끼쳤다. 감자밭 일구고 산열매나 약초, 나물을 캐는 게 설아가 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올무에 걸린 토끼를 망태에 담아 오다가 늑대와 마주친다. 토끼를 던져주었지만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 늑대가 살기 어린 눈으로 설아를 노려본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설아는 민첩하게 늑대에 대항하고, 여기저기 물어 뜯기긴 했으나 무사히 돌아온다.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고, 엄청난 괴력으로 늑대와 맞서면서 설아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기억상실증으로 과거를 잊은 설아는 평소와 너무도 다른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일본군이 찾아와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갈무리해달라고 요청하는 과정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잘못 발사된 총에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만다. 혼자 남은 설아는 집을 떠나 독립운동을 하는 백두 대장 일행과 합류한다. 평소 독립군을 도와온 할아버지의 공로를 생각해 산막의 사람들이 설아를 잘 보살펴준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잠시 할아버지와 살던 집으로 돌아온 설아는 자신이 예전에 사용했음 직한 총과 함께 여러 물건을 발견한다. 되풀이되는 악몽,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 설아를 알아보고 접근한 일본군의 놀라운 발언, 설아의 귓가를 맴도는 말들, 혼란스러운 가운데 설아는 기억들을 연결하다 경악하게 된다.
기억을 잃기 전 받은 여러 훈련과 약물 주입으로 인해 성인 남자보다 더 날렵하고 용감한 데다, 지력이 뛰어난 설아의 활약이 소설 내내 이어진다. 산야를 날아다니며 각종 위험을 헤쳐나가는 설아의 매우 역동적인 움직임에 책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게 된다.
일본과 맞서는 독립군과 함께 움직이며 몸을 아끼지 않는 설아의 활약을 통해 지나간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해 앞으로의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