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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성지 순례자들 수송사업으로 '떼돈' 벌어

    북촌한옥마을은 고풍스러운 한옥과 복잡한 현대 도시가 공존하는 곳으로 국내외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 숫자가 연간 수백 만이라니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거의 100% 북촌을 방문한다고 봐도 되겠다. 국제 공인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지만 북촌 주민들 입장에서는 하나도 반가울 게 없다. 고즈넉하던 골목의 풍경을 바꾼 바글바글한 인파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다. 불법 주차로 인한 통행 불편과 밤늦도록 이어지는 소음 그리고 사생활 노출은 삶의 질을 엉망으로 만든다. 주민들과 관광객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고 고민 끝에 종로구청은 일부 주거 지역에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관광객의 통행을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주민들은 당연히 반긴다. 관광객은 아쉽다는 반응이다. 주변 상인들은 매출 감소를 우려하며 반발했다. 누구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주민들은 동네가 전쟁터로 변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관광객 중에는 대문이 열려 있으면 태연히 들어와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는데, 자기 집 앞마당에 낯선 사람이 서성이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통행 제한이 아니라 아예 통행금지가 필요해 보이지만 전문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북촌은 서울의 핵심인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관광 코스다. 북촌이 죽으면 서울 도심 관광객 수 감소는 불 보듯 뻔하다. 상인들 입장도 자기 이익만 고집한다며 무시할 수만은 없다. 상권이 죽으면 동네가 죽고 동네가 죽으면 동네의 경제적 가치가 하락한다. 해법은 쉽지 않다. 베네치아 관광객 2000만 명, 현지인의 400배거주지의 관광지화로 인한 갈등은 북촌한옥마을만의 고민이 아니다. 여행객이 많이 찾는 도시란 도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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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매수' 불가능한 시스템…300년 전성기 이끌어

    고대 아테네 디오니소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비극(悲劇) 경연이었다. 기성 또는 신인의 차별이 없었고 새로운 작품만 출품할 수 있었는데, 이때 채점 방식이 오묘하고 절묘하다. 먼저 아테네의 10개 부족이 각각 약간 명을 추천한다. 이를 밀봉해 보관했다가 경연 전 집정관이 무작위로 10명을 추첨했다. 이 10명이 경연 심사를 하는데 집정관이 이 중 5개를 골라내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왜 전부가 아니라 5개만 골랐을까. 일단 부정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다. 10표 모두 개표 시 6명만 매수하면 끝이다. 그러나 5표 개봉 시 8명을 매수해야 확실하게 우승이 보장된다. 아테네는 법에 대한 순종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가장 중시한 도시국가다. 8표 매수, 절대 쉽지 않다. 그래도 어딘지 시시하다고? 5표 개표는 단순한 숫자상 의미가 아니다. 절반 개표는 선정의 우연성과 판정의 불가피한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경연 참가자 A, B, C가 있다고 치자. 세 사람은 순서대로 각각 2표, 3표, 5표를 얻었다. 그런데 집정관이 고른 5표가 하필 A와 B를 선택한 거였다면? 결과적으로 미개봉 5표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따라서 우승자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며 자만심을 억제하게 된다. 탈락자 역시 열패감이나 자괴감에서 벗어난다. 그러니까 패자에게는 위로를, 승자에게는 겸손을 느끼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경연에서 우승한 사람은 아마 이런 소감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운이 좋았지요. 하하하.”  엽기에 가까운 도제 선출 방식연극 경연 평가는 자의성, 우연성을 장점으로 할 수 있지만 정치 지도자를 그렇게 뽑았다가는 큰일 난다. 무엇보다 그 프로세스를 최대한 공정하고 투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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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도 진출 상인들, 우편 통해 각국 정보 수집

    총이나 대포처럼 직접적 살상력을 지닌 것만 무기로 본다면 현대전을 절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신체에 바로 위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암호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3대 전선 중 하나인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상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일이다. 일본은 당황했다. 감청기를 통해 새들이 지저귀는 듯 희괴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문자로 옮길 수 없는 언어, 그것은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인디언 나바호족의 언어였다. 나바호족의 언어는 문자 없이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구전언어로 어법, 성조, 음절이 복잡하고 심지어 하나의 동사로 주어, 서술어, 부사를 포함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 난해한 언어를 한 번 더 꼬아 부엉이는 정찰기, 제비는 어뢰정, 상어는 구축함 등으로 짝을 맞춰놓았으니 일본 입장에서는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계 언어에 가까운 이 암호가 가장 빛을 발한 게 이오시마 전투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나바호 병사들은 한숨도 자지 않고 1000개 가까운 정보와 명령을 전달했다. 통신을 담당했던 한 미군 정보 장교는 나바호 암호가 없었다면 섬을 함락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회고했다. 정보력 만으론 부족고대인이라고 암호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을 터. 다만 방식이 조악해 풀기가 쉬웠을 뿐이다. 카이사르는 가족이나 측근과 비밀통신을 할 때 알파벳을 세 자씩 뒤로 물려 읽는 방식으로 문장을 작성했다. 가령 A는 D, B는 E 같은 식이다. 그가 가족에게 받은 마지막 메시지는 “암살자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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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 본능의 힘…난민촌에서 1000년 해상 제국으로

    흔히 베네치아 본섬을 두고 손모아장갑이 맞물린 형태라고 한다. 항공사진을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오른쪽을 장갑이라 하고 왼쪽을 새라고 치자. 마치 날아오르는 새의 몸통을 누군가의 손이 움켜쥐고 있는 듯한 형태인데, 여기에 역사 지식이 더해지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때 백조였지만 주저앉은 도시, 베네치아의 일대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미운 오리 새끼가 알고 보니 백조였다는 동화가 있다. 베네치아가 딱 그랬다. 실은 오리만도 못한 존재가 베네치아였다.베네치아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경작도 파종도 수확도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베네치아는 애초에 도시가 들어설 지형이 아니었다. 섬 몇 개 떠 있는 습지대에 문명을 세우려는 사람은 없다. 먹을 거라고는 생선이 전부고, 식수는 빗물뿐이다.자연의 호의에서 완벽하게 배제된 이 도시가 천년 해상 제국으로 굴기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사건이다. 도시의 연대기를 알의 시대와 오리의 시대 그리고 백조의 시대로 나눠보자. 먼저 알의 시기다. 402년 고트족이 이탈리아 북부로 침입해 들어왔을 때 북동부 베네토 지역 사람들이 근처 석호(潟湖)로 피란을 떠난다. 452년에는 훈족의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고대 로마지역 피란민 중 일부가 또 석호로 도망을 쳤다. 568년에는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방문한다. 석호에 또 사람들이 몰린다. 그러니까 초기 베네치아는 난민촌이었던 셈이다.전란이 끝나자 고향에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본토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만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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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항해 이끈 또 다른 동력 '해도와 세계지도'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길을 연 것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후 6년이 지난 1498년이다. 선단을 이끈 총사령관은 바스쿠 다 가마로 그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온 것은 1492년이다. 주앙 2세는 프랑스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바스쿠 다 가마를 투입했고, 그는 프랑스 선박 억류 조치라는 초강경 대응으로 사태를 해결한다. 그러나 잠시 반짝 빛났을 뿐 다시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497년 인도로 가라는 특명과 함께 재등장해 항해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의 1차 목표는 희망봉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는 기존의 바닷길을 버리고 대서양 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항해에 유리한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인데 말이 쉽지, 당시 안 해 본 일은 다 공포요 모험이다. 123일의 항해 끝에 선단은 희망봉을 돌아 꿈에 그리던 인도양으로 들어선다. 포르투갈의 등장에 예민해진 이슬람 상인들바스쿠 다 가마 선단이 인도 서남단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에 도착한 게 1498년 5월 20일이다. 동아프리카에도 일정 수준으로 발전한 이슬람문명이 있었으나 캘리컷은 그와는 차원이 달랐다. 풍요의 땅 캘리컷 군주 사모린은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을 반겼지만, 일행이 가져온 조악한 유럽 상품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그래도 노림수는 있어 상품을 좋아하는 척하고 환대도 이어진다. 신경이 곤두선 이는 동아프리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무역 루트를 독점하고 있던 캘리컷의 이슬람 상인들이다. 유럽인을 본 이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망할 놈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이들에게 바스쿠 다 가마는 잠재적 경쟁자였고 십자군전쟁의 기억은 증오에 가까웠다. 이슬람 상인들은 포르투갈과 캘리컷의 무역협정 체결을 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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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에서 브라질만 포르투갈어 쓰는 이유, 아시나요?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가 짓궂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시기와 질투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일가에서 형이 동생을 죽였다. 살인이 포인트가 아니다. 시기와 질투가 핵심이다. 서양 속담에 이런 게 있다. “가장 큰 고통은 친구의 성공을 지켜보는 것.” 이때 친구를 동료, 친척, 부하 등으로 바꿔도 상관없겠다.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을 보며 선조가 느낀 감정도 질투였을 것이다.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이순신의 수명은 그만큼 앞당겨졌다. ‘키 큰 양귀비 신드롬tall poppy syndrome’은 질투를 활용한 성공적인 사례로 만들어진 용어다. 로마가 왕정이었을 무렵 한 왕이 아들을 경쟁 도시에 거짓 투항시킨다.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묻는 아들에게 왕은 양귀비밭에서 홀(笏, staff)로 키가 큰 양귀비를 쳐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은 서민들이 상류층에 가진 질투심을 이용해 경쟁 도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켰다. 근현대에서 이 질투가 집단으로 전염되는 경우를 우리는 ‘공산주의’라고 부른다.에스파냐가 발견한 아메리카, 알고 보니 포르투갈 영토?역으로 하면 가장 신나는 자랑이 질투심 느끼는 상대에게 늘어놓는 성공담이다. 자신에게 찾아올 수 있었던 행운을 놓친 사람에게라면 더더욱. 7개월의 항해를 마친 콜럼버스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주앙 2세였다. 그의 배가 폭풍으로 리스본에 기착했기 때문인데 주앙 2세는 즉시 콜럼버스를 왕실로 불러들였다. 항해가 어땠느냐는 왕의 질문에서 그는 시기와 질투를 읽었다. 황금도 없었고 아시아의 가톨릭 군주도 만나지 못한 그저 육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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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카 대륙은 중국이 먼저 발견할 뻔했다?

    장관이었다. 출항을 보려고 항구에 모여든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선단이 아침 햇살 아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1405년 6월 난징에서 출발한 명나라 선단은 근대 이전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재정을 소모했다는 평에 걸맞은 초호화 거대 함대였다. 기함인 뤼메이마오(綠眉毛)는 길이 150m, 폭 60m에 적재량이 무려 2만 톤이다. 이게 과연 15세기 선박 제조 기술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고(2024년 현재 대한민국 해군이 개발 중인 경항공모함의 길이는 265m, 폭은 약 43m), 여기에 60여 척의 대형 선박 등을 더하면 전체 선박 수는 무려 2000여 척(7차 원정까지의 누계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부 기록에는 3500여 척)에 달했다. 승무원 수는 모두 2만7000명이었다고 하는데, 중국인 특유의 허풍을 감안해 모든 수치를 3분의 1로만 잡아도 유럽 전체의 선박 수보다 많았다. 출항의 목적은 더 놀라웠다. 그냥 자랑이었다. 당시 황제인 영락제는 그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규모와 선박 제조 능력과 풍성한 재정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 그 항해를 통해 전 세계에 유통망을 만들 생각까지는 없었다. 만약 그런 목적으로 원정이 이루어졌다면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없었을 것이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중국인의 성취로 끝났을 것이다. 원정으로 얻은 것은 인도양 주변의 50여 개국에서 명나라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뿐, 그마저도 얼마 안 가 해금 정책으로 바닷길을 닫아버렸으니 밥상은 차려놓고 정작 수저는 들지 않았던 셈이다. 부자 함대와 빈자 함대의 대차대조표초라했다. 1492년 8월 세비야 인근 팔로스항을 출발한 콜럼버스의 선단은 달랑 세 척이었다. 기함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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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로 떠난 순간, 이사벨 여왕이 그를 불러들였다

    어느 시대나 벤처는 고달프다. 돈을 몇 배로 불려주겠다는데도 투자자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처음 하는 일이라 제안자의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하고 투자자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설명하고 설득하는 동안 혀가 닳고 구두축이 닳는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가 닳아 무의미하게 사라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하면 우리는 달걀을 깨서 세웠다는 에피소드 정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적당한 고생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투자자를 찾아다닌 여정은 좌절과 절망의 파노라마였고, 대서양 항해는 목숨을 건 기만이 가까스로 목적을 달성한 기적이었다.표류지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다1451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스물다섯에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가 탄 배가 해적선의 공격을 받은 것인데, 콜럼버스는 상처를 입은 채 무려 5해리(거의 10㎞)를 헤엄쳐 포르투갈의 라고스 인근 해안에 도착한다. 라고스는 바로 엔히크 왕자가 대서양 탐사를 위해 항구와 조선소를 지은 곳이다. 바다에 관심이 많은 콜럼버스에게 이 표류는 주체할 수 없는 영감을 준다. 그는 제노바로 돌아가는 대신 리스본항에서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웠고, 틈만 나면 배를 타고 주변 항구를 돌았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원양 어선 캐러벨 조종법을 익힌 것도 이 시기로, 1477년에는 아이슬란드를 지나 북극권 한계까지 항해했으니 북쪽으로는 거의 끝까지 간 셈이다.리스본에서 콜럼버스는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아내인 펠리파의 아버지는 엔히크 왕자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한 선장이자 관리였고, 할아버지는 아예 왕자를 직접 섬긴 기사였다. 바닷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