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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우편 시스템의 등장, 근대 국가의 시작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역참’으로 불리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고대 페르시아부터 중세 몽골제국까지 널리 사용됐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우편시스템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대국가의 주요 기반 중 하나인 근대 우편시스템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됐다. ‘데 타시스(de Tassis)’라는 라틴어화된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타소 가문이 우편시스템 등장에 큰 역할을 했다.타소 가문 내에서도 1459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역의 코르넬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타소는 이 시스템을 일군 핵심 인물이다. 그는 자기 가문이 베네치아에서 공화국에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기업인 ‘콤파니아 데이 코리에리(Compagnia dei Corrieri)’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란체스코 타소 가문의 다른 분파(산드리 가문)는 로마교황청에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1489년, 프란체스코의 형인 이아네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1세의 우편 서비스 책임자가 됐다. 세기말에는 무상으로 우편 서비스를 시행한 보상으로 이아네토가 오스트리아 케른텐 지역의 광산과 봉토를 받았다.하지만 가문의 사업을 다른 수준으로 높인 것은 프란체스코였다. 광산이 타소 가문의 중요한 수입원이긴 했지만, 타소 가문에게 두드러지는 부를 안긴 것은 우편 서비스였다. 프란체스코는 유럽 대륙 전역의 우편 서비스 조직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프란체스코는 1490년에 우편 마차와 말을 교대하는 최초의 상설 우편 노선을 구축했다. 이 노선에서는 편지가 들어 있는 봉인된 가죽 가방이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다. 우편 마차가 밤에도 운행했기 때문에 이동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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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청어로 일어선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17세기 초·중반 세계무역을 주도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물자 교환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학자 판 데르 쿠의 지적처럼, 17~18세기에는 유럽 대륙 물자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중앙 저장소 역할까지 수행했다.네덜란드 성장의 발판은 처음에는 소금, 곧이어서는 청어가 담당했다. 네덜란드가 국제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발트해 교역에서부터다. 원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 발트해 주변 지역에선 필요한 소금을 북독일이나 폴란드의 암염 광산에서 생산한 암염으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사용했다.하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발트해 지역의 소금 교역은 네덜란드인의 주무대가 된다.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 서부 지역과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생산하는 풍부한 바닷소금을 공급하며 부를 쌓았다. 곧이어 프랑스산 와인 등으로 교역 품목을 확대했다. 벌크선을 통한 각종 화물 교역도 점차 늘려나갔다.소금 교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적잖은 위기와 저항도 있었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네덜란드와 대립하면서 스페인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엠바고를 시행했다. 이베리아반도산 소금 무역에서 네덜란드 상인이 축출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한자동맹 상인들은 선박이 부족해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북유럽에서 소금 부족 현상이 심해지고 소금 가격이 급상승하는 부작용만 빚어졌다.이베리아반도에서 소금을 얻기 힘들어지자, 네덜란드는 1621년 이후 포르투갈산 소금 교역 비중을 줄이는 대신 서부 프랑스산 소금으로 대체를 시도했다. 하지만 프랑스산 소금은 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생선 저장용으로 부적합했고,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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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권력투쟁의 산물 '형제 살해' 전통
1574년 12월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술탄 무라드 3세의 즉위에 앞서 이스탄불 시민들은 선왕의 관이 술탄의 궁전에서 아야소피아에 자리한 무덤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봤다. 행렬 뒷자락에는 5명의 어린 왕자들의 관이 뒤따랐다. 1595년 메흐메드 3세가 즉위할 때는 “19명의 무고한 왕자가 어머니의 품에서 끌려 나와 신의 자비 안으로 들어갔다”고 당대의 역사가 페체비는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오스만제국 관습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새 술탄이 즉위하면 동복, 이복,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술탄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형제 살해’의 전통을 꼽을 수 있다. 이 전통은 왕위 계승권의 경쟁자를 제거해 왕권의 안정을 취하는 제도 중 가장 극단적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왕위 계승 경쟁자를 물리적·제도적으로 모두 죽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오스만제국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왕위 승계가 이뤄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근원적 문제는 하렘 조직이었다. 대부분의 술탄은 하렘의 신분이 낮은 첩들을 총애했고, 여러 첩의 자식들이 술탄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심지어 노예 출신 첩의 자식들이 술탄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흔했다. 노예로부터 후사를 얻는 관행은 무라드 1세 때부터 확립됐는데, 무라드 1세의 후계자인 바예지드 1세의 어머니는 ‘귈치첵(Gülçiçek, 장미)’이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자유민이 아니었다. 연대기 작가 슈쿠룰라는 “바예지드 1세는 에르트구룰, 술레이만 공(아미르), 술탄 메흐메드 1세, 이사, 무사, 무스타파 등 6명의 아들을 뒀는데 이들은 모두 노예 어머니 소생”이라고 전한다. 그의 아들 메흐메드 1세도 후일의 무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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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에 빠졌던 명나라 상류층
전통 시대 중국의 경제는 어느 수준까지 발전했을까. 명나라 말·청나라 초 변혁기 인물인 장대(張岱)의 삶을 통해 그 시절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명나라 말 만력(萬曆) 25년(1597년)에 태어나 청나라 초 강희(康熙) 23년(1684년)에 죽은 장대는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수필집인 <도암몽억(陶庵夢憶)>과 역사서 <석궤서(石匱書)>, <석궤서후집(石匱書後集)> 등을 썼다. 그가 쓴 책은 문학성이나 사상의 깊이보다는 당시 상류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에서 손꼽는 명문가의 장손으로 태어난 장대는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처음에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차(茶)였다. 그는 차의 미묘한 맛을 구분했다. “1614년 여름 반죽암을 지나다가 계천의 샘물을 길어 맛을 보았다. 인의 톡 쏘는 쓴맛에 깜짝 놀랐다. 유심히 물 빛깔을 살펴보았는데, 마치 찬 서리가 내린 가을날 순백의 달빛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산을 휘감은 부드러운 안개가 소나무와 바위를 품고 있다가 막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샘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어떨까’ 하고 궁금해져서 실험을 거듭했다. 길어온 샘물을 사흘 동안 그대로 묵히면 돌의 비린내가 없어지며, 차의 향기가 더욱 진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혀를 입천장으로 밀면서 물을 입안에서 좌우로 굴리면 샘물의 오묘한 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차에 대한 취미가 식은 뒤엔 고금(古琴)이라는 현악기에 푹 빠졌다. 1616년 마음이 맞는 젊은 친척과 친구 6명을 모아 이 악기의 연주법을 함께 공부했다. 고금에 대한 관심이 시들자 이번엔 &l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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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벼랑 끝으로…기후가 바꾼 역사
명나라 말기 재난 기록인 <재황기사(災荒記事)>를 쓴 유학자 진기덕(陳基德)은 명나라 후기 물가와 관련한 기록을 다수 남겼다. 그는 만력(萬曆) 연간(1573~1619) 풍요의 시기를 “곡물 1두의 가격은 결코 3~4푼을 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는 물가가 낮을 때 모든 사람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먹을 것이 부족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당시는 번영의 시기였다. 진기덕도 “사람들은 콩과 밀 따위를 소와 돼지에게나 먹일 것으로 여기고는 내던졌다. 신선한 생선과 최고급 고기가 모든 가정에 충분했다. 모두가 이런 번영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했다”며 풍요로운 시절을 회상했다. 가정 연간 이후 명나라에는 부성(府城) 152개, 주성(州城) 240개, 현성(縣城) 1134개, 선위사성(宣慰司城) 12개, 선무사성(宣撫司城) 11개, 초토안무사성(招討安撫司城) 19개, 장관사성(長官司城) 177개 등 모두 1745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세계에서 도시화도 가장 빠르게 진행됐다. 북경과 남경·소주·항주·개봉 등 대도시는 인구가 100만 명 안팎이었고, 부성과 현성 등 중간 도시 인구도 대략 30만~40만 명에 달했다.경제적 안정과 꾸준한 성장을 발판 삼아 원래 사회적 신분이 낮았던 상인도 부를 축적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명대 중기 상인 장내의(張來儀)는 ‘고객락(賈客樂, 상인의 즐거움)’이라는 시에서 “인생에서 장사가 제일 즐겁다(人生何如賈客樂)”고 읊었다. 휘주 상인 왕도곤(汪道昆)은 자식 교육과 관련해 “우리 집안은 대대로 평민이었지만 이제 유학을 배워 집안을 빛내려 하니 앞으로 자손들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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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는 실용성의 어머니
16세기 초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지옥이라도 정복할 만큼 많은’ 대포를 보유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유럽의 변방이던 당시 잉글랜드에선 제대로 된 대포를 만들 인력도, 기술도 없었다. 잉글랜드에서 자체 제작한 대포는 툭하면 폭발해 터져버렸다.당시 최고의 대포는 독일제로 아우크스부르크의 베크 공장과 뉘른베르크의 자틀러 공장에서 제조한 제품이었다. 독일의 대포 주조업자들은 정확하면서도 바퀴 4개짜리 마차로 옮길 수 있는 ‘가벼운(?)’ 대포를 만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하지만 군사기술 분야에서 크게 낙후돼 있던 섬나라 영국은 대륙의 장인들에게 대포 제작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헨리 8세는 플랑드르의 장인이던 한스 포펜루이테르에게 대포 생산을 주문해야 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만든 ‘미친 마거리트(Mad Margaret)’라는 대포는 길이가 5.5m, 구경 54cm에 무게가 무려 15톤에 이르는 대형 대포로 명성이 자자했다.하지만 잉글랜드에서 1541년 중요한 발전이 이뤄진다. 바로 성직자 윌리엄 레베트가 애시다운포트리스트에서 자체적으로 철제 대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제 대포는 깨지기 쉽고 대단히 무거웠다. 그뿐 아니라 청동 대포보다 정확도도 떨어지고 크게 만들기도 어려웠다, 대신 각 지방의 군소 대장간에서 싼 가격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결국 철제 대포 생산에 주력한 잉글랜드는 이른 시일 내에 철제 대포 수출국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결국 1574년이 되면 너무나 대포가 많이 수출돼서 대포 수출이 금지되기에 이를 지경에 이른다.그렇지만 잉글랜드가 철제 대포 생산을 본격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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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보다 못했던 노비의 '몸값'
동서 사회를 막론하고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조선 시대 노비(奴婢)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초·중기엔 노비가 인구의 약 40% 수준까지 차지했고,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사실상 ‘노예제’가 지속됐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노비제’ 문제는 한국사를 바라보는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실제 조선시대 노비의 처지는 어땠을까. 객관적 지표로 살펴볼 수 있는 게 노비의 몸값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 노비는 말이나 소보다도 못한 몸값이 매겨졌다. 노비의 몸값은 당대의 법전에 담긴 규정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 매매한(買賣限)조에는 토지와 가사(家舍, 집)의 매매 시 거래를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후 15일로 정했다. 그리고 본문에 주(註)를 달아선 “노비도 이와 같다”고 규정했다.이 규정에 대해 북한 역사학계 1세대 학자인 김석형은 “노비도 매매한 지 15일이 지나면 무르지 못한다는 것이요, 매매 후 백일 내에 관청에 신고해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노비는 토지나 가사와 동일하게 취급됐다”고 해석했다. 이와 함께 노비거래 항목이 소와 말의 매매한(買賣限)과 같은 조목에 들어 있는 것을 근거로 노비의 처지가 소와 말보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그뿐 아니라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의 상소문을 통해 살펴볼 때 “사람값이 말·소의 값보다 훨씬 못했다”고 지적했다.그에 따르면 그나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의 몸값이 조금 오른다. 노비를 토지에 결박하기 위해 노비의 매매를 크게 제한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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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키우려 상업을 억압한 조선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1394년 집필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장인(匠人)과 상인에 대해선 아주 적은 분량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국가의 기반인 농업이 아닌 ‘부차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인다는 의도로 의식적으로 상업을 도외시한 것이다. 상공업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농업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생겨선 안 된다는 것은 당대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유학 사상이었다.‘무본억말(務本抑末, 근본에 힘쓰고 말업을 억제함)’이라는 구호 아래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억압했다. 농촌에 장이 서는 것을 금지했고, 그 결과 고려시대에 있었던 농촌 장시도 사라졌다. 제조업 관련자는 극소수였다. 모시와 비단 의류, 신발, 가구, 부엌 기구, 가죽제품, 벽돌, 종이, 자기, 무기, 갑옷 등을 만드는 직업 장인은 한 줌에 불과했다. 제철과 야금 인력도 극소수로 제한됐다.구체적으로 전국에서 중앙정부에 고용된 장인 숫자는 6600명가량으로 법률로 제한됐다. 중앙에 130개 분야에서 2800명 정도가 배치됐고, 지방에는 27개 분야에 3800명이 할당됐다. 장인들은 중앙에 편중됐고, 주로 지배계층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주로 생산했다.지방에 등록된 장인 중 3분의 1은 경상도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마을별로 살펴보면 한 마을이나 지역에서 두세 명을 넘지 못했다. 종이 생산으로 유명하던 전라도 전주와 남원은 해당 기술 장인이 각각 23명씩 있었다. 경주, 상주, 안동, 진주 같은 큰 도시에서도 대장장이나 야금장이는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자체 비단 산업은 자리 잡지 못했고, 품질 좋은 비단 제품은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 수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