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문제·양제 때 첫 시행 추정
학자·관료가 문자 독점해 지배층 유지
'영원한 관료 사회' 중국을 떠받쳐온 힘
인재 등용 큰 역할에도 부작용 커져
송나라 때 수험용 텍스트 약 35만자
책 한권 분량 암기…사상 재해석 그쳐
명나라 땐 외모·이름 이상해도 장원 '박탈'
1300년간 736회…'시험 위한 시험' 전락
조선 시대 민화 장르로 ‘일로연과도(一鷺蓮果圖)’가 있다. 연꽃이 열매가 맺은 배경으로 백로 한 마리가 거니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여름 철새인 백로와 연밥이 매달리는 가을이 현실에선 이뤄질 수 없는 조합이라는 데 포인트가 있다. 한걸음에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를 연달아 통과하라는 뜻의 일로연과도(一路連科圖)와 발음이 같아 시험 합격을 바라는 선물용으로 널리 유통됐다. 과거 합격을 향한 전통사회 식자층의 절실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학자·관료가 문자 독점해 지배층 유지
'영원한 관료 사회' 중국을 떠받쳐온 힘
인재 등용 큰 역할에도 부작용 커져
송나라 때 수험용 텍스트 약 35만자
책 한권 분량 암기…사상 재해석 그쳐
명나라 땐 외모·이름 이상해도 장원 '박탈'
1300년간 736회…'시험 위한 시험' 전락
동양 사회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으로 과거제도를 꼽을 수 있다. 헝가리 출신 중국학 연구자 에티엔 발라스에 따르면 개방적·객관적인 시험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관료를 뽑는 이 획기적인 제도는 ‘영원한 관료제 사회’로 불린 중국을 떠받치는 근간 역할을 1000년 넘게 맡았다. 학자·관료층은 문자를 독점하며 사회 지배층의 지위를 놓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반면 시험을 준비한 수많은 당사자에겐 ‘시험지옥’이었다고 일본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묘사했다. 하지만 이런 과거제도를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만들었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찾기 힘들다.
과거제도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불분명하다. 한국과 일본 학계에선 수 문제(재위 581~604년) 때 과거가 생겼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반면 중국과 구미에선 수 양제(재위 604~617년) 시기, 구체적으로 수 양제 대업 1년(605년)에 등장했다고 주로 판단한다. 하지만 당나라 시대 이후로 등장 시기를 미루는 견해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첫 과거제 시행과 관련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당나라 설등(647~719년)이 692년에 올린 상주문에 “수 양제가 진사 등의 과목을 두었다”고 명시했지만, 이는 수 양제 때로부터 100년가량 뒤에 나온 주장일 뿐이다. 후대인 오대십국 시대에도 수 문제 개황(581~600년) 연간이나 당 태종(재위 626~649년) 때 과거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뚜렷한 근거 없이 유포됐다.
과거의 ‘출생’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데는 용어가 불명확한 영향도 크다. ‘과거’라는 단어는 당나라 후기 문헌에서야 나타난다. 송나라 때까지도 한대 이래 사용됐던 ‘공거(貢擧)’로 불렸다. ‘진사(進士)’, ‘빈공(賓貢)’ 등 과거와 연관된 단어들이 시대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혼용되면서 혼란은 심화했다.

당나라 시기 중앙정부는 국자감과 같은 관학 교육을 통한 관인 양성을 시도했다. 국가 차원의 관인 자격자 양성사업에선 유교 경전을 주로 다루는 명경과(明經科)가 주목받았다. 하지만 필기시험이 강화되면서 점점 문학적 소양이 중요해졌다. 그에 따라 ‘아름다운 문장으로 뽑는 과목’이라고 일컫던 진사과(進士科)의 위상이 점점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과거제도는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다. “빈한한 이들은 급제하지 못하면 굶주리고, 대대로 벼슬하던 이들은 급제하지 못하면 관인 가문이 끊어진다”고 왕정보(王定保)가 <당척언(唐言)>에 기록할 정도로 모두가 과거를 중시했다. 당나라 후기에는 전쟁 중에도 거의 매년 과거를 시행했다. ‘안사의 난’ 8년 동안 과거를 치르지 않은 때는 762년 한 해에 불과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늘었다. 송나라 시대 과거 수험용 텍스트들의 글자 총수는 약 35만 자로 추정된다. 엄청나게 많은 수로 보이지만, 현대의 책 기준으로 1페이지에 1000여 자를 담은 350페이지 서적 한 권 분량에 불과하다. 주어진 텍스트에 주석을 가미하며 암기를 해나간 게 과거 공부의 요체였다. 중국의 사대부들은 고대부터 중국에서 생산됐던 사상들을 똑같은 문자를 사용해 재해석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시험이 공정하게 진행되지도 못했다. 명나라 때에는 장원을 정할 때 얼굴이 못생겼거나, 이미 정한 장원의 이름이 마음에 안 들거나, 황제가 꾼 꿈의 내용 때문에 장원이 뒤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청나라 때는 “회시 1등은 문재(文才)가 가장 뛰어나고, 전시(殿試) 장원은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이라며 실력보다 운을 강조한 ‘회원천하재, 전원천하복(會元天下才 殿元天下福)’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과거 시험장에선 시험관 매수(關節), 시험지 바꿔치기(換卷), 커닝페이퍼 소지(挾帶), 대리시험(槍代) 등 부정행위도 끊이지 않았다.
1300년 동안 736회 과거시험이 실시되면서 과거는 후대로 갈수록 ‘시험을 위한 시험’의 성격이 강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팔고문’이다. 팔고문은 유일한 용도가 과거를 위한 것으로, 아무런 실용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화려한 대구, 엄청난 과장, 화려한 수사로 구성된 팔고문이 명·청 시대 500년간 천하에 ‘범람’했다. 중국의 역사학자 진정은 “과거제라는 미끼를 덥석 문 관료들과 예비 관료들은 지배자인 군왕들에게 순치된 통제 가능한 종복들로 스스로 안주했다”며 “과거제를 통해 지배자에 대항하는 도전성이 거세당했다”고 일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