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롭지 않았던 대중의 정치 참여
배상금·영토획득 없는 러·일 전쟁 강화조건
"기대에 못 미친다"…日 국민 불만 커져

도쿄 히비야공원 등서 잇따라 연설회
정부 제지에도 '강화 반대' 목소리 분출
연쇄 폭력 행위…언론사·파출소 습격

엇갈리는 '히비야 방화사건' 평가
'폭동' '무정부 사태' 비판 목소리 속
"민중이 처음으로 정치 세력화" 평가도
러일전쟁 강화협상에 불만을 품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 모인 일본 군중. 위키피디아
러일전쟁 강화협상에 불만을 품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 모인 일본 군중. 위키피디아
1905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출발한 성난 시위대 중 일부가 고쿠민(國民)신문사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관, 신문사 직원들과 뒤얽힌 난투 끝에 윤전기 2대를 파괴했다.

일본의 유력 신문 중 유일하게 포츠머스 강화 회의의 결과에 대해 찬성 견해를 밝힌 이 신문에 대중의 분노가 집중됐다. 당시 일본은 비록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서구 열강과의 종전 협상에선 과거 청일전쟁 때와 같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획득이라는 결실을 얻지 못했다. 총동원병 수 108만8996명, 전사자 8만7360명, 부상자 38만1313명의 총력전을 벌인 것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였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되던 당시, 일본 대중의 기대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간 격차는 매우 컸다.

이런 상황에서 고쿠민신문은 “배상금을 받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배상금 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며 “한국의 보호권을 취득하고, 뤼순과 다롄 등의 조차권을 획득한 것은 성과”라고 주장했다.

앞서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었다. 1905년 8월 31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교섭이 난항에 봉착한 사실이 일본 신문들에 알려졌고, 다음 날 오사카아사히신문이 “덴노(천황) 폐하께 화의를 파할 것을 명하시길 청원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다른 유력지들도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논설을 게재했다.

9월 2일 강화문제동지연합회가 5일 정오부터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정담(政談)연설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추밀원을 방문할 때 요청할 내용도 결정했다. 당시의 양대 정당인 정우회(政友會)와 헌정본당(憲政本黨)에 강화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시민들이 들썩이는 것을 우려했다. 9월 5일 가쓰라 다로 내각은 치안경찰법 위반을 이유로 들어 국민대회를 금지했다. 하지만 오전 11시 히비야 공원 외문(外門) 밖에서 소매상과 전통 장인을 중심으로 한 중소 상공업자들이 집결했고, 이들이 경관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후 1시경엔 개회가 선언됐고, 강화조약 반대 결의안이 낭독됐다.

대회 후에 시위대는 천황에게 조약 비준을 거부할 것을 탄원하기 위해 니주바시마에(二重橋前) 광장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또다시 무단 집회로 규정돼 경관들의 제지를 받았다. 이에 시위 인력 대다수는 신토미치(新富座)에서 열린 연설회로 이동했고, 일부가 앞서 말했듯 고쿠민신문사로 향했다.

신토미치에서 열린 연설회에 군중들이 출입할 수 없게 되자 군중과 경찰들이 난투를 벌였다. 몰린 군중들은 내상(內相) 관저에도 난입했다. 경찰과의 대치 속에 곳곳에서 방화까지 일어나는 등 대립이 격화했다.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젊은 도시 하층민을 중심으로 경찰서와 파출소를 습격하고 방화하는 행위가 이어졌다. 군중들은 외무성과 니콜라이 교회, 가쓰라 다로 수상 관저, 추밀원 의장관사, 미국 공사관 등으로 집결했다가 경찰의 엄중한 경고를 들은 후 흩어졌다.

결국 가쓰라 내각은 이날 밤 도쿄시와 주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6일에도 시위가 이어졌고, 도쿄시가철도회사 소속 전차가 불에 탔다. 또 아사쿠사 주변의 기독교 교회와 교회 관계자의 집이 파괴되고 불에 탔다. ‘히비야 방화 사건’이라 불린 일본 최초의 대규모 무력시위는 이렇게 전개됐다.

일련의 충돌로 경찰서와 분서 22개소, 파출소 258개소가 습격받고 불에 탔다. 이로 인해 도쿄 시내 파출소의 약 70%가 소실됐다. 사망자는 17명에 달했고, 도쿄에 계엄령이 선포돼 출판 금지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참여한 군중 수는 공원 내에 5000여 명, 이 외 지역 시위 군중이 4000~5000여 명, 경찰서 습격 등의 현장에 참여한 인원이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 이후 기존 정당에 조직되지 않은 도시민을 국민이나 시민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에서 대외정책 등을 논의할 때 학생 단체와 청년 단체 등이 ‘국민’ ‘시민’에 의거해 정치활동을 전개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들은 ‘국민대회’ ‘시민대회’ 등의 이름을 딴 옥외 집회를 열며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슬로건으로 군중을 동원했다.

각종 집회에 동원된 시민들은 주로 러일전쟁을 전후해 대도시에 유입된 젊은 도시 하층민들이었다. 일본에서 핵가족을 형성한 첫 세대이자 절반가량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한 집단이었지만, 자녀들의 취업난과 학업난에 더해 수도·전기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생활고에 직면한 첫 세대이기도 했다. 이들을 선동한 지식인 청년들은 기성정당과 정치, 노년 세대에 대해 비판을 무기로 내세웠다.

히비야 방화 사건에 대해선 당대부터 평가가 엇갈렸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유명 인사들의 논평은 “폭동” “무정부, 무경찰 상태”라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반면 “일본인에게서도 레볼루션이 분출된 사건” 혹은 “입헌 민주주의의 기초를 확립한 계기”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했다. “민중이 (일본)정치사상 처음으로 세력을 이뤄 활동하고 그러한 경향이 유행을 이루게 된 계기”(20세기 초 일본의 의회민주주의 주창자이던 요시노 사쿠조 도쿄대 교수)라는 평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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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의 실상은 그리 민주적이라거나 민중 지향적인 것이 아니었다. 히비야 방화 사건을 이끈 이들은 강경 대외정책을 주장한 인물들로, 영토확장을 포함한 제국주의적 정서를 기저에 깔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의 첫 대중운동은 폭력과 함께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