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정부 말 믿었다가 제대로 뒤통수 맞은 일본 국민들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05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출발한 성난 시위대 중 일부가 고쿠민(國民)신문사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관, 신문사 직원들과 뒤얽힌 난투 끝에 윤전기 2대를 파괴했다.일본의 유력 신문 중 유일하게 포츠머스 강화 회의의 결과에 대해 찬성 견해를 밝힌 이 신문에 대중의 분노가 집중됐다. 당시 일본은 비록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서구 열강과의 종전 협상에선 과거 청일전쟁 때와 같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획득이라는 결실을 얻지 못했다. 총동원병 수 108만8996명, 전사자 8만7360명, 부상자 38만1313명의 총력전을 벌인 것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였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되던 당시, 일본 대중의 기대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간 격차는 매우 컸다.이런 상황에서 고쿠민신문은 “배상금을 받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배상금 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며 “한국의 보호권을 취득하고, 뤼순과 다롄 등의 조차권을 획득한 것은 성과”라고 주장했다.앞서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었다. 1905년 8월 31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교섭이 난항에 봉착한 사실이 일본 신문들에 알려졌고, 다음 날 오사카아사히신문이 “덴노(천황) 폐하께 화의를 파할 것을 명하시길 청원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다른 유력지들도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논설을 게재했다.9월 2일 강화문제동지연합회가 5일 정오부터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정담(政談)연설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추밀원을 방문할 때 요청할 내용도 결정했다. 당시의 양대 정당인 정우회(政友會)와 헌정본당(憲政本黨)에 강화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해달라
-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전쟁은 '돈빨'이죠, 일본이 러시아를 꺾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 [세계를 바꾼 순간들]
‘제국주의’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1897년. 우연히도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그해 1월 러시아가 금본위제를 시행한 데 이어 10월에 일본이 ‘화폐법’을 제정하면서 뒤를 따랐다.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금본위제를 받아들인 것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드는데,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운영 중이던 금본위체제에 들어가는 것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리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특히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가던 일본 재정의 발전상이 주목할 만하다. 1893년 10월 마쓰가타 마사요시 일본 총리는 금본위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 기구로 ‘화폐제도 조사회’를 설치했다. 조사회에는 관계·재계·학계·정계 관계자 20명이 참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을 사사한 소에다 주이치, 통계학자 호소카와 유지로, 재무성 관리 및 미쓰이은행 간부를 지낸 하야카와 센키치로 등이 조사회 멤버였다. 당초 은본위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요코하마정금은행장이던 소노다 고키치가 “장래를 위해선 금본위제를 도입하는 게 좋다”고 주장한 뒤, 격론 끝 표결을 통해 8 대 7로 금본위제 도입이 결정됐다.당시 아시아에서는 천 년 가까이 은화 경제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선 은본위제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일본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금본위제 도입 결정으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청나라가 지급한 배상금을 영국 런던에서 파운드화로 수령했고, 영국 내 은행에 이를 예치했다.일본이 해
-
백제 부흥운동서 패한 유민들 대마도에 방어기지 구축
한반도에서 대마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 등 가야연맹들이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신라 건국 초기부터 대마도 왜인의 침공 잦아대마도는 신라와도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한 초기부터 침입한 왜인들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주로 남풍이 부는 4~5월경에 침입한 이들 가운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많았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출항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마도에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전설과 물건들을 숭배하는 신사(神社)들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8년 왜병들이 대마도에 군대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를 쌓아놓고 침공하려 하자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다.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애증의 한
-
일본 대마국과 해양·무역권 다퉜던 우산국…신라, 우산국 확보 힘입어 북진정책 '성공'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시킬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