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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MBTI보다 더 맹신했던 18세기 '골상학'…"외모가 성격을 결정한다"는 믿음의 최후 [세계를 바꾼 순간들]

    18세기 후반 두개학을 확립한 네덜란드 해부학자 페트루스 캄페르는 원래 화가 출신이었다. 그는 1770년 암스테르담의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교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한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사람의 외모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캄페르는 ‘사람 얼굴의 각도’과 관련한 대단한 ‘발견’을 해냈다. 흑인과 칼무크인(서몽골족), 그리고 유럽 인종의 두개골을 비교·관찰한 결과 두개골 각도의 이른바 ‘중요한 차이’를 찾아낸 것이다. 여러 인종의 두개골 각도를 재고, 이를 다시 유인원의 두개골과 비교한 캄페르는 윗입술부터 정수리까지 각도와 두개골의 좌우 비례를 꼼꼼히 따져 100분위 단위로 두개골 각도를 세분화했다.그는 이어 미학의 창시자 요한 빙켈만이 모범으로 생각한 그리스적인 얼굴을 100점 만점의 이상적인 미(美)로 삼은 뒤, 각 인종이 이상형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따졌다. 그에 따르면 70도 이하였던 흑인은 인간보다 유인원이나 개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반면 유럽인의 두개골은 각도가 97도 이상으로 평가돼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캄페르 이후 인류학자들은 소위 ‘두개골 각도’를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여겨 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빙켈만 등에 의해 미적 기준으로 만들어진 각종 기준은 우수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을 나누는 과학적 징표이자 척도로 활용됐다.사람의 얼굴 생김새에 따라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된다는 생각은 서구 사회에선 16세기부터 어느 정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엔 곱슬머리나 매부리코 등은 개인의 운명이나 질병, 파산, 성격 등을 설명한다고 봤다. 그런데 캄페르 이후 생김새가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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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말 믿었다가 제대로 뒤통수 맞은 일본 국민들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05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출발한 성난 시위대 중 일부가 고쿠민(國民)신문사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관, 신문사 직원들과 뒤얽힌 난투 끝에 윤전기 2대를 파괴했다.일본의 유력 신문 중 유일하게 포츠머스 강화 회의의 결과에 대해 찬성 견해를 밝힌 이 신문에 대중의 분노가 집중됐다. 당시 일본은 비록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서구 열강과의 종전 협상에선 과거 청일전쟁 때와 같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획득이라는 결실을 얻지 못했다. 총동원병 수 108만8996명, 전사자 8만7360명, 부상자 38만1313명의 총력전을 벌인 것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였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되던 당시, 일본 대중의 기대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간 격차는 매우 컸다.이런 상황에서 고쿠민신문은 “배상금을 받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배상금 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며 “한국의 보호권을 취득하고, 뤼순과 다롄 등의 조차권을 획득한 것은 성과”라고 주장했다.앞서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었다. 1905년 8월 31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교섭이 난항에 봉착한 사실이 일본 신문들에 알려졌고, 다음 날 오사카아사히신문이 “덴노(천황) 폐하께 화의를 파할 것을 명하시길 청원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다른 유력지들도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논설을 게재했다.9월 2일 강화문제동지연합회가 5일 정오부터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정담(政談)연설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추밀원을 방문할 때 요청할 내용도 결정했다. 당시의 양대 정당인 정우회(政友會)와 헌정본당(憲政本黨)에 강화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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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돈빨'이죠, 일본이 러시아를 꺾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 [세계를 바꾼 순간들]

    ‘제국주의’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1897년. 우연히도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그해 1월 러시아가 금본위제를 시행한 데 이어 10월에 일본이 ‘화폐법’을 제정하면서 뒤를 따랐다.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금본위제를 받아들인 것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드는데,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운영 중이던 금본위체제에 들어가는 것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리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특히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가던 일본 재정의 발전상이 주목할 만하다. 1893년 10월 마쓰가타 마사요시 일본 총리는 금본위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 기구로 ‘화폐제도 조사회’를 설치했다. 조사회에는 관계·재계·학계·정계 관계자 20명이 참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을 사사한 소에다 주이치, 통계학자 호소카와 유지로, 재무성 관리 및 미쓰이은행 간부를 지낸 하야카와 센키치로 등이 조사회 멤버였다. 당초 은본위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요코하마정금은행장이던 소노다 고키치가 “장래를 위해선 금본위제를 도입하는 게 좋다”고 주장한 뒤, 격론 끝 표결을 통해 8 대 7로 금본위제 도입이 결정됐다.당시 아시아에서는 천 년 가까이 은화 경제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선 은본위제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일본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금본위제 도입 결정으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청나라가 지급한 배상금을 영국 런던에서 파운드화로 수령했고, 영국 내 은행에 이를 예치했다.일본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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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베를린도 제쳤다! 유럽 '최초의 지하철'이 부다페스트에 깔린 이유 [세계를 바꾼 순간들]

    나폴레옹전쟁 이후 전후 질서를 다루던 빈 회의가 막바지로 치닫던 1815년 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영국 귀족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헝가리 쪽으로 뻗은 길을 가리키며 “저기가 유럽이 끝나는 곳입니다. (헝가리는) 동양입니다”라고 말했다.그랬던 ‘변방’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19세기 말 화려한 변신을 이뤘다. 헝가리의 중심 도시 부다페스트는 여러 차례 수정된 도시계획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기획에 따라 설계된 일종의 계획도시다. 수 세기에 걸쳐 헝가리 왕국과 헝가리 공화국의 행정 중심지였던 부다는 13차례 적에게 포위당하고 5번이나 완전히 파괴된 역사를 지녔다.부다페스트의 환골탈태를 상징하는 사건은 1896년에 일어났다. 그해 1월 1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모든 교회의 종은 성대한 잔치의 개막을 알리기 위해 매시간 정각에 일제히 울렸다. 마자르족이 카자흐스탄 대초원에서 카르파티아 분지로 쳐들어와 훗날의 헝가리 땅을 차지한 지 1000년이 됐음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정확히 언제 마자르인이 헝가리로 이주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888년과 900년 사이인 895년을 건국 원년으로 정했다. 하지만 1000주년에 맞춰 진행하던 도시 건설 일정이 늦춰지면서 뒤늦게 공식 개국 연도를 896년으로 바꿨다. 헝가리 국민 시인 페퇴피 샨도르가 유럽 내에서 언어·민족적 특질이 도드라지는 헝가리를 두고 “우리는 외로운 민족”이라고 읊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자르족의 영광을 기리는 분위기가 끓어올랐다.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식을 위해 도시 곳곳이 과시적이면서도 세련된 대형 사업의 건설 현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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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 막으려고 길을 넓혔다고? 나폴레옹 3세의 '빅픽처' 파리 대개조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한 프랑스 제2제정 시대, 프랑스의 외양은 더없이 화려하고 장엄했다. ‘문명의 선두에(a la tête de la civilisation)’라는 슬로건에 따라 파리는 대대적으로 모습을 바꿨다. 조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은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낡고 복잡했던 파리를 통째로 뜯어고쳤다. 화려하게 디자인된 거리와 광장, 정원, 줄지어 늘어선 웅장한 저택 등 오늘날 파리를 상징하는 모습을 일궈냈다.앞서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 1세는 파리를 ‘멋지고 거대하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끝내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대신 파리시는 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진정한 변신을 했다. 1851년 권력을 잡은 루이 나폴레옹은 파리를 ‘프랑스의 심장’이라고 선언하며 “이 위대한 도시를 장식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붓자”고 했다.당시 파리는 소비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했다. 1852년에는 정찰제로 판매하는 백화점인 벨자르디니에르, 프랭탕, 사마리텐 등이 등장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3세는 정부의 위신을 드높이고, 런던과 경쟁하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바리케이드를 건설하기 쉬웠던 도시의 면모를 일신하기를 원했다. 비좁은 파리의 시가는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기 쉬운 구조였다. 나폴레옹 3세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넓게 만들어 바리케이드 설치를 어렵게 하고, 진압 병력은 손쉽고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기를 원했다.나폴레옹 3세의 야심 찬 선언을 실행한 인물은 당시 파리 지사이던 오스망 남작이었다. 그의 계획과 추진력 아래 직선의 넓은 대로가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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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대신 '독일어'가 전세계 공용어였던 시절이 있었던 거 아세요?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산업혁명은 단선적으로 한 차례에 걸쳐 일어나지 않았다. 분야에 따라 시기를 달리하며 비약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어졌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곳은 영국이었지만, 철강·전기·화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2차 산업혁명’은 독일이 주도했다.프로이센이 유럽의 주요 경쟁국보다 빠르게 성장하게 된 것은 1850~186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30년대만 해도 프랑스의 국민총생산(GNP)은 1960년 미국 달러화로 환산할 때 86억 달러로 프로이센(72억 달러)을 앞섰지만 1880년엔 프랑스 174억 달러, 프로이센 200억 달러로 역전됐다.1913년 프로이센의 GNP는 498억 달러로 프랑스(274억 달러)의 2배 가까이 됐다. 유럽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830년에는 프랑스가 21%로 프로이센(5%)의 4배나 됐지만, 1880년이 되면 프로이센은 20%로 프랑스(13%)를 크게 앞섰다. 1913년이 되면 프로이센은 40%로 프랑스(12%)의 4배 수준으로 처지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1860년에 비등하던 에너지 소비량도 1913년엔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3배 수준이 됐다.주요 산업별로 살펴봐도 독일의 성장세가 가팔랐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5만 톤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뿐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 지형도는 급격히 변했다.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독일의 철강 생산량은 1890년대만 하더라도 연간 410만 톤으로 영국(800만 톤)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1900년엔 630만 톤으로 영국(500만 톤)을 추월했다. 1910년대에는 독일(1360만 톤)이 오히려 영국(650만 톤)보다 2배나 많은 철을 생산했다. 1914년 독일의 강철 생산량 1760만 톤은 영국과 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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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 앞에서 붉은 깃발 흔든 썰 풉니다 (feat. 영국)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1859년 말에서 1860년 초 몇 달 사이에 영국에선 ‘천재’로 불리던 엔지니어 3명이 잇달아 사망했다. 증기기관 보급과 철도 건설을 주도한 이점바드 브루넬, 로버트 스티븐슨, 조지프 로크가 그 주인공이었다.특히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스티븐슨의 장례식에는 조문객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영국 사회가 엔지니어의 죽음에 마음 깊이 우러나는 애도를 표한 마지막 이벤트로 평가된다.국가의 부흥기를 주도하던 위대한 기술자들의 잇따른 죽음 이후, 기술자들의 개척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기리는 풍조는 점차 눈에 띄게 약해졌다. 이는 영국이 산업혁명의 고도화 흐름에서 밀려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한다.산업혁명을 주도했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이 쇠퇴한 이유에 대한 질문은 오랜 기간 경제사학계에서 열띤 논쟁이 오간 핵심 주제였다. 영국의 전성기로 평가되는 빅토리아 시대 후기는 사회 모순이 응축된 ‘경제 쇠퇴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로 특히 주목받았다.이 시대의 문제점을 살펴본 여러 이론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마틴 위너 미국 라이스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영국 문화와 산업 정신의 쇠퇴(English Culture and the Decline of the Industrial Spirit: 1850~1980)>라는 책에서 영국 사회 저변에 깔린 반(反)산업 정서와 문화가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어떻게 가로막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영국 사회의 성장과 부흥을 이끈 것은 산업 자본가였지만, 빅토리아 시기까지 사회의 주도권은 여전히 전통 지배계급이 쥐고 있었다. 신사층(gentry)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지배계급은 토지 귀족의 농업적 가치관을 중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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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전세계는 영국의 시간을 따르기로 했을까요(feat. 철도)[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는 근대의 산물이었다. 당연히 초기에는 사치품 취급을 받았다. 1797년 영국에선 모든 시계에 세금이 부과됐다.당시 영국의 세금을 걷는 관리들이 열심히 일한 덕에 조세 감정인의 신고서는 영국 사회에 시계가 얼마나 보급돼 있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피블스란 조그만 마을의 조세신고에서는 “읍내에는 시계(clock, 괘종시계나 탁상시계)가 15개, 은제 회중시계가 5개 있으며, 금제 회중시계는 없다. 피블스 읍내와 시골, 교구를 통틀어 시계는 105개, 은제 회중시계는 112개, 금제 회중시계는 35개 있다”는 식으로 꼼꼼하게 세금 부과를 위한 기록을 남겼다.14~15세기까지만 해도 개인이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기계식 시계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공공부문에서 활용했다. 이에 따라 1356년 볼로냐의 시청사에 공공 시계를 건립하기 위해 20세 이상 모든 시민에게 18페니의 세금이 부과됐다. 1386년 프랑스 국왕은 리옹 시의회가 공공 시계 건립을 위해 부담금을 징수하는 것을 허락했다.시계가 인간의 삶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고, 배경은 영국이다. 19세기 후반 세계 전역을 지배하던 대영제국은 세계 각지의 영토뿐 아니라 각종 주요 표준까지 지배했다. 자연스럽게 영국이 세계 측량단위의 기점 역할도 병행했다. 1884년 국제위원회는 런던 근교 그리니치를 지나는 선을 세계 경도의 기준점인 ‘0’으로 삼았다. 각국의 지도 제작자들은 자국의 수도를 세계 중심에 놓던 습관을 버리고 경도에 일련번호를 매기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동의해야 했다.영국을 기점으로 하는 지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