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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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아이돌보다 인기 많았던 훈남 총리의 비극적 결말 [세계를 바꾼 순간들]
일본 쇼와(昭和) 시대(1926~1989년) 초기에는 보통선거권의 도입과 함께 이른바 ‘극장형 정치’가 자리 잡아갔다. 대중은 복잡한 정치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전달될 수 있는 흥미 위주의 정치·사회문제에 감정을 이입해 반응했다.이 같은 분위기가 확산한 데엔 일본 언론의 영향이 컸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1931년)의 전개에는 라디오가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의 라디오 방송은 만주사변 1보가 새벽에 들어온 날 오전부터 정규방송(라디오 체조)을 중단한 채 관련 속보를 전했다. 신문도 질세라 맹렬하게 보도에 나섰다. 당시 65만 명이던 라디오 계약자 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월평균 6만 명씩 늘어 1932년 3월에는 105만6000명에 달했다.라디오의 영향을 받은 신문들도 호외를 잇달아 발행했다. ‘호외 전쟁’이 벌어지면서 독자를 점점 더 선동하는 악순환이 빚어졌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군부가 ‘전 국민의 응원’을 받는 데는 신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론 조종에 적극적이던 군부 이상으로 아사히나 마이니치 같은 대형 신문사가 선두에 나서는 등 전 매스컴이 경쟁적으로 여론을 먼저 장악하려고 광분했다.이를 반영하듯 ‘만주국 독립안’ ‘관동군의 맹진격’ ‘국제연맹의 항의’ 등 자극적인 어휘를 사용하며 새로운 국면이 열릴 때마다 신문은 군부의 움직임을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민중은 언론에 선동당했고, 이내 호전적으로 바뀌었다.전쟁은 신문사에 최대 수익을 가져다주는 무기이기도 했다. 전쟁을 부채질해 발행 부수를 늘렸다. 만주사변을 본격적으로 보도한 것은 1931년 10월부터였지만, 이후 약 6개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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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특: 가끔 스스로 브레이크 고장냄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33년 3월 24일 독일 제국의회에서 나치당 주도로 ‘민족과 제국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법률’이 처리됐다. 흔히 ‘수권법(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법률)’이라는 용어로 번역되는 ‘전권위임법(Ermächtigungsgesetz)’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당시 수권법은 찬성 441표, 반대 94표로 가결됐다. 바이마르헌법 제76조에 규정된 참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요건을 아슬아슬하게 충족했다. 실제 표결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81명의 공산당 소속 의원들과 적잖은 수의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구금 상태이거나 위압적인 분위기 탓에 표결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민당 당수 오토 벨스가 반대 연설을 남겼지만, 나치의 폭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수권법은 제국의회를 통과한 지 3주 후인 5월 5일부터 시행됐다. 이 법의 골자는 제국의회의 동의와 대통령의 연서 없이도 행정부가 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행정부에 무제한의 입법권을 부여하며 기존 헌법을 비롯해 의회와 기존 정당을 모두 무력화했다. 제국대통령직도 수상인 히틀러에 의해 허울만 남게 됐다. 1933년 여름까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해산되거나 스스로 문을 닫도록 강요됐다. 노조는 분쇄됐고 작은 이익단체도 금지되거나 나치당의 통제에 들어갔다. 사상 통제도 감행됐다. 스포츠 단체와 연구기관, 직업공동체, 청년 단체, 오케스트라까지 새 나치 국가에 대한 의무가 부여됐다. 사법부는 나치 폭주의 충실한 조수가 됐다.나치당은 “국민의 통일성이 다시 세워졌다”고 선전에 나섰다. “독일이 국가적 강성함을 다시 찾고 1920년대 이래 지체됐던 경제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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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모은 돈으로 아파트 샀다가 폭망한 미국인 ‘존 노리스’의 비극😭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20년대는 미국 경제사에서 풍요로운 번성의 시기로 평가받는다. 당시 미국 공업 생산은 약 90% 증가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향상되면서 자동차와 가전제품 같은 내구 소비재 소비가 늘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는 반면 물가는 안정됐다. 주식시장은 활황을 보여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는 별칭이 붙었다.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 생산 중심지였던 시카고는 경제 활황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었다. 철강, 육류 가공, 기성복 제조, 농산물 거래가 활발했다. 농산물 가공품과 가구, 전화기 관련 장비, 철도 부품, 철강 제품을 시카고는 미국 내 어느 곳보다 많이 생산했다. 당시 시카고 노동자들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요구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의 험한 일을 해낼 체력과 의지만이 중요했다.US스틸, 스위프트, 인터내셔널하베스터를 비롯한 대규모 제조공장이 밀집한 시카고는 미국에서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1919년 당시 시카고에서 일하는 40만 명의 노동자 중 70% 이상이 종업원 수가 100명이 넘는 작업장에서 일했다. 3분의 1가량은 종업원 수 1000명 이상인 ‘대기업’에서 일했다. 하지만 독일, 폴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 리투아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이민 온 백인과 유대인, 흑인 등 여러 인종의 노동자 간 교류와 의사소통은 수월치 않았다.미국이라는 나라는 부유해졌을지 몰라도 사회 하층부의 개별 노동자까지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난 사례는 많지 않았다. 실업의 위기는 상존하는 위협이었고, 가족 구성원의 질병이나 예기치 않은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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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없는 세상, 레닌이 ‘전기화’에 올인한 사정 [세계를 바꾼 순간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권력에다 전 국가의 전기화를 더한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태두 블라디미르 레닌은 위와 같은 말로 전기·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같은 표어가 국가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러시아혁명으로 집권한 소련 공산당은 1920년대까지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국가 경제는 침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1920년 공업 생산량은 제1차 세계대전 전인 1913년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1920년 6월 당시 전체 기관차의 60%가 운행이 불가능했다.1923년 소련의 평균 열차 운행 속도는 시속 10마일(16km) 이하였고, 열차 이용객 수는 1913년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많은 공장이 원자재와 연료 부족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러시아의 주요 탄전은 가동 중단 상태였고, 공장 시설도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대기업의 생산량은 전쟁 전의 18% 수준이었다. 곳곳에 기아와 질병이 만연했고, 혁명의 결과를 되돌리기 위한 백군과 외국 간섭군의 위협도 여전했다.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소련 정부는 1920년 2월 ‘고엘로(ГОЭЛРО)’라는 약칭으로 불린 러시아 전력화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구에서 ‘고엘로 계획(план ГОЭЛРО)’이라는 전력화 사업 계획을 마련했다. 이는 소련의 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5개년 계획이었고, 이후 소련의 계획경제 당국인 고스플란(Госплан)이 추진하는 5개년 계획의 원형이 됐다. 레닌은 “10년 안에 소련을 ‘전기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글레프 크르지쟈놉스키의 지휘하에 200여 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고엘로에 참여했다. 고엘로는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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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러가 4조 마르크? 지폐가 낙엽보다 쓸모없어지면 생기는 일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08년부터 1923년까지 독일 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 총재를 맡았던 루돌프 하펜슈타인을 두고 당대 독일인들은 ‘돈의 총사령관(Geldmarschall)’이라고 불렀다. 후일 붙은 ‘초(超)인플레이션의 아버지(Vater der Hyperinflation)’라는 오명(汚名)이 더 익숙하긴 하지만 말이다.하펜슈타인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유지되던 금본위제에 종언을 고한 인물이기도 했다. 1914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하루 전, 하펜슈타인은 금본위제 탈퇴를 선언했다.독일 국민을 전시체제로 동원하기 위해 독일 중앙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많은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펜슈타인은 중앙은행의 금 태환 의무로부터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금을 보유한 독일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해 그들이 보유한 금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어찌 보면 ‘사기’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여성이 자신의 목걸이와 팔찌, 결혼반지 같은 보석을 내놨다. 남자들은 시계와 훈장, 메달 등을 국가에 헌납했다.어느 순간부터 금반지를 끼고 금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됐다. 국가에 금을 제공하면 ‘증명서’ 용도로 철로 된 장신구를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에 대적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원됐던 ‘(군수용)철을 위해 금을 내준다(Gold gab ich für Eisen hin)’라는 문구가 다시 한번 사용되면서 독일 사회에 위력을 떨쳤다.하펜슈타인 재임 기간 독일의 화폐 시스템도 출렁였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돼 제2 제국이 성립하면서 금본위 통화인 골트마르크가 독일 전역의 공식 통화로 통용됐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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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4명씩 치여 죽던 '말똥 지옥💩' 뉴욕을 구한 구원투수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세기 말 미국 뉴욕 거리는 말똥 천지였다. 곳곳에 높이가 2m에 달하는 말똥 더미가 쌓여 있었다. 말의 분뇨에서 나는 악취와 셀 수 없이 달려드는 파리 떼는 도시의 상징이었다. 1867년 뉴욕에선 일주일에 평균 4명의 보행자가 말에 치여 사망했다. 뉴욕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1870년 보스턴은 인구 25만 명에 말이 5만 마리나 됐다. 시카고에선 매년 말의 사체만 7000마리씩 나왔다.말은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존재였다. 1872년 말들이 집단으로 감기에 걸리면서 미국 동북부 주요 도시는 그야말로 마비 상태였다. 대중교통 역할을 담당하던 마차업체는 운행을 무기한 연기했다. 도시 내 운송을 전담하던 말이 사라지면서 기차역엔 화물이 쌓였고, 도시민의 생활에 필요한 우유와 얼음, 채소, 맥주 등은 동이 났다. 공장들이 멈춰 섰고 소방업무와 쓰레기 처리 같은 도시의 행정 업무도 발이 묶였다. 교통과 물류 유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위상은 수백 년간 절대적이었다.말이 끄는 승합마차(omnibus)는 오늘날 택시나 버스에 비견되는 대도시의 대표적 출퇴근용 교통수단이었다. 승합마차는 1828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 등장했고, 1832년 영국 런던에서도 주요 이동 수단으로 부상했다. 미국에선 1853년 뉴욕에 처음 도입됐다. 사업가 제이컵 샤프는 뉴욕 브로드웨이 주요 도로에서 3100대의 승합마차를 운영했다. 이런 승합마차 서비스는 1840~1850년대 미국 동북부와 중서부 주요 도시로 빠르게 확산했다.교통수단으로서 말의 위상은 너무나 확고해 흔들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동차가 등장하자 말은 순식간에 시장에서 밀려났다. 원하는 때 움직일 수 있고, 사료를 먹지도 않고 배설물도 없는 자동차는 삽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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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보다 더 맹신했던 18세기 '골상학'…"외모가 성격을 결정한다"는 믿음의 최후 [세계를 바꾼 순간들]
18세기 후반 두개학을 확립한 네덜란드 해부학자 페트루스 캄페르는 원래 화가 출신이었다. 그는 1770년 암스테르담의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교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한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사람의 외모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캄페르는 ‘사람 얼굴의 각도’과 관련한 대단한 ‘발견’을 해냈다. 흑인과 칼무크인(서몽골족), 그리고 유럽 인종의 두개골을 비교·관찰한 결과 두개골 각도의 이른바 ‘중요한 차이’를 찾아낸 것이다. 여러 인종의 두개골 각도를 재고, 이를 다시 유인원의 두개골과 비교한 캄페르는 윗입술부터 정수리까지 각도와 두개골의 좌우 비례를 꼼꼼히 따져 100분위 단위로 두개골 각도를 세분화했다.그는 이어 미학의 창시자 요한 빙켈만이 모범으로 생각한 그리스적인 얼굴을 100점 만점의 이상적인 미(美)로 삼은 뒤, 각 인종이 이상형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따졌다. 그에 따르면 70도 이하였던 흑인은 인간보다 유인원이나 개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반면 유럽인의 두개골은 각도가 97도 이상으로 평가돼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캄페르 이후 인류학자들은 소위 ‘두개골 각도’를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여겨 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빙켈만 등에 의해 미적 기준으로 만들어진 각종 기준은 우수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을 나누는 과학적 징표이자 척도로 활용됐다.사람의 얼굴 생김새에 따라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된다는 생각은 서구 사회에선 16세기부터 어느 정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엔 곱슬머리나 매부리코 등은 개인의 운명이나 질병, 파산, 성격 등을 설명한다고 봤다. 그런데 캄페르 이후 생김새가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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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말 믿었다가 제대로 뒤통수 맞은 일본 국민들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05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출발한 성난 시위대 중 일부가 고쿠민(國民)신문사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관, 신문사 직원들과 뒤얽힌 난투 끝에 윤전기 2대를 파괴했다.일본의 유력 신문 중 유일하게 포츠머스 강화 회의의 결과에 대해 찬성 견해를 밝힌 이 신문에 대중의 분노가 집중됐다. 당시 일본은 비록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서구 열강과의 종전 협상에선 과거 청일전쟁 때와 같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획득이라는 결실을 얻지 못했다. 총동원병 수 108만8996명, 전사자 8만7360명, 부상자 38만1313명의 총력전을 벌인 것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였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되던 당시, 일본 대중의 기대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간 격차는 매우 컸다.이런 상황에서 고쿠민신문은 “배상금을 받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배상금 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며 “한국의 보호권을 취득하고, 뤼순과 다롄 등의 조차권을 획득한 것은 성과”라고 주장했다.앞서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었다. 1905년 8월 31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교섭이 난항에 봉착한 사실이 일본 신문들에 알려졌고, 다음 날 오사카아사히신문이 “덴노(천황) 폐하께 화의를 파할 것을 명하시길 청원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다른 유력지들도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논설을 게재했다.9월 2일 강화문제동지연합회가 5일 정오부터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정담(政談)연설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추밀원을 방문할 때 요청할 내용도 결정했다. 당시의 양대 정당인 정우회(政友會)와 헌정본당(憲政本黨)에 강화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