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미국, 경제호황·증시활황
공업생산 증가에 소비자 구매력 확대
끝없는 성장 '광란의 20년대'로 불려
주기적으로 닥친 실업의 고통
불경기와 실업은 주기적 현상
가족·공동체 의존해 한숨 돌려
차원 다른 충격파 '대공황'
광범위한 실직과 저임금의 습격
사회보장 네트워크 완전 파괴
공업생산 증가에 소비자 구매력 확대
끝없는 성장 '광란의 20년대'로 불려
주기적으로 닥친 실업의 고통
불경기와 실업은 주기적 현상
가족·공동체 의존해 한숨 돌려
차원 다른 충격파 '대공황'
광범위한 실직과 저임금의 습격
사회보장 네트워크 완전 파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 생산 중심지였던 시카고는 경제 활황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었다. 철강, 육류 가공, 기성복 제조, 농산물 거래가 활발했다. 농산물 가공품과 가구, 전화기 관련 장비, 철도 부품, 철강 제품을 시카고는 미국 내 어느 곳보다 많이 생산했다. 당시 시카고 노동자들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요구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의 험한 일을 해낼 체력과 의지만이 중요했다.
US스틸, 스위프트, 인터내셔널하베스터를 비롯한 대규모 제조공장이 밀집한 시카고는 미국에서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1919년 당시 시카고에서 일하는 40만 명의 노동자 중 70% 이상이 종업원 수가 100명이 넘는 작업장에서 일했다. 3분의 1가량은 종업원 수 1000명 이상인 ‘대기업’에서 일했다. 하지만 독일, 폴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 리투아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이민 온 백인과 유대인, 흑인 등 여러 인종의 노동자 간 교류와 의사소통은 수월치 않았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부유해졌을지 몰라도 사회 하층부의 개별 노동자까지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난 사례는 많지 않았다. 실업의 위기는 상존하는 위협이었고, 가족 구성원의 질병이나 예기치 않은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불황을 비롯해 주기적으로 불황기가 도래했다. 이 시기 실업은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1929년 글로벌 경제에 충격파를 가한 경제 대공황에 비하면 이전 시기의 고난은 고난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생계에 타격을 가한 범위부터 달랐다. 계획했던 결혼이 늦춰지고 생계를 위해 거리 노점상이라도 해야 했던 정도의 고난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이 닥친 것이다. 대공황기 연구로 명성을 날린 리자베스 코언 미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시카고 지역에선 대공황의 마수를 피한 노동자 가정은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 작업시간과 수당이 줄어드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1927년 시카고 지역 제조업에 종사하던 사람의 절반만이 1933년에도 제조업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일자리를 지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5분이 1 수준으로 대폭 삭감됐다.
1920년대까지는 가장이 실직하더라도 다른 가족 구성원이 일자리를 구해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었다. 가족을 먹여 살릴 ‘대타’를 가족 중에서 구하지 못하면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혹은 인종별 커뮤니티에 잠시 생계를 의탁하는 것도 가능했다. 각 노동자의 출신 지역과 인종에 맞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던 종교기관도 구휼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에 이민 온 인종별로 만든 ‘민족 은행’들도 약소민족에게 일종의 대부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경제 대공황은 이 같은 생존 네트워크를 무력화할 만큼 광범위한 실직과 임금 저하 현상을 동반했다. 그 파괴력이 너무나 대단해 구시대의 상조 네트워크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종교기관은 구휼할 ‘돈’이 없었고, ‘민족 은행’들은 파산했다. 대공황이 지난 뒤에도 옛 구휼 네트워크는 거의 복구되지 못했다.
대공황 탓에 평생 세심하게 마련하던 은퇴 후 생계 계획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당장 가정의 생계가 위협받는 사례가 속출했다. 건설용 제강업체에서 일했던 존 노리스라는 노동자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평생 모은 돈을 1927년 1만7500달러짜리 아파트 두 채를 사는 데 투자했다. 그는 모은 돈을 모두 계약금으로 쓰고, 남은 금액은 향후 10년간 자신과 아내의 수입, 그리고 두 번째 아파트 임대료로 갚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노리스는 점점 더 자주 해고당하기 시작했고, 결국 완전히 직장을 잃었다. 세입자들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그는 결국 300달러를 빚진 채 세상을 떠났다.
1920년대까지는 일부 시혜적인 자본가가 노동자의 숨통을 터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공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더 이상 자비심이 들어설 공간이 없었다. 노동자들은 ‘버림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할 따름이었다. 과거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실직의 공포를 넘어, 삶의 존재 방식과 기반을 흔들어놓는 것이기에 더 충격이 컸다.
이와 함께 가장의 권위를 비롯한 전통적 가족제도도 붕괴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고 있던 가부장적 계서제(계층적 서열을 가진 조직구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수입은 전혀 없거나 생계선 이하로 크게 줄고 구호와 관련한 기존 사회조직은 붕괴했지만, 식비나 보험료·주거비·주택대출 이자 등의 부담은 여전했다. 이 시기 사람들은 ‘다시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회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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