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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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쌀 선물거래의 본고장, 18세기 일본
“오사카에선 ‘초아이마이아키나이(帳合米商)’라고 부르는 장부상 쌀거래권이 통용된다. 거래권을 이용하면 쌀을 실제로 보유하지 않았더라도 마음대로 팔고, 보관할 곳간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20섬에서 시작해 200섬을 거래하고, 1000섬이나 1만 섬 단위로도 손쉽게 사고판다. 매일 수만 명이 거래하고, 시세만 잘 예상하면 눈 깜짝할 새에 떼돈을 번다.”1748년 일본에서 간행된 <미곡매매출세차도식(米穀賣買出世車圖式)>에선 당대의 ‘선진적’인 쌀 거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일반적으로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거품 당시 첫 선물거래가 이뤄졌다고 보지만, 일본에선 1730년 오사카에 개설된 도지마쌀거래소(大阪堂島米市場)에서 세계 최초로 조직적인 선물거래가 이뤄졌다고 평가한다.오사카 도지마쌀거래소에선 1731년 2월 쌀 중개권 441주의 발행을 허가한 것을 시작으로 선물거래를 늘려나갔다. 당시 쌀은 수확량이 해마다 다르고, 작황을 예측하기도 힘들어 가격의 등락 폭이 컸다. 자연스레 쌀 선물거래에 운을 건 사람들은 빠르게 부를 쌓기도, 한순간 모든 것을 날리기도 했다.쌀의 선물거래 중개권은 ‘초아이마이아키나이’라고 불렀다. 초아이마이아키나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말경으로 쌀을 자유자재로 거래하는 데 편리했기 때문이다.도지마쌀거래소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8) 일본에선 쌀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일본에서 쌀은 일찍부터 상품화됐다. 간에이기(寬永期, 1624~1643) 나가사키에서 매각된 쌀은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1660년대까지 수출됐다. 쇄국정책이 완성된 1639년 이후에도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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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아라사'와 '노서아'를 다른 나라로 알았던 중국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아라사(俄羅斯), 노서아(露西亞). 러시아를 표현하던 옛 가차(假借)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기를 처음 만든 중국 청나라에서 아라사와 노서아는 단순히 표기법만 다른 게 아니었다. 적지 않은 기간 중국에선 아라사와 노서아가 다른 나라로 인식됐다. 아라사와 노서아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제 치세 후반부 때다.이처럼 하나의 나라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나라로 인식된 것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떨어진 지역을 지칭한 이유가 크다. 또 한쪽에선 전투, 한쪽에선 사절단이란 상이한 형식으로 러시아를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통역을 맡은 몽골인들의 ‘혀가 짧았던’ 것이었다.17세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접촉과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청나라 기록에 러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러시아 하바로프 원정대가 1653년 잉구타 아찬스크에서 청군과 충돌하면서다. 청나라 측 기록에 “나찰(羅刹·Rus, Ros의 음차어)과 전투했다”고 언급되면서 동양 사료에 러시아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하바로프의 후임으로 스테파노프의 선단이 또다시 아무르강에 등장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선정벌의 ‘나선(羅禪)’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만적들은 누런색의 비단옷을 입고 서양에서 온 것 같다”는 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러시아인에 대한 묘사다.비슷한 시기 제정 러시아는 청나라에 정식 사절을 파견했다. 몽골을 거쳐 들어온 이들 정식 사절의 출신국은 ‘악라사(鄂羅斯)’라고 불렸다. 악라사라는 국명은 ‘Oros’라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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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러시아 국기가 네덜란드 국기를 닮은 이유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1687년 크냐즈(옛 러시아의 제후, 公) 야콥 돌고루키가 외교 임무를 마치고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왔다. 훗날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어린 차르의 이복누이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섭정 통치하던 러시아로 그가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천체관측의가 있었다. 천체관측의는 나이 어린 표트르가 원하던 물건. 하지만 사용법을 모르는 꼬마는 크게 낙담했다. 마침내 그는 이 기계를 다룰 줄 아는 프란츠 티메르만이라는 이름의 젊은 네덜란드인을 찾았다.어린 표트르의 과학 교사이던 이 네덜란드인은 기초 수학부터 지리, 포격술, 요새 건설 등을 가르쳤다. 표트르의 지식 습득 수준은 들쑥날쑥했지만, 그는 ‘실질적인 모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 헛간에서 삼촌 니키타 로마노프 소유였던, 반쯤 썩은 영국식 보트를 티메르만과 함께 발견한 표트르는 네덜란드 목수 카르스텐 브란트의 지도 아래 이를 복원했다. 복원한 배로 야우자강을 운항했고, 결국 보다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는 플레셰에보 호수로 보트를 옮겼다. 그리고 이 장난감 배는 ‘러시아 함대의 조상’이 됐다.보트에서 표트르는 브란트와 함께 항해학을 공부했다. 브란트의 지도 아래서 표트르는 2척의 작은 프리깃함과 3척의 작은 요트를 만들었다. 꼬마 시절부터 그는 국가를 위한 거대한 대양함대를 꿈꿨다. 그의 조국은 단지 백해의 얼음과 안개 탓에 존재를 잊어버린 항구 아르한겔스크라는 단 한 개의 항구만 보유했지만 말이다.나이를 먹고 권력을 손에 쥔 표트르는 함대를 만드는 꿈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목수 브란트와 그의 20명의 동료가 함대를 건설하기 위해 플레셰에보 호숫가에 자리 잡았다. 조선소 주변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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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우편 시스템의 등장, 근대 국가의 시작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역참’으로 불리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고대 페르시아부터 중세 몽골제국까지 널리 사용됐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우편시스템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대국가의 주요 기반 중 하나인 근대 우편시스템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됐다. ‘데 타시스(de Tassis)’라는 라틴어화된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타소 가문이 우편시스템 등장에 큰 역할을 했다.타소 가문 내에서도 1459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역의 코르넬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타소는 이 시스템을 일군 핵심 인물이다. 그는 자기 가문이 베네치아에서 공화국에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기업인 ‘콤파니아 데이 코리에리(Compagnia dei Corrieri)’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란체스코 타소 가문의 다른 분파(산드리 가문)는 로마교황청에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1489년, 프란체스코의 형인 이아네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1세의 우편 서비스 책임자가 됐다. 세기말에는 무상으로 우편 서비스를 시행한 보상으로 이아네토가 오스트리아 케른텐 지역의 광산과 봉토를 받았다.하지만 가문의 사업을 다른 수준으로 높인 것은 프란체스코였다. 광산이 타소 가문의 중요한 수입원이긴 했지만, 타소 가문에게 두드러지는 부를 안긴 것은 우편 서비스였다. 프란체스코는 유럽 대륙 전역의 우편 서비스 조직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프란체스코는 1490년에 우편 마차와 말을 교대하는 최초의 상설 우편 노선을 구축했다. 이 노선에서는 편지가 들어 있는 봉인된 가죽 가방이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다. 우편 마차가 밤에도 운행했기 때문에 이동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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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20대 몸에 60대 얼굴을 한 '태양왕'
오늘날 남아 있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300점이 넘는다고 한다. 아마도 루이 14세 생존 당시 실제 그려진 작품은 700점이 넘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추론이다. 특히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왕이 생존할 당시 정치선전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베르사유궁전과 함께 이때 전파된 왕의 메시지는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 혁명기까지 두고두고 남는 구체제 절대왕정의 이미지로 각인됐다.이에 따라 왕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크고 화려하게 그려졌고, 초상화가 걸리는 위치도 정교하게 계산됐다. 감상자가 언제나 왕을 우러러볼 수 있도록 왕의 눈높이는 언제나 감상자의 시선보다 높게 맞춰졌다. 베르사유에서 복잡한 에티켓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고, 귀족들의 동태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감시한 루이 14세의 삶이 초상화에도 반영된 것이다.루이 14세가 평상복 차림으로 초상화에 등장한 적은 없다. 언제나 로마 전사처럼 갑옷을 입은 모습이거나, 군주의 화려하고 장엄한 복장을 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유명한 작품은 1701년 야생트 리고가 완성한 루이 14세의 초상화다. 초상화 속에서 루이 14세는 안감에 흰 담비 털을 덧댄, 황금빛 백합꽃 무늬가 가득한 푸른색 망토를 걸쳐 입고 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칼과 황금 왕관 등도 태양왕의 절대 권위에 어울리게 화려하기 그지없다.하지만 이 그림은 아주 특이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그림에 묘사된 왕의 모습이 생물학적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림의 상체는 60대 ‘할아버지’의 신체적 특징을 지녔지만, 하체는 20대의 건장한 청년의 다리로 그린 것이다. 한마디로 상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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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소금과 청어로 일어선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17세기 초·중반 세계무역을 주도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물자 교환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학자 판 데르 쿠의 지적처럼, 17~18세기에는 유럽 대륙 물자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중앙 저장소 역할까지 수행했다.네덜란드 성장의 발판은 처음에는 소금, 곧이어서는 청어가 담당했다. 네덜란드가 국제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발트해 교역에서부터다. 원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 발트해 주변 지역에선 필요한 소금을 북독일이나 폴란드의 암염 광산에서 생산한 암염으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사용했다.하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발트해 지역의 소금 교역은 네덜란드인의 주무대가 된다.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 서부 지역과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생산하는 풍부한 바닷소금을 공급하며 부를 쌓았다. 곧이어 프랑스산 와인 등으로 교역 품목을 확대했다. 벌크선을 통한 각종 화물 교역도 점차 늘려나갔다.소금 교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적잖은 위기와 저항도 있었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네덜란드와 대립하면서 스페인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엠바고를 시행했다. 이베리아반도산 소금 무역에서 네덜란드 상인이 축출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한자동맹 상인들은 선박이 부족해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북유럽에서 소금 부족 현상이 심해지고 소금 가격이 급상승하는 부작용만 빚어졌다.이베리아반도에서 소금을 얻기 힘들어지자, 네덜란드는 1621년 이후 포르투갈산 소금 교역 비중을 줄이는 대신 서부 프랑스산 소금으로 대체를 시도했다. 하지만 프랑스산 소금은 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생선 저장용으로 부적합했고,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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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극단적 권력투쟁의 산물 '형제 살해' 전통
1574년 12월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술탄 무라드 3세의 즉위에 앞서 이스탄불 시민들은 선왕의 관이 술탄의 궁전에서 아야소피아에 자리한 무덤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봤다. 행렬 뒷자락에는 5명의 어린 왕자들의 관이 뒤따랐다. 1595년 메흐메드 3세가 즉위할 때는 “19명의 무고한 왕자가 어머니의 품에서 끌려 나와 신의 자비 안으로 들어갔다”고 당대의 역사가 페체비는 담담히 기술하고 있다.오스만제국 관습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새 술탄이 즉위하면 동복, 이복,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술탄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형제 살해’의 전통을 꼽을 수 있다. 이 전통은 왕위 계승권의 경쟁자를 제거해 왕권의 안정을 취하는 제도 중 가장 극단적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왕위 계승 경쟁자를 물리적·제도적으로 모두 죽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오스만제국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왕위 승계가 이뤄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근원적 문제는 하렘 조직이었다. 대부분의 술탄은 하렘의 신분이 낮은 첩들을 총애했고, 여러 첩의 자식들이 술탄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심지어 노예 출신 첩의 자식들이 술탄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흔했다. 노예로부터 후사를 얻는 관행은 무라드 1세 때부터 확립됐는데, 무라드 1세의 후계자인 바예지드 1세의 어머니는 ‘귈치첵(Gülçiçek, 장미)’이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자유민이 아니었다. 연대기 작가 슈쿠룰라는 “바예지드 1세는 에르트구룰, 술레이만 공(아미르), 술탄 메흐메드 1세, 이사, 무사, 무스타파 등 6명의 아들을 뒀는데 이들은 모두 노예 어머니 소생”이라고 전한다. 그의 아들 메흐메드 1세도 후일의 무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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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향락에 빠졌던 명나라 상류층
전통 시대 중국의 경제는 어느 수준까지 발전했을까. 명나라 말·청나라 초 변혁기 인물인 장대(張岱)의 삶을 통해 그 시절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명나라 말 만력(萬曆) 25년(1597년)에 태어나 청나라 초 강희(康熙) 23년(1684년)에 죽은 장대는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수필집인 <도암몽억(陶庵夢憶)>과 역사서 <석궤서(石匱書)>, <석궤서후집(石匱書後集)> 등을 썼다. 그가 쓴 책은 문학성이나 사상의 깊이보다는 당시 상류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에서 손꼽는 명문가의 장손으로 태어난 장대는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처음에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차(茶)였다. 그는 차의 미묘한 맛을 구분했다. “1614년 여름 반죽암을 지나다가 계천의 샘물을 길어 맛을 보았다. 인의 톡 쏘는 쓴맛에 깜짝 놀랐다. 유심히 물 빛깔을 살펴보았는데, 마치 찬 서리가 내린 가을날 순백의 달빛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산을 휘감은 부드러운 안개가 소나무와 바위를 품고 있다가 막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샘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어떨까’ 하고 궁금해져서 실험을 거듭했다. 길어온 샘물을 사흘 동안 그대로 묵히면 돌의 비린내가 없어지며, 차의 향기가 더욱 진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혀를 입천장으로 밀면서 물을 입안에서 좌우로 굴리면 샘물의 오묘한 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차에 대한 취미가 식은 뒤엔 고금(古琴)이라는 현악기에 푹 빠졌다. 1616년 마음이 맞는 젊은 친척과 친구 6명을 모아 이 악기의 연주법을 함께 공부했다. 고금에 대한 관심이 시들자 이번엔 &ls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