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륙보다 대포 개발 뒤쳐졌던 영국
값싼 철 이용해 대량 제작 '올인'
품질 낮아도 가성비로 수출국 성장
대포 한 문 가격은 소 442마리 값
무거운 무게로 전투 효율은 떨어져
전쟁치르며 끊임없이 성능 개선 이뤄
값싼 철 이용해 대량 제작 '올인'
품질 낮아도 가성비로 수출국 성장
대포 한 문 가격은 소 442마리 값
무거운 무게로 전투 효율은 떨어져
전쟁치르며 끊임없이 성능 개선 이뤄
당시 최고의 대포는 독일제로 아우크스부르크의 베크 공장과 뉘른베르크의 자틀러 공장에서 제조한 제품이었다. 독일의 대포 주조업자들은 정확하면서도 바퀴 4개짜리 마차로 옮길 수 있는 ‘가벼운(?)’ 대포를 만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군사기술 분야에서 크게 낙후돼 있던 섬나라 영국은 대륙의 장인들에게 대포 제작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헨리 8세는 플랑드르의 장인이던 한스 포펜루이테르에게 대포 생산을 주문해야 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만든 ‘미친 마거리트(Mad Margaret)’라는 대포는 길이가 5.5m, 구경 54cm에 무게가 무려 15톤에 이르는 대형 대포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1541년 중요한 발전이 이뤄진다. 바로 성직자 윌리엄 레베트가 애시다운포트리스트에서 자체적으로 철제 대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제 대포는 깨지기 쉽고 대단히 무거웠다. 그뿐 아니라 청동 대포보다 정확도도 떨어지고 크게 만들기도 어려웠다, 대신 각 지방의 군소 대장간에서 싼 가격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결국 철제 대포 생산에 주력한 잉글랜드는 이른 시일 내에 철제 대포 수출국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결국 1574년이 되면 너무나 대포가 많이 수출돼서 대포 수출이 금지되기에 이를 지경에 이른다.
그렇지만 잉글랜드가 철제 대포 생산을 본격화하던 1550년대 시점에도 잉글랜드에선 대포의 표준화가 미비한 상태였다. 당시 잉글랜드에선 크기에 따라 16종의 대포가 있었다. 무게 4톤에 34kg짜리 포탄을 발사하는 ‘왕대포(cannon-royal)’부터 무게 136kg에 140g 정도의 조그마한 포탄을 발사하는 ‘라비네트(rabinat)’까지 다양한 대포를 보유했다. 1544년 볼로뉴 포위전에서 영국군은 여전히 11종류의 다양한 대포를 동원했고, 대포마다 저마다 다른 크기의 탄환과 운송 기구가 필요했다.
앞서 유럽 대륙에서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가 1502년 포를 네 가지 기본 유형으로, 카를 5세가 1544년 대포 구경을 일곱 종류로 정리했고,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이를 다시 여섯 종류로 줄여 통일한 데 비하면 여전히 뒤처져 있는 셈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가 틀을 놓은 포의 분류 방식은 1540년경 게오르크 하르트만이 뉘른베르크의 도량형을 사용해 포구 직경에 따라 대포를 표준화하는 구경 시스템을 발명하면서 크게 개선됐다.
사실 유럽 대륙에선 조잡한 철제 대포보다 깨질 확률이 적은 청동 대포가 15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청동 대포라고 깨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1542년 10월 신성로마제국군이 오늘날 헝가리 지역 페스트를 포격할 때 사용한 40개의 대포 중 6개가 폭발했다. 철제 대포는 15세기 중반이 돼서야 부르고뉴 공국을 중심으로 확산해 이탈리아 지역 등으로 퍼졌다. 철제 대포는 유럽 대륙에서도 종교개혁 시기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대중화됐다.
앞서 대략 백년전쟁 말기 크레시 전투쯤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대포는 1347년 칼레 전투에서 그 위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포병은 공성전에서 중요한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1345년 아헨이 중포를 보유한 이래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1400년대까지 경쟁적으로 대포를 확보했다. 스트라스부르는 1475년에 모든 유형의 대포 158문을 보유했고, 1545년에는 대형 대포 32문, 팰코네트 49문, 캐논 162문, 그리고 벽포(wall gun) 1069문으로 늘어났다.
1494년 9월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쓸어버린 백묵전쟁에서 대포가 유럽 전투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확고히 굳혔다. 하지만 대포는 무척 고가의 장비이기도 했다. 1394년 프랑크푸르트를 위해 제작된 대포 한 문 가격은 소 442마리 값에 해당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경쟁적으로 대포에 투자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인스브루크에서 설치한 병기고에서 대량으로 대포를 생산했다. 인스브루크 병기고의 연간 중포 생산량은 1500년 50문에서 1506년 385문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초대형 대포들이 명성을 크게 얻었다. 대포는 점점 커져서 15세기에는 거대한 구포(臼砲, bombarde)를 볼 수 있었다. “독일의 나무 포대 위에 얹어놓은 천둥 치는 관(管)이란 뜻의 돈너뷕젠(Donnerbüchsen)은 나무 포대 위에 얹어놓은 괴물 같은 큰 청동관”으로 이것을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중포를 끌려면 통상 말 세 마리가 필요했고, ‘하프 캐논’은 무게가 4톤에 달해 최대 25마리의 말과 15~20명의 병력이 필요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기적의 대포’로 불리던 거포인 스트라스부르시의 ‘데어 스트라우스(Der Strauß, 타조)’를 스위스 캉통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149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빌려 갔는데, 하마터면 적의 손아귀에 떨어질 정도로 속도가 느렸다고 한다.
당시 포병은 일반적으로 1000m 이하의 짧은 거리에서 교전했다. 발사 속도는 느렸다. 고정된 표적을 향해 고정된 위치에서 발사하는 포위 공격에서는 시간당 8발이 표준으로 간주됐다. 4시간 동안 계속 발사한 후에는 포신이 휘지 않도록 멈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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