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초기부터 상업 억제책 펼쳐
농촌 시장 금지하고 제조업 장인도 숫자 제한
비단 등 섬유산업 몰락, 광업도 폐업 수준
전국 교환과정 통제하려 관영시장 운영했지만
이용 저조…포목·철 등 물품 가격 규제까지
상업 장악 성공에도 국가경제 수준은 뒤처져
농촌 시장 금지하고 제조업 장인도 숫자 제한
비단 등 섬유산업 몰락, 광업도 폐업 수준
전국 교환과정 통제하려 관영시장 운영했지만
이용 저조…포목·철 등 물품 가격 규제까지
상업 장악 성공에도 국가경제 수준은 뒤처져
‘무본억말(務本抑末, 근본에 힘쓰고 말업을 억제함)’이라는 구호 아래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억압했다. 농촌에 장이 서는 것을 금지했고, 그 결과 고려시대에 있었던 농촌 장시도 사라졌다. 제조업 관련자는 극소수였다. 모시와 비단 의류, 신발, 가구, 부엌 기구, 가죽제품, 벽돌, 종이, 자기, 무기, 갑옷 등을 만드는 직업 장인은 한 줌에 불과했다. 제철과 야금 인력도 극소수로 제한됐다.
구체적으로 전국에서 중앙정부에 고용된 장인 숫자는 6600명가량으로 법률로 제한됐다. 중앙에 130개 분야에서 2800명 정도가 배치됐고, 지방에는 27개 분야에 3800명이 할당됐다. 장인들은 중앙에 편중됐고, 주로 지배계층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주로 생산했다.
지방에 등록된 장인 중 3분의 1은 경상도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마을별로 살펴보면 한 마을이나 지역에서 두세 명을 넘지 못했다. 종이 생산으로 유명하던 전라도 전주와 남원은 해당 기술 장인이 각각 23명씩 있었다. 경주, 상주, 안동, 진주 같은 큰 도시에서도 대장장이나 야금장이는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자체 비단 산업은 자리 잡지 못했고, 품질 좋은 비단 제품은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 수입됐다. 면화씨는 1364년(공민왕 13년)경에 한국에 처음 들어왔지만, 1460년대까지 면포는 의류를 만드는 주요 소재가 되지 못했다.
광업도 자진 폐업하다시피 했다. 금·은·납·철·구리·유황 등이 주요 채굴 광물자원이었지만, 주요 활동은 중국에 조공하기 위한 금과 은을 생산하는 데 집중됐다. 이마저도 “조선에선 금·은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조공 부담을 피하려고 했다. 1429년 명나라로부터 금·은의 조공을 면제받은 뒤에도 “중국이 다시 조공을 요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금 채광은 확대되지 않았다. 광업이 확대되면 농업 노동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이 같은 결정이 나온 배경에 있었다. 결국 풍년이 든 해에 5~6일만 광업이 허용됐다. 조선은 일본에 금 수입을 전적으로 의존했다.
1430년(세종 12년) 무렵 전국에는 66개의 철광과 17개의 제련소가 있었지만, 철광석 채광 활동은 농한기에도 규제됐다. 구리 채광은 1423년(세종 5년) 태종조에 시작된 저화(지폐) 유통정책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면서 촉진됐다. 하지만 그레셤의 법칙이 작동하면서 동전이 화폐가치 하락 탓에 유통되지 않았고, 화폐 주조도 1445년(세종 27년) 막을 내렸다.
지폐인 저화도 초기부터 도입 의도와 달리 골칫거리가 됐다. 백성들에게 종이돈은 아무런 사용 가치가 없었으며, 화폐로서 신용도 전혀 얻지 못했다. 1402년(태종 2년) 정월 저화가 처음 보급될 무렵 저화 가격은 1장당 오승포(五升布) 1필 혹은 미(米) 2두로 책정됐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만인 1415년(태종 15년) 6월경이 되면 저화 가격은 1장당 미 2승에 해당할 정도로 폭락했다. 세종조에도 저화 가격 하락은 이어져서 1422년(세종 4년) 12월에 저화 3장으로 겨우 미 1승을 살 수 있을 지경이 됐다. 정부는 저화 유통을 강제하기 위해 오승포로 대표되는 물품화폐 사용을 금지하고 위반자를 중죄에 처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상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도 주요 국정 과제였다. 건국과 함께 조선 정부는 도성인 한양에 관에서 허가를 낸(官許) 상업인 시전(市廛)을 뒀다. 이를 통해 도성 상업과 한양을 거점으로 진행되는 전국의 교환 과정을 통제하고 관리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종로1~3가와 남대문로1가 일대에 시전을 조성해 옛 도읍인 개경의 시전 상인과 부상대고(富商大賈)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대상인인 이들을 매개로 도성과 전국의 상업을 파악해 관장하고자 한 조치였다. 1420년(세종 2년)에는 시전에 입주하지 않고 물가를 조정하는 도성의 공상(工商, 간단한 수공품을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판매하던 상인)들을 판매 물종에 따라 모두 시전에 분산 편입시켰다. 그나마 이런 관영 시장의 이용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도성 내 시장에서 이른바 ‘간활범법자(奸滑犯法者)’를 단속하는 조처도 줄곧 이어졌다. 국초부터 도성 상업 전담 규찰 기구인 ‘경시서(京市署)’를 두기도 했다. 1437년(세종 19년) 2월 의정부는 “쌀을 파는 자가 이익을 취하려고 서로 다투며 사람을 속여서 사는 데는 큰 말과 큰되를 쓰고, 파는 데는 작은 말과 작은되를 쓴다”며 “혹은 모래와 돌을 섞어 팔고서는 곧 숨긴다”고 중점 단속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주요 물품 가격을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경시서를 중심으로 화폐로 쓰이는 포목(布貨)과 가죽(皮)·철·의복처럼 가격의 등락 폭이 크지 않은 품목은 일정한 가격을 매기고, 수입품인 동납(銅鑞)·단목(丹木)·약재 등은 경시서가 호조에 보고해 수시로 가격을 정하도록 했다. ‘가격이 조석으로 변동하는’ 품목인 유채(蓅菜), 어육(魚肉), 세쇄식물(細碎食物) 등은 경시서에서 시가를 매기도록(市准) 했다. 정부가 시전과 도성 상업계의 도량형 사기, 물가 조작, 강제로 물건을 떠넘기는 행위 등에 대해 ‘금란(禁亂)’을 명목으로 단속 위주로 처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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