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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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나라님 탓'이란 생각의 출발점은?
“무제가 즉위한 후 동중서(董仲舒)는 강도(江都)의 국상(國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춘추>에 기재된 자연재해와 특이한 현상 변화를 보고 음양(陰陽)의 도가 바뀌는 원인을 유추했다. 따라서 비가 내리길 청할 때는 모든 양기(陽氣)를 가두고 모든 음기(陰氣)를 방출시켰다. 비가 그치길 청할 때는 그 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을 강도국에도 적용해 실행했는데, 원하는 대로 실행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나쁜 짓을 하면 하늘이 벌을 내린다거나 정치 지도자의 잘못을 두고 하늘이 천재지변으로 경고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통상 사마천의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등장하는 전한 시대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이런 원시적 사고를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구체화한 인물로 평가된다. <사기>에 묘사된 동중서는 자유롭게 비를 내리게도, 그치게도 하는 인물이다. ‘음양의 조화’를 탐구해 비를 부르고, 그치게 하는 ‘도사’와 같은 존재인 것.동중서는 각종 재이(災異)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음양의 변화’를 꼽았다. 그가 판단 근거로 삼은 것은 <춘추(春秋)>였다. <춘추>가 다루는 242년간의 시기에 등장하는 홍수, 가뭄, 일식, 지진, 혜성, 운석, 서리, 폭설, 해충, 한해와 같은 재이(災異)에 대해 동중서는 그 재난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음양설(陰陽說)에 기초해 설명했다. 그는 “봄과 여름의 주도적인 양기나 가을과 겨울의 주도적인 음기는 하늘(天)에 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고 주장하며 자연 세계에 적용되던 음양의 원리를 인간세계에까지 확장했다.때마침 <춘추>가 다루는 세계에선 홍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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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의 탄생, 시작부터 따라다닌 惡의 이미지
“소마(素麻)는 1석 5두(一石五斗)를 빌려 1석 5두를 상환했으며 아직 7두 반(七斗半)이 남아 있다.”2008년 충남 부여 쌍북리 저습지에서 출토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목간에는 백제의 이자 관련 기록들이 담겨 있다. 특히 관(官)이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회수하는 과정에서 연 50%에 달하는 높은 이자율을 적용한 사례가 다수 눈에 띈다. 고려시대에 ‘쌀 15두(斗)에 5두’ 하는 식으로 연 33% 정도의 이자율을 적용했고, 조선시대 환곡(還穀)이 감가상각비 조로 모곡(耗穀) 10%를 더 받은 것에 비하면 상당한 고리(高利)가 아닐 수 없다.외국에서도 고대사회에선 ‘이자’가 ‘고리대금’ 수준이었던 게 흔한 일이었다. 원금을 떼일 위험이 크고, 농업의 한계생산성이 증대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에선 곡물의 연평균 이자율이 33.3%에 달했고, 아시리아(30~50%)와 페르시아(40%)에선 원금의 절반 가까이 이자로 냈다. 다만 실제 이자를 취하는 데는 유연한 면이 있었다. 함무라비법전은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는 1년간 곡물 이자의 수취를 유예할 것을 명시했다.고대 그리스에선 ‘선박 저당 대부(bottomry loans)’가 자주 접할 수 있는 이자의 형태였다. 미리 돈을 빌려줘 배를 빌리거나 화물을 확보하도록 한 뒤, 해상 교역을 마치면 큰 폭의 이윤을 챙기는 행위였다. 배가 침몰하면 한 푼도 챙길 수 없지만, 해상 교역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아테네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의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왕복할 경우 전시에는 이윤이 투자금의 30%, 평시에는 투자금의 22.5%를 ‘이자’로 챙겼다. 위험한 항해의 경우에는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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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권력 뒷받침한 기둥 '국정홍보'
기원전 30년부터 기원전 14년의 기간은 라틴어 문학의 황금기였다.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주요 문학 작품이 이때 쏟아졌다. 수많은 시(詩)가 프린켑스(원수)였던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자양분 삼아 꽃을 피웠다.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였던 가이우스 킬니우스 마이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는 당대의 문인들을 후원하는 로마 권력자의 통로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마이케나스의 이름은 예술과 학문에 대한 후원을 의미하는 ‘메세나(Mecenat)’라는 단어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서구 문학사에서 ‘아우구스투스 문학(Augustan literature)’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라틴어 문학의 황금기로 평가된다. 당대의 유명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엘레지(悲歌) 작가 티불루스, 프로페르티우스와 오비디우스는 모두 아우구스투스 혹은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이미지를 조성하는데 동원됐다.이들 문인은 ‘존엄한 자’라는 뜻을 지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처럼 절대 권력자의 업적과 덕성이 문학 작품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들은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상(像)을 만들어 나갔다. 시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듣기를 원하는 데로 로마의 역사를 읊었다. 시인의 언어는 곧바로 권력자의 언어였다.기원전 19년경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베르길리우스는 대표작 ‘아이네이스’에서 건국의 영웅 아이네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상적인 지도자(프린켑스)의 이미지를 도출했다. 신화 속 인물이었던 아이네이아스와 카이사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사이의 연관성은 지속해서 암시됐다. 베르길리우스는 독자들에게 그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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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은 수지맞는 '사업'?…전쟁의 경제학
영국 대영박물관은 ‘바빌로니아 천문일지(Babylonian Astronomical Diaries)’라고 불리는 쐐기문자로 적힌 일련의 점토판을 소장하고 있다. 1988년부터 2022년까지 미국의 저명한 근동학자 에이브러햄 삭스와 오스트리아의 아시리아 연구가인 헤르만 훙거가 번역한 내용이 공개된 이들 점토판은 흔히 ‘삭스·훙거 컬렉션(Sachs-Hunger Collection)’이라고 불린다.이 점토판에는 매일의 날씨와 천문 현상이 촘촘하게 기록돼 있다. 화성이나 금성 같은 행성과 별들의 움직임은 물론 비, 우박, 돌풍 등의 기상현상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자연현상뿐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점토판 322)과 같은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기록도 체계적으로 남아 있다. 특정 날짜의 상품 가격 등도 담겨 있어 역사 정보로서 가치가 작지 않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점토판 320’이다. 이 점토판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간 운명이 결정된 가우가멜라 전투를 전후한 시기의 정보가 기록됐다.왕의 호칭 변화도 눈에 띈다. 가우가멜라 전투가 있던 날(24번째 날) 아침에 점토판은 다리우스를 가리켜 ‘세계의 왕’이라고 부른다. 곧이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 대패한 내용을 언급하고선 “왕의 부대가 그(다리우스)를 버리고 떠났다”고 묘사한다. 조금 더 뒤에는 “세계의 왕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 들어왔다”라고 담담하게 기록한다. 저명한 고대사학자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이를 두고 “누가 왕이 되었든, 신전의 기록은 그저 계속 이어질 뿐”이라고 평했지만,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정보 속에서 당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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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저항이 '시장'과 '국가' 긴장관계 만들었다
전통 시대 중국에선 상업 활동과 상인, 그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한 조세 수입과 관련해 국가가 상업 발전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과 이에 저항하는 민간의 움직임이 오랫동안 대립했다.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라는 민간 격언의 뿌리는 깊었다. 일찍부터 발달한 상업·시장경제와 이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국가 간에는 긴장 관계가 꾸준히 이어졌다.자본 활동과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중국사 초기 단계부터 등장했지만, 이는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 구조를 유지하고, 농업 중심적 경제를 관철해야 한다는 시각이 중국사의 전 시대를 관통한 주류 사상이기도 했다.한나라 때 상홍양(桑弘羊)이란 인물과 얽힌 이야기는 이러한 국가권력과 민간 상업 간 긴장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다. 기원전 110년 한나라 무제는 낙양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을 발탁해 국가 재정을 맡겼다. 상인 출신답게 상홍양은 상공업과 무역을 중시한 현실적 인물이었다.상홍양의 정책 구상은 그의 저서 <염철론(鹽鐵論)>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재정과 외교, 도덕, 철학 등 다방면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경제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특히 책의 정책 초점은 국가 재정에 맞춰져 있었다.때마침 국가의 자금 수요가 폭증했다. 앞서 기원전 140년 한 무제 즉위 이후 한나라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상류층의 사치품 수요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이민족과 군사적 대립이 늘면서 국가 재정 수요가 급증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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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법전이 뿌린 '신뢰'…상업 발전 싹 틔우다
함무라비 법전은 오랫동안 인류 ‘최초의 법전’으로 불렸지만, 사실 그보다 앞선 시대에 만들어진 법전이 적지 않다. 나중에 발견된 ‘우르남무 법전’이나 ‘에슈눈나 법전’ 등이 함무라비 법전보다 이른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행한 법률이지만 함무라비 법전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고대 바빌로니아의 6대 왕인 함무라비(BC 1792~1750)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재통일한 군주다. 그의 시대에 조성한 건축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쐐기문자 텍스트를 통해 당대의 모습이 상세하고 생생하게 전해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lex talionis)”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가 새로 건설한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여 년 전 우르 왕국이 몰락한 뒤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던 여러 도시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법규범을 도입한 것은 대단히 중요했다.2.35m 높이의 검은색 섬록암에 아카드어로 새긴 함무라비 법전의 작성 연대는 기원전 1772년경까지 올라간다. 1901년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드모르강이 이끄는 탐험대가 발견한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282개 법 조항으로 구성된다. 텍스트 첫 줄에서부터 함무라비는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대하는 ‘정의로운 왕’으로 소개한다.법전에는 경제적 내용이 가득하다. 거짓 증언과 절도, 은닉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고, 노동·재산·상거래·결혼·이혼·상속·입양·농업·급여·임대료에 관한 사법적 문제도 다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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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 숨 쉬는 '스파르타 평등주의'
“만약 스파르타라는 도시가 폐허가 돼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시간이 흐른 뒤 후손들은 이 지역이 과연 펠로폰네소스반도의 5분의 2를 점령하고 지역 맹주로 군림하던 강력한 장소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도시에는 신전이나 웅장한 기념물도 없다. 그저 마을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다. 외관만 비교하면 아테네가 스파르타보다 2배는 강성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당대의 라이벌 스파르타를 두고 ‘검소함의 모범’으로 높게 평가했다. 오늘날에도 스파르타를 가 보면 과거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는 이렇다 할 유적을 찾을 수 없다. 명목상 그리고 실제로 검소한 평등사회를 지향했던 스파르타의 특색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플루타르코스 등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의 전설적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누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사실상 화폐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토지는 추첨으로 균등 분배했다고 전해진다.실제로 스파르타 지배층들은 새로운 부의 창출보다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고, 이 같은 규범을 실천에 옮겼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함께 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보통의 스파르타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개인의 자유, 사적 재산의 소유 등은 극도로 제한됐다. 교육도 좋게 보면 의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강제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이 지향한 목적은 문자 그대로 ‘개·돼지’로 여기던 피정복민 노예인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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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vs 집단지성…경쟁·협력하며 시대 이끌었다
서구 문학의 첫 장을 연 작품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전쟁을 배경으로 영웅 아킬레스의 분노를 다룬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10년 모험담을 다룬 <오디세이아>는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각종 콘텐츠로 재생산되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이 두 작품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호메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시인으로 전해진다. 전설 속에서 키오스섬 출신이라고도 하고, 스미르나·콜로폰·살라미스·로도스·아르고스·아테네 같은 도시도 연고권을 주장하는 이 시인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이름부터 ‘보다’라는 뜻을 지닌 고대 그리스어 ‘호로스’와 부정을 뜻하는 ‘메’가 합쳐져 ‘눈먼 사람’을 뜻하는 호메로스로 불리는 게 심상치 않아 보인다.많은 사람이 궁금해했다.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 정말로 존재한 사람이라면 단 한 명일까, 아니면 여러 시인의 개별 작품을 호메로스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은 것일까.이런 궁금증은 오래전부터 학문적 논란으로 이어졌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어디까지가 예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전통의 산물인지, 어디부터 개인의 창작물인지에 대해서도 학자마다 의견이 갈렸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창작자가 같은 사람인지를 두고서도 서로 다른 견해가 쏟아졌다.19세기 이래 고전학자들은 이런 논쟁점들을 두고 ‘호메로스 문제(Homerische Frage)’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크게 ‘분석론자(analysts)’와 ‘단일론자(unitarians)’라는 2개 진영으로 나뉘었다.분석론은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