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城, 공격-방어 거치며 기술 발전
11세기 이후 목재 대신 석조 건축 확산

중세 역량 총결집된 대성당
佛건축가들이 석조 성당 건축 고도화
독일·스웨덴·지중해까지 기술 전파
英 성당엔 석공·기술자 1600명 참여도
착공부터 완공까지 600여 년이 걸린 고딕양식의 ‘대명사’ 독일 쾰른성당. /위키피디아
착공부터 완공까지 600여 년이 걸린 고딕양식의 ‘대명사’ 독일 쾰른성당. /위키피디아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의 독백으로 도도한 시대의 변화를 전한다. 인쇄술의 등장에 따라 정보 유통이 빨라지면서 성당 벽과 스테인드글라스에 빼곡하게 <성서>의 장면을 담아 문맹인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던 가톨릭교회가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장악하던 ‘대성당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위고의 표현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을 지닌 대성당은 중세의 상징이었다. 1248년 착공에 들어가 600여 년 뒤인 1880년 완공된 독일 쾰른 대성당과 같은 거대한 대형 석조 건물은 중세 유럽의 사회·경제적 역량이 장기간에 걸쳐 총결집된 작품이었다.

중세 봉건영주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건물은 방어시설이었다. 수천 개에 달했을 중세시대 요새는 수없이 파괴됐고 재건됐다. 요새는 공격 무기와 방어 기술 간 끊임없는 경쟁을 의미했다. 성벽은 갈수록 높아졌고, 진입로는 복잡해졌다. 성벽과 탑은 모양이 바뀌고 더욱 견고해졌다. 프랑스 동부 랑그르 요새의 성벽 두께는 6.4m에 달했다.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 사자심왕 리처드가 레장들리에 건설한 샤토 가이야르는 방어시설의 길이가 총 3170m에 달했다.

당시 건축 설계자들은 오늘날 설계 전문가처럼 상세한 도면을 작성했다. 건축 마이스터는 목공품을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나무판과 점토, 슬레이트에 도면을 그렸고, 13세기 이후에는 양피지에 건축 도면을 남겼다. 당시의 양피지 도면 22개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보존돼 있기도 하다.

오늘날 중세를 상징하는 건물은 대부분 돌로 만들었지만, 처음부터 석조가 대세는 아니었다. 서로마제국이 붕괴하면서 석조건축 기술은 그럭저럭 전수됐지만, 위상은 크게 위축됐다. 일반적으로 돌은 주요 건축자재가 되지 못했다. 흔한 재료도 아니었다. 그 대신 목재는 많은 지역에서 풍부했다. 돌을 채석하고 다듬는 것보다 벌목하고 가공하는 일이 훨씬 더 쉬웠다. 목재는 예로부터 친숙한 재료로 방앗간, 다리, 방어시설, 교회, 영주의 저택 등에 널리 사용됐다.

변화는 11세기에 일어났다. 돌이 교회 건축을 시작으로 여러 영역에서 목재보다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스코틀랜드처럼 외딴 지역에서는 15세기가 돼서야 목조 성이 석조 성채에 완전히 자리를 내줬고, 아치와 문, 칸막이, 보, 지붕에서는 여전히 목재를 많이 사용했지만 말이다.

13세기 후반 프랑스 건축가들은 버트레스(건축물을 외부에서 지탱하는 장치)를 능숙하게 활용해 석조건축의 수준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그 결과, 공간도 넓어지고, 건물 내부에 더 많은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창을 만들 수 있었다. 화재 위험도 줄었다. 프랑스 보베 대성당은 성가대석 높이가 48m에 달했다. 현대에 와서 강철을 건축재료로 사용한 이후에야 이를 능가할 수 있었다. 12세기 초 영국 더럼 대성당에서 사용된 새로운 아치 모양 천정 지붕은 노르망디와 피카르디, 일 드 프랑스 지역을 거쳐 1160~1180년 부르고뉴, 1220년 이탈리아 툴루즈까지 퍼졌다. ‘오푸스 프랑키게눔(opus francigenum)’으로 불린 이 기술은 1263년 하이델베르크 인근 빔펜에 도입됐고 쾰른, 밤베르크, 나움베르크 등으로 확산했다. 후일 스웨덴 웁살라와 지중해의 키프로스 성당에도 이 기술이 적용됐다. 기술 중 상당수는 프랑스 건축가와 노동자가 이민하면서 전수됐다.

성당 건축에는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다. 13세기 후반 영국 보마리스 성당 건축에는 400명의 석공과 1200명의 노동자가 투입됐다. 석재는 통상 현지에서 채굴한 것을 사용했지만, 원거리에서 석재를 운반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프랑스 상스 대성당의 경우, 약 48km 떨어진 오세르뿐 아니라 160km 이상 떨어진 에브뢰에서도 석재를 가져왔다.

독일 크산텐의 성 빅토르 성당은 리페 강, 루르강, 라인강을 이용해 석재를 운반했다. 1405년 성 빅토르 대성당은 140굴덴에 드라헨펠스와 안데르나흐에서 채굴한 석재를 구입했다. 이 금액에 수운 통행료 44굴덴, 비크 부두까지 운송료 84굴덴, 부두에서 성당까지 운반하는 데 4.5굴덴, 석재 관련 인력의 여비 31.5굴덴이 추가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석재 관련 비용의 55%가 운송비와 통행료, 관련 인력의 이동비를 충당한 것이다. 강변에 지은 쾰른성당 등은 운송비를 크게 줄일 수 있어 이점이 많았다.

목재에서 석재로 전환되면서 석공의 수도 늘고 기술 수준도 높아졌다. 상당수 전문 건축 인력들은 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하면서 활동했다. 여러 곳을 떠도는 편력 장인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493년 울름의 교회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117명의 장인이 울름으로 왔다. 1175년 롬바르드 석공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우르헤까지 갔고, 1287년 프랑스 석공들은 스웨덴 웁살라까지 이동했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중세의 상징' 고딕성당은 어떻게 탄생했나
장인들의 노동 관습은 강고하게 유지됐다. 중세 프랑스법이 근로 시간을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로 규정했고, 1562년 영국 장인법(Statute of Artificers)에는 매년 9월경부터 이듬해 3월 중순까지 작업 시간을 ‘아침에 해가 떠서 밤이 될 때까지’로 명시했는데, 이는 늦게 시작해서 일찍 끝내고, 휴식 시간을 늘리려는 시도가 반영된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한 이후 노동시장에서 건축 장인들의 임금 인상 목소리가 강해졌지만 ‘사용자’ 측의 견제도 적지 않았다. 임금 지급은 불규칙적이었고, 건축 자금이 고갈돼 공사가 중단되는 경우도 흔했다.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성인의 날’마다 쉴 것을 요구했고, 악천후 탓에 일손이 멈추는 경우도 흔했다. 겨울철에는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는 게 상례였다. 그렇게 유럽 사회는 거대한 돌덩이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