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 구가하던 명나라 후기
모든 집에 신선한 생선과 최고급 고기
콩·밀은 돼지 사료로 취급할 정도
큰돈 번 상인, 정치 권력까지 넘 봐

폭우·가뭄으로 몰락 시작
1544년부터 100년 중 31년 가뭄·14년 홍수
쌀값 1년새 3배 급등…굶어죽는 이 속출
기후재난에 각지서 반란…여진족에 멸망
기근으로 자식을 파는 중국 농민들.  위키피디아 제공
기근으로 자식을 파는 중국 농민들. 위키피디아 제공
명나라 말기 재난 기록인 <재황기사(災荒記事)>를 쓴 유학자 진기덕(陳基德)은 명나라 후기 물가와 관련한 기록을 다수 남겼다. 그는 만력(萬曆) 연간(1573~1619) 풍요의 시기를 “곡물 1두의 가격은 결코 3~4푼을 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는 물가가 낮을 때 모든 사람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먹을 것이 부족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번영의 시기였다. 진기덕도 “사람들은 콩과 밀 따위를 소와 돼지에게나 먹일 것으로 여기고는 내던졌다. 신선한 생선과 최고급 고기가 모든 가정에 충분했다. 모두가 이런 번영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했다”며 풍요로운 시절을 회상했다. 가정 연간 이후 명나라에는 부성(府城) 152개, 주성(州城) 240개, 현성(縣城) 1134개, 선위사성(宣慰司城) 12개, 선무사성(宣撫司城) 11개, 초토안무사성(招討安撫司城) 19개, 장관사성(長官司城) 177개 등 모두 1745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세계에서 도시화도 가장 빠르게 진행됐다. 북경과 남경·소주·항주·개봉 등 대도시는 인구가 100만 명 안팎이었고, 부성과 현성 등 중간 도시 인구도 대략 30만~40만 명에 달했다.

경제적 안정과 꾸준한 성장을 발판 삼아 원래 사회적 신분이 낮았던 상인도 부를 축적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명대 중기 상인 장내의(張來儀)는 ‘고객락(賈客樂, 상인의 즐거움)’이라는 시에서 “인생에서 장사가 제일 즐겁다(人生何如賈客樂)”고 읊었다. 휘주 상인 왕도곤(汪道昆)은 자식 교육과 관련해 “우리 집안은 대대로 평민이었지만 이제 유학을 배워 집안을 빛내려 하니 앞으로 자손들을 교육하되 장사는 시키지 마라”라고 큰소리쳤다. 금력에 의해 정치적 권력까지 넘볼 정도로 상인들의 위세가 높아졌다.

하지만 1588년과 1589년 폭우와 심한 가뭄이 이어지면서 갑자기 식품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진기덕은 “쌀 1석(10두)을 모으면 은 1.6냥을 얻을 수 있다. 쌀값이 치솟아 몇 달 동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난민이 도로를 메웠고 시체가 거리에 흩어져 있었다”며 급속하게 변한 풍경을 그렸다. 당대의 기록을 정리하면 100여 년간 돼지고기 한 근에 동전 7~8문, 소고기 한 근에 4~5문으로 안정됐던 가격이 거위 한 마리에 동전 500여 문, 돼지고기 한 근에 동전 40여 문, 소고기 한 근에 20여 문 식으로 급등했다.

숭정제(崇禎帝) 재위 말기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숭정 13년(1640) 수개월 동안 폭우가 내려 “배를 타는 사람들은 평상과 탁자 사이를 저어 다녔고 물고기와 새우들이 우물과 화덕에서 헤엄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아침에는 저녁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고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가격은 또다시 뛰었다. 쌀값은 1석당 1냥을 넘고 얼마 안 돼 2냥을 넘었다. 사람들은 진미인 양 서로 이삭을 두고 다퉜다. 이듬해인 1641년 쌀 1석 가격은 다시 2냥에서 3냥으로 치솟았다. 알을 낳는 암탉과 거위는 이전보다 네다섯 배 더 가치가 있었고,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콩조차도 동전 몇십 개와 교환할 만큼 비싸졌다.

티머시 브룩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명대 대부분 기간 쌀의 가격은 동전 기준 1두당 25~30문이었지만 15세기 기근 시기에 처음 200문으로 뛰었고 1000문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 1540년대에는 동전 200문이 드물지 않게 등장했고, 17세기 초 이후 기근 때는 1000문이 흔한 기근의 기준이 됐다.

이처럼 혼란이 빚어진 원인으로는 중남미 등을 통한 은이 중국으로 대량 유입됐고 스푀러 극소기(태양흑점수가 줄어든 시기) 등 추워진 기후변화가 식량 생산을 급감시키고 물가 급등을 자극했다고 지목된다. 루손섬과 일본 등지에서 화산 폭발이 잇따르면서 태양 복사가 차단되면서 1454년 여름에는 양쯔강 삼각주의 운하가 얼음으로 막힐 정도로 기후가 추워져 ‘소빙하기’가 닥쳤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1544년부터 명나라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한 세기 동안 31년의 심각한 가뭄과 14년의 홍수를 경험했다. 특히 1638~1644년의 7년간 이어진 소위 ‘숭정위기’는 천년 만에 닥친 가장 심각한 7년이었다. 1450년대에서 1640년대 사이 중국은 이전보다 지속해서 더 추웠고 간헐적으로 더 건조했다.

이런 물가 급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전통적 대응은 가격 통제였다. 앞서 1444년 기근 동안 반포된 황제의 칙령은 시장가격보다 낮은 공식 가격을 정하고 상인들이 이 낮춰진 가격에 곡물을 판매하도록 요구한 것이었다. 조치를 어긴 상인에게는 “폭리를 취한다”는 명목으로 강한 처벌이 내려졌다. 대명률(大明律)에는 과도하게 비싼 가격으로 물품을 판 상인에 대한 처벌 강도를 ‘공정 시장 가격’에서 벗어난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산정했다. 최고 정치 지도자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민심을 다독이고자 했다. 만력제는 기근이 이어지자 1594년 총애하던 첩인 황귀비 정 씨에게 5000냥의 은을 기부하도록 했고, 이후 황태후와 복왕(福王)과 심정왕(瀋定王)의 작위를 받은 2명의 왕자, 그리고 만력제 본인이 기부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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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본 처방이 아닌 일시적 대응으로는 위기를 틀어막을 수 없었다. 기후 위기 등에 따른 재난으로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자성의 군대가 자금성을 포위했다. 명이 멸망한 직후 여진족 팔기병의 말굽이 산해관을 넘어 중국 전역의 도시를 골목골목 유린했다. 자연의 변화 앞에 인간의 힘은 아직 미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