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오스만제국서 술탄이 즉위하면
왕위 계승 경쟁자 물리적·제도적으로 제거
"질서위해 형제들 살해 합당"…16세기 정당화
대중의 반감 갈수록 커져 1603년 이후 폐지
왕위 계승 경쟁자 물리적·제도적으로 제거
"질서위해 형제들 살해 합당"…16세기 정당화
대중의 반감 갈수록 커져 1603년 이후 폐지
오스만제국 관습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새 술탄이 즉위하면 동복, 이복, 노소를 가릴 것 없이 술탄의 형제들을 몰살하는 ‘형제 살해’의 전통을 꼽을 수 있다. 이 전통은 왕위 계승권의 경쟁자를 제거해 왕권의 안정을 취하는 제도 중 가장 극단적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왕위 계승 경쟁자를 물리적·제도적으로 모두 죽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스만제국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왕위 승계가 이뤄진 적은 거의 없었다. 근원적 문제는 하렘 조직이었다. 대부분의 술탄은 하렘의 신분이 낮은 첩들을 총애했고, 여러 첩의 자식들이 술탄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
심지어 노예 출신 첩의 자식들이 술탄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흔했다. 노예로부터 후사를 얻는 관행은 무라드 1세 때부터 확립됐는데, 무라드 1세의 후계자인 바예지드 1세의 어머니는 ‘귈치첵(Gülçiçek, 장미)’이라는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자유민이 아니었다. 연대기 작가 슈쿠룰라는 “바예지드 1세는 에르트구룰, 술레이만 공(아미르), 술탄 메흐메드 1세, 이사, 무사, 무스타파 등 6명의 아들을 뒀는데 이들은 모두 노예 어머니 소생”이라고 전한다. 그의 아들 메흐메드 1세도 후일의 무라드 2세와 무스타파, 아흐메드, 유수프, 마흐무드 등 5명의 아들 전부를 여자 노예로부터 얻었다.
이에 따라 ‘정권 안정’을 위해 15~16세기가 되면 새로운 술탄이 등극한 바로 그날 새 술탄의 모든 형제가 교살돼 왕권 경쟁자들을 원천적으로 제거해버렸다. 형제 살해의 전통이 확립된 것은 술레이만 대제 이후부터다.
술레이만 대제의 애첩인 록셀라나의 아들 셀림과 이복형제인 바예지드가 술레이만 대제 생전에 왕위 계승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 대결에서 셀림이 승리했다. 패배한 바예지드는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곧 이란으로 망명했다. 당시 오스만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이란의 타마스브 샤는 바예지드와 그의 네 아들을 놓고 술레이만과 협상했다. 결국 협상에 타결을 본 이란의 샤는 바예지드와 그 네 아들을 죽여서 돌려보냈다. 이와 동시에 어머니와 함께 부르사에 있던 바예지드의 다섯 번째 아들은 술탄의 사형 명령으로 제거된다.
술레이만 대제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걸림돌이 되는 다른 아들과 손자를 모두 직접 처리해 셀림이 명실상부한 오스만제국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낙점한 것이다. 모든 경쟁자의 씨를 말려서 계승 분쟁과 제국 분열의 싹을 없앤 것이다.
바예지드와 그 아들들에 대한 사형은 오스만제국의 왕위 계승 법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술탄의 모든 아들이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지방 태수로 지배했고 모두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예지드 사후부터는 장자만 계승 권한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연장자 계승 원칙은 깨지기 쉬운 규범이었고, 이에 따라 형제 살해의 ‘광풍’은 조건만 맞으면 반복됐다. 형제 살해는 정서적으로 대중적인 승인을 얻지 못했지만 “사형당한 형제나 형제의 인척들은 그들의 정신 속에 사악한 영혼이 거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명분으로 살해가 정당화됐다.
15세기에 메흐메드 2세는 즉위 후 아직 갓난아기인 그의 이복형제를 죽인 후 “그는 아직 성장하지 않은 아이지만 경험 많은 원로들의 조언에 의해 사형이 결정돼 집행됐다. 불신과 잘못된 일의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해지기 전에 그 뿌리를 뽑는 게 옳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16세기에 마련된 ‘메흐메드 2세 법전’은 형제 살해를 법적으로 정당화했다. 법전에는 “앞으로 나의 후손 술탄은 세계질서와 안녕을 위해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 게 합당하다. 대부분의 울람마도 이것이 허용된다고 선언했다”고 담겨 있었다.
셀림 2세와 무라드 3세, 메흐메드 3세의 확고부동한 왕위 계승에도 불구하고 형제 살해는 계속됐고, 1574년 무라드의 즉위 당시, 앞서 언급했듯 이스탄불 시민들은 무라드 아버지의 관이 무덤으로 옮겨지는 행렬에 5명의 어린 왕자들의 관이 뒤따르는 것을 목격했다. 메흐메드 3세도 1595년 즉위하면서 대중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십수 명에 이르는 형제들의 피를 봤다.
형제 살해에 대한 대중의 반감은 커졌고, 결국 형제 살해 전통은 1603년 메흐메드 3세가 죽으면서 끝난다. 물론 도덕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메흐메드 3세의 아들이 정신병을 앓은 데다 예니체리와 궁정 각 세력 간 복잡한 세력 다툼이 겹친 것과 같은 정치적 우연의 산물로 형제 살해의 전통이 마침표를 찍는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권력의 중독성, 후계 구도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하렘 제도라는 구조적 모순, 제국을 온전히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겹치면서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피로 피를 씻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돼서 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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