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경계'로 여겨진 헝가리
1896년 건국 1000주년…민족주의 부상
다리·대로 등 과시적인 대형 건설사업
첨단 교통수단의 도입
부다페스트 가로지르는 지하철 건설
노란색 '프란츠 요제프 노선' 명물로
경쟁적으로 꾸민 수도의 외관
의사당·오페라하우스로 이미지 개선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영화' 사라져
1896년 건국 1000주년…민족주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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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프란츠 요제프 노선' 명물로
경쟁적으로 꾸민 수도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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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변방’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19세기 말 화려한 변신을 이뤘다. 헝가리의 중심 도시 부다페스트는 여러 차례 수정된 도시계획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기획에 따라 설계된 일종의 계획도시다. 수 세기에 걸쳐 헝가리 왕국과 헝가리 공화국의 행정 중심지였던 부다는 13차례 적에게 포위당하고 5번이나 완전히 파괴된 역사를 지녔다.
부다페스트의 환골탈태를 상징하는 사건은 1896년에 일어났다. 그해 1월 1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모든 교회의 종은 성대한 잔치의 개막을 알리기 위해 매시간 정각에 일제히 울렸다. 마자르족이 카자흐스탄 대초원에서 카르파티아 분지로 쳐들어와 훗날의 헝가리 땅을 차지한 지 1000년이 됐음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정확히 언제 마자르인이 헝가리로 이주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888년과 900년 사이인 895년을 건국 원년으로 정했다. 하지만 1000주년에 맞춰 진행하던 도시 건설 일정이 늦춰지면서 뒤늦게 공식 개국 연도를 896년으로 바꿨다. 헝가리 국민 시인 페퇴피 샨도르가 유럽 내에서 언어·민족적 특질이 도드라지는 헝가리를 두고 “우리는 외로운 민족”이라고 읊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자르족의 영광을 기리는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식을 위해 도시 곳곳이 과시적이면서도 세련된 대형 사업의 건설 현장으로 탈바꿈했다. 도나우강에는 건국 100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2개의 다리가 조성되었다. ‘웅장하고 넓은 길’이라는 뜻의 너지쾨루트의 마지막 구간이 완공됐다. 이곳은 도나우강 동쪽 지역인 페스트에 자리 잡은 시내의 중심이 됐다. 도나우강 서쪽의 왕성 역시 대규모의 고전 양식으로 증축됐다.
영국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유럽 대륙 최초의 지하 전철도 축하 행사에 맞춰 개통됐다. ‘프란츠 요제프 노선’으로 불린 이 지하 철로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노란색 객차들이 운행됐다. 이 노선은 도나우강 옆 구도심에서 부다페스트 동쪽 경계까지 연결됐다.
부다페스트 동쪽 가장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시민공원에는 분리파 양식의 응용미술 전시실이 들어섰다. 1888년부터 2년간 구스타프 말러가 음악감독으로 활동한 부다페스트 오페라하우스도 문을 열었다. 비록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보다 200석이 적었지만, 내부는 더 훌륭했고 1869년 드레스덴 가극장에서 일어난 화재의 교훈에 따라 내화 커튼을 갖추는 등 최첨단 장비로 무장했다.
1896년에는 웅장한 대법원 청사도 완공됐다. 세계 최대 입법부 건물 중 하나인 헝가리 국회의사당도 건설 중이었다. 유럽 최대 규모의 증권거래소도 개장했다. 런던과 베를린, 파리와 빈의 증권거래소에 비해 거래량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건물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았다.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카페들은 언론인, 작가, 예술가, 부르주아 무역업자, 산책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다페스트 시민공원에선 1000주년 박람회가 열렸다. 4850㎡ 부지에 들어선 234채의 가설 건물을 이용해 헝가리의 역사 유물과 예술품, 발명품이 1만4000점이나 전시됐다. 1851년 런던 박람회나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압도하는 규모였다. 기념식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시시’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황후 엘리자베트 등 제국의 지도부가 모두 참석했다.
19세기 후반 부다페스트는 베를린과 함께 유럽에서 급속도로 성장한 도시였다. 1896년 건국 1000주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부다페스트가 가장 빠른 성장세를 이어갔다. 1876년 부다와 페스트의 인구는 총 27만6000명이었는데, 1913년에는 거의 4배인 93만3000명으로 늘었다.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가 됐다.
무질서하게 덩치만 커진 것도 아니었다. 1870년에 제정된 언드라시 줄러 총리의 10호법 덕에 도시의 미래를 계획하는 업무를 맡은 공공사업 위원회가 구성됐고, 이 위원회는 19세기 말까지 도시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내놨다. 이에 따라 헝가리 건축기사 레치네르 러요시가 구상한 페스트 중심부의 순환도로와 방사형 대로도 계획적으로 건설됐다.
부다페스트는 탄탄한 생산력을 갖춘 도시이기도 했다. 1896년 부다페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분업 도시였다. 헝가리 제조업의 60%가 부다페스트를 근거지로 삼았다. 부다페스트 북쪽 도나우강의 체펠섬에 조성된 베이시 먼프레의 공장단지에선 5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했다. 여기서 생산된 군수품은 스페인과 멕시코, 영국으로 수출됐다.
또 부다페스트는 도나우강에서 가장 북적이는 항구였다. 1920년대에는 매일 흰색 외륜선을 타고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해 빈으로 향하는 야간 여행이 큰 인기를 끌었다. 1896년 부다페스트와 빈을 오가는 열차의 소요 시간은 4시간 15분이었다. 2022년 현재 편도 기차 운행 시간이 3시간 35분인 점을 고려하면 큰 차이 없는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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