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유럽 도시의 상징, 파리
계획과는 거리 멀었던 자연발생적 공간
12세기부터 도로 등 건설…도시 모습 갖춰

재건축 주역, 오스망 남작
나폴레옹 3세 시절, 계획도시로 탈바꿈
방사형 도로에 하수도망·가스시설 정비

세계로 뻗어나간 도시 계획 모델
유럽 문명의 상징으로 파리 급부상
워싱턴·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 영향
계획적으로 조성된 에투알 개선문 근처 파리 시가의 19세기 당시 모습. /자료: 위키피디아
계획적으로 조성된 에투알 개선문 근처 파리 시가의 19세기 당시 모습. /자료: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한 프랑스 제2제정 시대, 프랑스의 외양은 더없이 화려하고 장엄했다. ‘문명의 선두에(a la tête de la civilisation)’라는 슬로건에 따라 파리는 대대적으로 모습을 바꿨다. 조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은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낡고 복잡했던 파리를 통째로 뜯어고쳤다. 화려하게 디자인된 거리와 광장, 정원, 줄지어 늘어선 웅장한 저택 등 오늘날 파리를 상징하는 모습을 일궈냈다.

앞서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 1세는 파리를 ‘멋지고 거대하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끝내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대신 파리시는 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진정한 변신을 했다. 1851년 권력을 잡은 루이 나폴레옹은 파리를 ‘프랑스의 심장’이라고 선언하며 “이 위대한 도시를 장식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붓자”고 했다.

당시 파리는 소비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했다. 1852년에는 정찰제로 판매하는 백화점인 벨자르디니에르, 프랭탕, 사마리텐 등이 등장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3세는 정부의 위신을 드높이고, 런던과 경쟁하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바리케이드를 건설하기 쉬웠던 도시의 면모를 일신하기를 원했다. 비좁은 파리의 시가는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기 쉬운 구조였다. 나폴레옹 3세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넓게 만들어 바리케이드 설치를 어렵게 하고, 진압 병력은 손쉽고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나폴레옹 3세의 야심 찬 선언을 실행한 인물은 당시 파리 지사이던 오스망 남작이었다. 그의 계획과 추진력 아래 직선의 넓은 대로가 생겨났고, 대로변을 따라 동일한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 공간에는 부르주아들이 임대료를 내고 입주했고, 빈민들은 교외로 밀려났다. 600㎞에 달하는 하수도망과 수도시설, 가스 가로등이 갖춰졌고, 대규모 녹지가 조성됐다. 10만 그루의 나무도 도심 곳곳에 심어졌다. 그 결과 파리는 잘 설계된 공원과 대로를 갖춘 도시로 새롭게 태어났다.

파리는 오랜 역사가 누적된 공간이다. 그만큼 복잡하고,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10세기 말, 카페 왕조의 통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한 파리는 12세기 필리프 2세 시기에 거리를 포장하는 등 중심 도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필리프 2세는 레 알(Les Halles)에 새로운 중앙시장을 개발하고 도시 주위에 튼튼한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13세기에 완성되는 노트르담 성당의 공사도 시작했다.

이후 도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16세기 말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 때 다시 한번 ‘재개발’ 열풍이 몰아쳤다. 앙리 4세는 지저분한 거리를 청소하고 루브르 궁전을 증축했으며, 이탈리아 모델을 적용해 광장 몇 곳을 추가로 만들었다. 도시 기반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귀족들이 도심으로 유입됐고, 관료제가 확장되면서 파리시는 인구가 50만 명까지 늘어났다.

1670년대에 이르러 파리는 구 성벽 너머까지 뻗어나가며 급속도로 팽창됐다. 이에 따라 파리의 통치자들은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루이 14세가 파리 교외 베르사유에 있는 동안 재상 콜베르는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는 대로로 도시를 에워쌌다. 군인병원인 앵발리드와 수많은 개선문, 원형 빅투아르 광장의 공사를 시작했다. 이 시기 파리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들을 희생해가면서 성장하는 ‘피를 빨아먹는 향락과 악덕의 대도시’로 평가받았다. 그런 파리 ‘대개조’의 정점을 찍은 인물이 오스망 남작이었다.

오스망 남작이 대대적으로 탈바꿈시킨 파리의 도시 배치와 설계·건축 아이디어는 후일 오스트리아 빈 등 유럽 주요 도시는 물론, 워싱턴과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아메리카 대륙까지 퍼져나갔다. 하노이 등 아시아 도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려하게 변화된 파리를 향한 세계 각지의 열망은 대단했다. 19세기 말 브라질 사람들은 리우데자네이루를 리빌딩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모델로 신대륙의 도시가 아니라 바로 구대륙의 파리를 선택했다. 파리는 유럽 문명의 최고봉을 상징했다. 도시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모델로 여겨진 것이다. 이에 따라 파리시의 거리는 아베니다 센트럴 주변을 비롯해 리우데자네이루에 복사본 형태로 재건설됐다. 프랑스 빌딩 스타일도 그대로 모방해 리우데자네이루 곳곳에 세워졌다.

이런 화려한 외양과 달리 프랑스 사회는 허울만 그럴 듯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금권정치가 제2제정 시대처럼 화려한 외양을 띠고 판을 친 적은 없었다. 나폴레옹 3세는 ‘증권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을 법한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 각종 금융 스캔들이 매일같이 화제가 됐다. 포르투갈계 유대인인 에밀 페레이르와 이삭 페레이르 형제가 주역이었다. 그들은 1852년 현대식 대형 은행인 크레디모빌리에를 설립했다. 크레디모빌리에는 유럽 최대의 실내 도박장으로 불렸는데, 이는 이 은행이 철도와 호텔, 식민지, 운하, 광산, 극장 등 모든 것에 무분별한 투기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결국 크레디모빌리에는 15년 만에 파산했다.

시위 막으려고 길을 넓혔다고? 나폴레옹 3세의 '빅픽처' 파리 대개조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간상은 취향이 없고, 허세를 부리며, 교양 없이 돈을 탕진하는 인물인 라스타쿠에르(Rastaquouère)였다. 이 시대의 사회생활은 부패하고 냉소적이며 물질주의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활기차고 다채로웠다. 파리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화려한 이미지는 오스망의 도시 개조를 계기로 빠르게 사람들 마음에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