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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필요는 실용성의 어머니

    16세기 초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지옥이라도 정복할 만큼 많은’ 대포를 보유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유럽의 변방이던 당시 잉글랜드에선 제대로 된 대포를 만들 인력도, 기술도 없었다. 잉글랜드에서 자체 제작한 대포는 툭하면 폭발해 터져버렸다.당시 최고의 대포는 독일제로 아우크스부르크의 베크 공장과 뉘른베르크의 자틀러 공장에서 제조한 제품이었다. 독일의 대포 주조업자들은 정확하면서도 바퀴 4개짜리 마차로 옮길 수 있는 ‘가벼운(?)’ 대포를 만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하지만 군사기술 분야에서 크게 낙후돼 있던 섬나라 영국은 대륙의 장인들에게 대포 제작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헨리 8세는 플랑드르의 장인이던 한스 포펜루이테르에게 대포 생산을 주문해야 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만든 ‘미친 마거리트(Mad Margaret)’라는 대포는 길이가 5.5m, 구경 54cm에 무게가 무려 15톤에 이르는 대형 대포로 명성이 자자했다.하지만 잉글랜드에서 1541년 중요한 발전이 이뤄진다. 바로 성직자 윌리엄 레베트가 애시다운포트리스트에서 자체적으로 철제 대포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제 대포는 깨지기 쉽고 대단히 무거웠다. 그뿐 아니라 청동 대포보다 정확도도 떨어지고 크게 만들기도 어려웠다, 대신 각 지방의 군소 대장간에서 싼 가격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결국 철제 대포 생산에 주력한 잉글랜드는 이른 시일 내에 철제 대포 수출국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결국 1574년이 되면 너무나 대포가 많이 수출돼서 대포 수출이 금지되기에 이를 지경에 이른다.그렇지만 잉글랜드가 철제 대포 생산을 본격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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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말보다 못했던 노비의 '몸값'

    동서 사회를 막론하고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조선 시대 노비(奴婢)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초·중기엔 노비가 인구의 약 40% 수준까지 차지했고,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사실상 ‘노예제’가 지속됐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노비제’ 문제는 한국사를 바라보는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실제 조선시대 노비의 처지는 어땠을까. 객관적 지표로 살펴볼 수 있는 게 노비의 몸값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조선시대 노비는 말이나 소보다도 못한 몸값이 매겨졌다. 노비의 몸값은 당대의 법전에 담긴 규정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 매매한(買賣限)조에는 토지와 가사(家舍, 집)의 매매 시 거래를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후 15일로 정했다. 그리고 본문에 주(註)를 달아선 “노비도 이와 같다”고 규정했다.이 규정에 대해 북한 역사학계 1세대 학자인 김석형은 “노비도 매매한 지 15일이 지나면 무르지 못한다는 것이요, 매매 후 백일 내에 관청에 신고해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노비는 토지나 가사와 동일하게 취급됐다”고 해석했다. 이와 함께 노비거래 항목이 소와 말의 매매한(買賣限)과 같은 조목에 들어 있는 것을 근거로 노비의 처지가 소와 말보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그뿐 아니라 고려 말 공양왕 3년(1391)의 상소문을 통해 살펴볼 때 “사람값이 말·소의 값보다 훨씬 못했다”고 지적했다.그에 따르면 그나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노비의 몸값이 조금 오른다. 노비를 토지에 결박하기 위해 노비의 매매를 크게 제한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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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 키우려 상업을 억압한 조선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은 1394년 집필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장인(匠人)과 상인에 대해선 아주 적은 분량밖에 할애하지 않았다. 국가의 기반인 농업이 아닌 ‘부차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인다는 의도로 의식적으로 상업을 도외시한 것이다. 상공업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농업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생겨선 안 된다는 것은 당대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유학 사상이었다.‘무본억말(務本抑末, 근본에 힘쓰고 말업을 억제함)’이라는 구호 아래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억압했다. 농촌에 장이 서는 것을 금지했고, 그 결과 고려시대에 있었던 농촌 장시도 사라졌다. 제조업 관련자는 극소수였다. 모시와 비단 의류, 신발, 가구, 부엌 기구, 가죽제품, 벽돌, 종이, 자기, 무기, 갑옷 등을 만드는 직업 장인은 한 줌에 불과했다. 제철과 야금 인력도 극소수로 제한됐다.구체적으로 전국에서 중앙정부에 고용된 장인 숫자는 6600명가량으로 법률로 제한됐다. 중앙에 130개 분야에서 2800명 정도가 배치됐고, 지방에는 27개 분야에 3800명이 할당됐다. 장인들은 중앙에 편중됐고, 주로 지배계층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주로 생산했다.지방에 등록된 장인 중 3분의 1은 경상도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마을별로 살펴보면 한 마을이나 지역에서 두세 명을 넘지 못했다. 종이 생산으로 유명하던 전라도 전주와 남원은 해당 기술 장인이 각각 23명씩 있었다. 경주, 상주, 안동, 진주 같은 큰 도시에서도 대장장이나 야금장이는 한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자체 비단 산업은 자리 잡지 못했고, 품질 좋은 비단 제품은 왕조가 끝날 때까지 중국에서 수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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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명작은 모두 '선전수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은 오늘날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탄생하던 시기에 이들 작품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회화는 수사학처럼 ‘설득’의 수단이었다. 그저 오늘날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보기 좋으라고, 즐기라고 만든 그림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지닌 실용적 도구인 셈이다. “교회 벽에 그림이 그려진 것은 문맹자들이 책에서 읽지 못하는 것을 벽에서 읽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르네상스 시기에 널리 애용된, 6세기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문구처럼 이 시기 예술 작품은 목적성이 강했다.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던 교황의 의뢰로 제작한 그림들은 교황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그림의 모티프가 된 역사적 사건과 현재의 유사점을 드러내 세속이나, 일반적인 교회 기구에 비해 교황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보티첼리는 <구약성서>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감히 도전한 후 땅이 갈라져 고라와 그의 부하들을 삼켜버리는 장면을 묘사한 ‘고라의 처벌’을 그렸다. 15세기 초의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바젤 공의회를 비난하면서 고라를 언급했다.라파엘로는 볼로냐의 벤티보길리오 가문과 갈등을 겪고 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려 했지만, 천사들에 의해 쫓겨난 헬리오도루스의 이야기를 그렸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기타 지역의 가톨릭교회에 그려진 그림은 개신교가 이의를 제기한 교리적 내용을 해명하기 위해 설명하고자 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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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스부르크가문, '혼테크'로 유럽 최강자 지위에

    1516년경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는 화가인 베른하르트 슈트리겔에게 자신의 첫 번째 부인과 아들, 손주들이 함께 있는 장면을 담은 가족 초상화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막시밀리안이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제작된 이 그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담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기도 하다.하지만 이 작품의 배경은 전적으로 꾸며낸 것이기도 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건강한 중년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실상 그는 관을 준비하고 여행을 떠나야 할 정도로 갖은 병마에 시달리는, 희끗희끗한 수염이 난 노인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부인과 아들(미남공 필리프)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부인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은 죽음을 암시한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세 아이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팔을 껴안고 있는 페르디난트는 스페인에서 자랐고, 한가운데 그려진 겐트의 카를은 저지대 국가에서 성장했다. 카를의 유명한 주걱턱은 상당히 완화된 채 묘사됐다.심지어 금발인 세 번째 아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가 흐르지도 않았다. 야기에우워 가문 출신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는 1515년 이중 약혼에 힘입어 합스부르크가와 인연을 맺었지만, 이듬해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됐다.막시밀리안은 후견인으로서 그를 가족 초상화에 등장시켰다.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러요시가 약관의 나이에 오스만튀르크와 전투에서 사망한 탓에 그의 왕국은 고스란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품으로 떨어졌다.이 같은 수다한 결점과 거짓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일군 최대 업적을 한눈에 보여준다. 바로 혼맥으로 유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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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상징' 고딕성당은 어떻게 탄생했나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의 독백으로 도도한 시대의 변화를 전한다. 인쇄술의 등장에 따라 정보 유통이 빨라지면서 성당 벽과 스테인드글라스에 빼곡하게 <성서>의 장면을 담아 문맹인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던 가톨릭교회가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장악하던 ‘대성당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위고의 표현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을 지닌 대성당은 중세의 상징이었다. 1248년 착공에 들어가 600여 년 뒤인 1880년 완공된 독일 쾰른 대성당과 같은 거대한 대형 석조 건물은 중세 유럽의 사회·경제적 역량이 장기간에 걸쳐 총결집된 작품이었다.중세 봉건영주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건물은 방어시설이었다. 수천 개에 달했을 중세시대 요새는 수없이 파괴됐고 재건됐다. 요새는 공격 무기와 방어 기술 간 끊임없는 경쟁을 의미했다. 성벽은 갈수록 높아졌고, 진입로는 복잡해졌다. 성벽과 탑은 모양이 바뀌고 더욱 견고해졌다. 프랑스 동부 랑그르 요새의 성벽 두께는 6.4m에 달했다.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 사자심왕 리처드가 레장들리에 건설한 샤토 가이야르는 방어시설의 길이가 총 3170m에 달했다.당시 건축 설계자들은 오늘날 설계 전문가처럼 상세한 도면을 작성했다. 건축 마이스터는 목공품을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나무판과 점토, 슬레이트에 도면을 그렸고, 13세기 이후에는 양피지에 건축 도면을 남겼다. 당시의 양피지 도면 22개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보존돼 있기도 하다.오늘날 중세를 상징하는 건물은 대부분 돌로 만들었지만, 처음부터 석조가 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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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살짜리에게 '관직'을 준 고려 음서제

    음서제(蔭敍制)는 고위 관료의 친족을 과거시험 없이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다. 고려는 초기부터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귀족사회의 성립 기반을 닦았다.음서제는 고려 7대 왕인 목종 때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 전 시기를 통해 일반화돼 귀족의 자손은 이 통로를 거쳐 관리에 등용되고 가문의 덕택으로 고관까지 오른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에 음서는 과거와 쌍벽을 이루는 관리 등용의 양대 기둥이었다.이처럼 음서제가 고려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음서제가 큰 저항 없이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에게는 생업을 무사하게 다음 세대로 계승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구현하는 것이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추구하는 국왕의 소임이었고, 주요 관료 등 관리층(官吏層)도 신민(臣民)의 일원으로 그 대상이었다.그러나 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는 관리층을 무조건 대를 이어 계승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관리(官吏)의 소임(所任)을 설정하고, 그들이 쌓은 실적을 공(功)으로 삼아 공헌이 충분히 쌓이면 음(蔭)이 생성되어 후대로 전해지도록 했다. 국왕은 이런 ‘음’을 토대로 직(職)을 수여했다. 관료 등 사회 상층부가 ‘음’을 생성하기 위해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게 하는 장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음서제를 시행하는 데 제약이 적지 않았다. 초기 문음 출신들은 문한(文翰)·학관(學館)직을 맡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전원균이나 김방경 같은 사람들은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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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브 지역 최대 수출품은 '노예'

    9세기 저술가인 바그다드의 이븐 후르다드베는 <도로와 왕국의 책>에서 ‘아르 라다니야’라고 불리는 상인들을 언급했다. ‘안내자’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라단’에서 호칭이 유래했다는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이들 유대인 상인은 “아랍어, 페르시아어, 로마어, 프랑크어, 스페인어, 슬라브어를 사용하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여행한다”고 묘사됐다. 그들은 로마(이탈리아)를 경유해 슬라브족의 땅을 지나, 하자르족의 도시인 함리(이틸)로 가는 길을 이용한다고 전해진다.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다룬 상품. 책에서는 “그들은 서쪽에서 환관, 여성 노예, 어린 소년들, 브로케이드(두껍게 짠 비단), 비버와 흑담비 모피, 그리고 칼을 가져온다”라고 쓰여있다.서유럽과 슬라브족, 아랍 세계의 교역을 중개하던 유대인 상인이 슬라브족에게서 구입한 각종 생필품과 원재료는 상당량이 독일이나 이탈리아로 넘어가 그곳에서 소비됐다. 다만 슬라브 지역 주요 ‘수출품’ 중 북·중 유럽 시장에서 거의 쓰이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노예였다. 북·중유럽에선 농업구조상 노예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슬람 점령 아래 있는 이베리아반도(스페인)와 아프리카 지역에는 슬라브족 노예가 ‘대량’으로 수출됐다. 그곳에서 군인과 가사 노동, 장인 작업장의 조수로 활용한 것이다.이슬람 지배 지역에서는 슬라브인 노예 수가 매우 많았다. 압드 아르-라흐만 3세(912~961)의 통치 기간 코르도바에 있던 슬라브인 노예 수는 약 1만4000명에 달했다. 코르도바에서 10세기 후반~11세기 초에 슬라브 노예 출신은 경비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