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꾼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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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청나라 경제 발목 잡은 '물가상승'
“속담에 이르기를 지주(莊家)들에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쌀 가격이 높아질수록 팔지 않는다고 한다. 더욱 심한 경우, 사들이는 사람은 동전을 제시하지 않고 파는 사람도 반드시 (현물) 미곡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데, 이것을 ‘공렴(空斂)’이라고 한다. 현재의 미가를 기준으로 하여 장래의 가격을 정하는데 마음대로 늘리는 것으로서 이를 ‘매공매공(買空賣空)’이라 한다.”청나라 후기 산서성(山西省) 수양현(壽陽縣) 출신 기준조(祁寯藻, 1793~1866)가 쓴 <마수농언(馬首農言)>이라는 농서에는 오늘날 선물거래(futures trading)라고 할 수 있는 ‘공렴(空斂)’이나 ‘매공매공(買空賣空)’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당시 상업경제가 발달한 청나라에서는 거래의 매개 수단으로서 현물이 아니라 화폐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거래의 양상도 복잡한 형태를 띠었다. 일찍이 명말·청초의 대유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가 “군자는 선물을 직접 건네는 법이 없는데 요즘엔 고관들이 스스럼없이 은을 옷에서 꺼내고, 담소 주제는 그저 돈 이야기뿐”이라고 한탄할 정도로 청나라 초기부터 화폐경제가 빠르게 사회 곳곳으로 침투했던 것이다. 실제로 강희연간(1662~1722) 연평균 41만관(貫)이었던 주전액은 옹정연간(1723~1735) 연평균 70만관, 건륭연간(1736~1795) 연평균 129만관으로 빠르게 증가했다.청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정부 차원에서 ‘통화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입관(入關) 이전부터 ‘한문전(漢文錢)’이나 ‘만문전(滿文錢)’ 등의 동전을 주조한 청나라는 1644년 중국 본토를 지배한 직후인 1645년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순치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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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18세기 곡물가 폭등과 인구변동의 고차함수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인류사가 시작한 이래 1820년에 이르기까지 세계경제는 큰 변화가 없는, 장기간의 정체 상태였다. 이를 당대에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 이는 토머스 맬서스(1766~1834)였다. <인구 관련 원칙에 대한 고찰>(1798)이란 책에서 맬서스는 19세기까지 1인당 총생산과 인구수가 정체됐다는 두 가지 현상이 공존했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맬서스는 농업생산이란 노동과 토지의 조합에서 비롯된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토지는 고정 요소인 까닭에 인구가 증가하면 무조건 1인당 총생산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역의 확대 등으로 ‘일시적’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인구가 ‘일시적’으로 늘어나곤 했다. 생활의 여유가 아이를 더 낳도록 장려하는 효과를 불러왔고, 사망률을 낮추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인구는 끝없이 늘어날 수 없었다. 수시로 1인당 총생산이 생계유지 수준으로 주저앉으면서 결국 사회는 과거 출발점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이른바 ‘맬서스의 덫’이 작동한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정해진 운명의 반복 같았지만,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 18세기는 의미 있는 변신이 일어난 세기였다.무엇보다 ‘맬서스의 덫’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인구가 적잖이 늘었다. 18세기 1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9500만 명에서 1억4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1700년 17~18%에서 1800년에는 20% 내외로 높아졌다.영국을 중심으로 도시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1600~1800년에 영국 인구는 111% 증가했다. 도시 인구 증가율은 600%까지 높아졌다. 그리고 이 같은 도시화 물결은 이 시기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각지로 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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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항해의 역사를 바꾼 경도의 발견
지금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GPS)’ 같은 각종 첨단 과학기술 덕에 항공기와 선박, 차를 탈 때 어렵지 않게 지도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지고, 어디를 둘러봐도 파도만 출렁이는 바다에서 가로·세로로 상상의 선을 긋고선 자신이 있는 곳을 확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개념상으론 ‘적도와 평행선’인 위도와 ‘남극과 북극을 잇는 선’인 경도는 인류사의 초기에 등장했다. 경도와 위도의 개념이 나온 근거는 기원전 2~3세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는 27장의 크고 작은 ‘세계지도’가 포함됐는데, 이 지도 위에 알파벳순으로 지명과 색인을 달고 선을 표시한 뒤 위도와 경도를 병기했다.위도에 대해선 프톨레마이오스 당시부터 이견이나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위도 개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적도가 ‘위도 0도’가 됐다. 기준선뿐 아니라 낮의 길이와 태양의 높낮이, 별자리 등을 통해 측정자가 자리 잡은 곳의 위도를 판단하는 기술도 고대부터 꾸준히 축적됐다.하지만 경도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경도 0도’인 본초자오선은 위도처럼 자연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에 따라 본초자오선의 기준이 그때그때 달라졌다. 아조레스 제도를 비롯해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가 모두 본초자오선의 기준점이 된 전력이 있다. 결국 최종적으론 19세기 대영제국의 힘을 바탕으로 런던(그리니치천문대)으로 ‘경도 0도’가 지나는 지점이 낙착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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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쌀 선물거래의 본고장, 18세기 일본
“오사카에선 ‘초아이마이아키나이(帳合米商)’라고 부르는 장부상 쌀거래권이 통용된다. 거래권을 이용하면 쌀을 실제로 보유하지 않았더라도 마음대로 팔고, 보관할 곳간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20섬에서 시작해 200섬을 거래하고, 1000섬이나 1만 섬 단위로도 손쉽게 사고판다. 매일 수만 명이 거래하고, 시세만 잘 예상하면 눈 깜짝할 새에 떼돈을 번다.”1748년 일본에서 간행된 <미곡매매출세차도식(米穀賣買出世車圖式)>에선 당대의 ‘선진적’인 쌀 거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일반적으로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거품 당시 첫 선물거래가 이뤄졌다고 보지만, 일본에선 1730년 오사카에 개설된 도지마쌀거래소(大阪堂島米市場)에서 세계 최초로 조직적인 선물거래가 이뤄졌다고 평가한다.오사카 도지마쌀거래소에선 1731년 2월 쌀 중개권 441주의 발행을 허가한 것을 시작으로 선물거래를 늘려나갔다. 당시 쌀은 수확량이 해마다 다르고, 작황을 예측하기도 힘들어 가격의 등락 폭이 컸다. 자연스레 쌀 선물거래에 운을 건 사람들은 빠르게 부를 쌓기도, 한순간 모든 것을 날리기도 했다.쌀의 선물거래 중개권은 ‘초아이마이아키나이’라고 불렀다. 초아이마이아키나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말경으로 쌀을 자유자재로 거래하는 데 편리했기 때문이다.도지마쌀거래소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8) 일본에선 쌀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일본에서 쌀은 일찍부터 상품화됐다. 간에이기(寬永期, 1624~1643) 나가사키에서 매각된 쌀은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1660년대까지 수출됐다. 쇄국정책이 완성된 1639년 이후에도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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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아라사'와 '노서아'를 다른 나라로 알았던 중국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아라사(俄羅斯), 노서아(露西亞). 러시아를 표현하던 옛 가차(假借)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기를 처음 만든 중국 청나라에서 아라사와 노서아는 단순히 표기법만 다른 게 아니었다. 적지 않은 기간 중국에선 아라사와 노서아가 다른 나라로 인식됐다. 아라사와 노서아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제 치세 후반부 때다.이처럼 하나의 나라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나라로 인식된 것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떨어진 지역을 지칭한 이유가 크다. 또 한쪽에선 전투, 한쪽에선 사절단이란 상이한 형식으로 러시아를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통역을 맡은 몽골인들의 ‘혀가 짧았던’ 것이었다.17세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접촉과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청나라 기록에 러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러시아 하바로프 원정대가 1653년 잉구타 아찬스크에서 청군과 충돌하면서다. 청나라 측 기록에 “나찰(羅刹·Rus, Ros의 음차어)과 전투했다”고 언급되면서 동양 사료에 러시아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하바로프의 후임으로 스테파노프의 선단이 또다시 아무르강에 등장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선정벌의 ‘나선(羅禪)’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만적들은 누런색의 비단옷을 입고 서양에서 온 것 같다”는 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러시아인에 대한 묘사다.비슷한 시기 제정 러시아는 청나라에 정식 사절을 파견했다. 몽골을 거쳐 들어온 이들 정식 사절의 출신국은 ‘악라사(鄂羅斯)’라고 불렸다. 악라사라는 국명은 ‘Oros’라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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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러시아 국기가 네덜란드 국기를 닮은 이유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1687년 크냐즈(옛 러시아의 제후, 公) 야콥 돌고루키가 외교 임무를 마치고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왔다. 훗날 ‘표트르 대제’로 불리는 어린 차르의 이복누이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섭정 통치하던 러시아로 그가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천체관측의가 있었다. 천체관측의는 나이 어린 표트르가 원하던 물건. 하지만 사용법을 모르는 꼬마는 크게 낙담했다. 마침내 그는 이 기계를 다룰 줄 아는 프란츠 티메르만이라는 이름의 젊은 네덜란드인을 찾았다.어린 표트르의 과학 교사이던 이 네덜란드인은 기초 수학부터 지리, 포격술, 요새 건설 등을 가르쳤다. 표트르의 지식 습득 수준은 들쑥날쑥했지만, 그는 ‘실질적인 모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 헛간에서 삼촌 니키타 로마노프 소유였던, 반쯤 썩은 영국식 보트를 티메르만과 함께 발견한 표트르는 네덜란드 목수 카르스텐 브란트의 지도 아래 이를 복원했다. 복원한 배로 야우자강을 운항했고, 결국 보다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는 플레셰에보 호수로 보트를 옮겼다. 그리고 이 장난감 배는 ‘러시아 함대의 조상’이 됐다.보트에서 표트르는 브란트와 함께 항해학을 공부했다. 브란트의 지도 아래서 표트르는 2척의 작은 프리깃함과 3척의 작은 요트를 만들었다. 꼬마 시절부터 그는 국가를 위한 거대한 대양함대를 꿈꿨다. 그의 조국은 단지 백해의 얼음과 안개 탓에 존재를 잊어버린 항구 아르한겔스크라는 단 한 개의 항구만 보유했지만 말이다.나이를 먹고 권력을 손에 쥔 표트르는 함대를 만드는 꿈을 착착 실행에 옮겼다. 목수 브란트와 그의 20명의 동료가 함대를 건설하기 위해 플레셰에보 호숫가에 자리 잡았다. 조선소 주변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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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우편 시스템의 등장, 근대 국가의 시작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역참’으로 불리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고대 페르시아부터 중세 몽골제국까지 널리 사용됐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우편시스템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대국가의 주요 기반 중 하나인 근대 우편시스템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시작됐다. ‘데 타시스(de Tassis)’라는 라틴어화된 성으로 더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타소 가문이 우편시스템 등장에 큰 역할을 했다.타소 가문 내에서도 1459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역의 코르넬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타소는 이 시스템을 일군 핵심 인물이다. 그는 자기 가문이 베네치아에서 공화국에 우편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기업인 ‘콤파니아 데이 코리에리(Compagnia dei Corrieri)’를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란체스코 타소 가문의 다른 분파(산드리 가문)는 로마교황청에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1489년, 프란체스코의 형인 이아네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1세의 우편 서비스 책임자가 됐다. 세기말에는 무상으로 우편 서비스를 시행한 보상으로 이아네토가 오스트리아 케른텐 지역의 광산과 봉토를 받았다.하지만 가문의 사업을 다른 수준으로 높인 것은 프란체스코였다. 광산이 타소 가문의 중요한 수입원이긴 했지만, 타소 가문에게 두드러지는 부를 안긴 것은 우편 서비스였다. 프란체스코는 유럽 대륙 전역의 우편 서비스 조직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프란체스코는 1490년에 우편 마차와 말을 교대하는 최초의 상설 우편 노선을 구축했다. 이 노선에서는 편지가 들어 있는 봉인된 가죽 가방이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다. 우편 마차가 밤에도 운행했기 때문에 이동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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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몸에 60대 얼굴을 한 '태양왕'
오늘날 남아 있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300점이 넘는다고 한다. 아마도 루이 14세 생존 당시 실제 그려진 작품은 700점이 넘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추론이다. 특히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왕이 생존할 당시 정치선전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베르사유궁전과 함께 이때 전파된 왕의 메시지는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 혁명기까지 두고두고 남는 구체제 절대왕정의 이미지로 각인됐다.이에 따라 왕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크고 화려하게 그려졌고, 초상화가 걸리는 위치도 정교하게 계산됐다. 감상자가 언제나 왕을 우러러볼 수 있도록 왕의 눈높이는 언제나 감상자의 시선보다 높게 맞춰졌다. 베르사유에서 복잡한 에티켓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고, 귀족들의 동태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감시한 루이 14세의 삶이 초상화에도 반영된 것이다.루이 14세가 평상복 차림으로 초상화에 등장한 적은 없다. 언제나 로마 전사처럼 갑옷을 입은 모습이거나, 군주의 화려하고 장엄한 복장을 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유명한 작품은 1701년 야생트 리고가 완성한 루이 14세의 초상화다. 초상화 속에서 루이 14세는 안감에 흰 담비 털을 덧댄, 황금빛 백합꽃 무늬가 가득한 푸른색 망토를 걸쳐 입고 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칼과 황금 왕관 등도 태양왕의 절대 권위에 어울리게 화려하기 그지없다.하지만 이 그림은 아주 특이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그림에 묘사된 왕의 모습이 생물학적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림의 상체는 60대 ‘할아버지’의 신체적 특징을 지녔지만, 하체는 20대의 건장한 청년의 다리로 그린 것이다. 한마디로 상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