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과 은 빠진 금화·은화
로마시대 데나리우스 은화, 교환 기준 역할
대규모 공사와 왕실 사치 위한 수요 폭증해
160년 은 함유량 80% → 260년 2%로 '뚝'
중세는 '위조 화폐'의 시대
봉건 제후 권력 커지며 화폐 남발
잡다한 주화 뒤섞여 유통…화폐가치 급락
금화도 비축량 적어 함량비율 갈수록 줄어
6세기 은화 발행 중단…상업, 암흑시대로
로마시대 데나리우스 은화, 교환 기준 역할
대규모 공사와 왕실 사치 위한 수요 폭증해
160년 은 함유량 80% → 260년 2%로 '뚝'
중세는 '위조 화폐'의 시대
봉건 제후 권력 커지며 화폐 남발
잡다한 주화 뒤섞여 유통…화폐가치 급락
금화도 비축량 적어 함량비율 갈수록 줄어
6세기 은화 발행 중단…상업, 암흑시대로

은화인 데나리우스와 금화인 아우레우스에 포함된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의 비율은 지속해서 줄었다. 주화의 액면가치는 그대로 둔 채 크기와 함량을 줄이는 ‘장난’을 쳐서 동일 양의 금속으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방법은 돈이 필요할 때 세금을 올리는 방식보다 시민들의 저항도 훨씬 적었다.
로마시대에 교환의 기준 역할을 한 것은 무게 3.65g짜리 데나리우스였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데나리우스 은화는 순은 함유량이 90~100%에 가까웠다. 이런 수준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160년경부터는 은 함유량이 80%로 바뀌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는 함유량이 지속적으로 줄었다. 193년 77%이던 은 함유량은 194년 66%, 200년 61%로 하락했고, 마침내 55~58% 수준에 이르렀다.
카라칼라 황제 시대가 되면 은 함유량이 50%만 넘어도 좋은 은화로 여겨졌고, 로마제국은 결국 새로운 은화인 안토니니아누스를 주조했다. 새 주화는 명목상으론 2데나리우스의 가치를 표방했지만, 실제 가치는 기존 데나리우스화의 1.6배에 불과했다. 무게도 데나리우스화보다 줄어 5.18g(2데나리우스는 7.3g)이었다.
하지만 새 주화도 여전히 은 함유량이 감소해 발레리아누스 황제 시대가 되면 은 함유량이 2%(260년)에 불과하게 된다. 이처럼 화폐가치가 꾸준히 하락하면서 해외에선 은 함량이 높은 특정 은화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은화를 시장에 풀지 않고 품 안에 모셨다.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순도가 낮은 불량 화폐뿐이었다.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모습은 중세 시대에도 반복됐다. 로마제국 멸망 후 도시가 활기를 잃고, 교역이 위축되면서 화폐 자체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사례까지 나왔다. 브리튼섬에선 로마군이 물러나고 제국의 다른 지역과도 행정적 접촉이 단절된 후 화폐 사용이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전면 중단됐다. 더는 브리튼섬에 주화가 들어오지 않으면서 로마군이 떠난 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435년경이 되면 주화는 더 이상 교환 수단으로 쓰이지 않게 된다. 유럽 전역을 아우르던 로마제국이 사라진 뒤 화폐 발행과 유통을 강제할 주체가 없어진 탓이었다. 많은 주화가 그저 보석처럼 다뤄지거나 선물이나 보상용으로 사용됐다. 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주화가 다시 화폐로 쓰이게 된다.
지역별 봉건 제후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화폐 주조권은 더욱 분열됐고, 화폐가치는 계속 급락했다. 지방의 봉건영주들이 주조한 잡다한 화폐들이 뒤섞여 유통됐다. 중세 시대가 ‘위조의 시대’였던 만큼 위조화폐도 흔했다.
화폐의 공급뿐 아니라 수요도 위축됐다. 농민들은 자급자족하는 경제생활을 했고, 장원제하에서 농지 사용료는 화폐가 아닌 수확물이나 노동 같은 현물로 지급됐다. 화폐는 영주들이 사치품을 사는 용도 정도로만 살아남았다.
그나마 발행하는 주화의 품질은 점점 더 열악해졌다. 발렌티니아누스부터 아나스타시우스에 이르는 로마 황제들의 모습이 담긴 은화를 모사한 조잡한 복제품이 5세기 말과 6세기 초 갈리아에서 주조됐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이들 은화 표본의 무게는 0.3~0.91g으로 이들 주화가 원형으로 삼은 주화(1.04g~1.25g)에 크게 못 미쳤다.
그나마 유럽 전역에서 4세기 후반 이후 거의 발행되지 않았던 은화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치세에 동유럽에서 마침내 사라졌고, 서유럽에서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은화의 쇠퇴와 소멸은 이 시기 무역의 쇠퇴와 소멸을 뒷받침하는 대표적 논거이기도 하다. 고대 세계의 무역이 마지막으로 종말을 맞이한 것은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옛 로마제국의 서부와 동부 지역 모두에서 은화 발행이 완전히 중단됐다. 저명한 중세 사학자 피터 스퍼퍼드는 이 시기를 두고 “상업 활동의 관점에서 이때가 ‘암흑시대’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시기였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선 금 비축량이 적어 계속 금화를 찍어낼 수도 없었다. 동로마제국에서 보상금 형태로 유입되던 솔리두스 금화의 유입도 곧 중단됐다. 금화는 솔리두스 가치의 3분의 1 수준인 트레미시스 같은 작은 단위로 쪼개졌다. 늦어도 레오비길드(568~586) 통치 기간부터 서고트족은 솔리두스를 전혀 주조하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트리엔테스 발행은 7세기 후반에 끝이 났다. 메로빙거 왕조는 다고베르트 2세 치세(674~679) 기간에 자체적인 금화 주조를 중단했다.
금화 역시 금의 함량이 지속적으로 낮아졌다. 금화는 처음에는 황제의 명의로 발행했든, 자국 왕의 명의로 찍었든 그들이 내놓은 솔리두스는 적어도 처음에는 로마제국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조폐국에서 주조한 것과 같은 품질이었다. 하지만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 같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트리엔테스 유통이 781년 금지될 무렵 이 금화의 순도는 금 함량이 간신히 4분의 1을 차지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770년대 아드리아누스 1세 교황이 조폐국을 인수했을 때, 로마에서 주조된 마지막 비잔티움 주화는 도금된 구리로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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