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본위제에 올라탄 러·일
1897년 전격적으로 금본위제 도입
국제 금융시장서 자금 조달에 유리

금융 선진화 박차 가한 일본
청일전쟁 배상금 英 파운드화 수령
런던에서 군사공채 발행하기도

전비조달 능력이 전쟁 승패 갈라
日, 제이컵 시프 등 유대계 자금 유치
전후엔 전매제 도입·각종 세금 인상
러·일전쟁 당시 전투 상황을 묘사한 일본의 선전용 그림.   위키피디아 제공
러·일전쟁 당시 전투 상황을 묘사한 일본의 선전용 그림. 위키피디아 제공
‘제국주의’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1897년. 우연히도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그해 1월 러시아가 금본위제를 시행한 데 이어 10월에 일본이 ‘화폐법’을 제정하면서 뒤를 따랐다.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금본위제를 받아들인 것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드는데,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운영 중이던 금본위체제에 들어가는 것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리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가던 일본 재정의 발전상이 주목할 만하다. 1893년 10월 마쓰가타 마사요시 일본 총리는 금본위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 기구로 ‘화폐제도 조사회’를 설치했다. 조사회에는 관계·재계·학계·정계 관계자 20명이 참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을 사사한 소에다 주이치, 통계학자 호소카와 유지로, 재무성 관리 및 미쓰이은행 간부를 지낸 하야카와 센키치로 등이 조사회 멤버였다. 당초 은본위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요코하마정금은행장이던 소노다 고키치가 “장래를 위해선 금본위제를 도입하는 게 좋다”고 주장한 뒤, 격론 끝 표결을 통해 8 대 7로 금본위제 도입이 결정됐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천 년 가까이 은화 경제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선 은본위제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일본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금본위제 도입 결정으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청나라가 지급한 배상금을 영국 런던에서 파운드화로 수령했고, 영국 내 은행에 이를 예치했다.

일본이 해외에서 자금을 차입하는 것도 손쉬워졌다. 1897년 일본은행은 홍콩상하이은행과 요코하마정금은행 등의 신디케이트를 통해 런던에서 군사공채 4300만 엔 어치를 발행했다. 1899년에는 9763만 엔이 넘는 국채를 발행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을 바탕으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일본의 국채 발행이 본격화되고, 재정 규모가 본격적으로 확충된 것은 러일전쟁 때부터다. 첫 단추를 끼운 것은 1902년 영·일 동맹이었다. 일본은 당대의 최강국이자, 첨단 금융 선진국이던 영국과 손을 잡으며 대외 정책에서도 공세적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전비 마련 과정에서도 영국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영국 정부가 일본에 보증을 서면서 국채 발행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은 영일동맹을 기반으로 런던시장에서 국채를 팔았고, 러시아는 러·프 동맹을 맺은 관계로 파리에서 국채를 발행했다.

일본은 전쟁 중에 4회, 전쟁이 끝난 후에 2회에 걸쳐 총 1억3000만 파운드 규모의 국채를 발행했다. 1~3회 국채 발행은 영국과 미국 금융시장에서 이뤄졌다. 당시 일본은행 부총재이던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가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며 자금을 끌어모았다.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던 러시아에 반감을 지닌 로스차일드 가문과 제이컵 시프 등 영·미 유대계 자본가들의 협력도 한몫했다.

1~4회 국채 발행에 총 8200만 파운드 어치 일본 국채가 팔렸다. 전후 진행된 5회 국채 발행부터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 시장에서 채권을 동시에 발행했다. 추가로 4800만 파운드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

국채 가격 변동도 드라마틱했다. 1904년 2월 전쟁이 발발하자 양국 국채금리가 출렁였다. 일본국채 금리는 1904년 3~5월경 연 6.5% 근접할 수준으로 올랐다. 당초 일본이 ‘거인’ 러시아에 게임 상대가 못 된다고 평가받은 만큼, 일본 국채가 대량으로 매물로 쏟아져 나왔다. 러시아 국채와 일본 국채 간 금리 스프레드가 2.23%p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전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진행되자 시장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1904년 7월~1905년 1월경엔 일본 국채금리는 연 5~5.5% 수준을 유지했다. 이후 전쟁에서 승기가 굳어지자 연 4.5% 수준을 오르내렸다.

동맹관계 등으로 러시아에 호의적이던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마저 러시아 국채 매입에 주저하면서 러시아의 국채 발행은 점점 어려워졌다. 마침내 발트함대마저 패배하면서 러시아의 전비 조달 작업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게 됐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전쟁을 끝마친 뒤에도 정부는 ‘돈과의 전쟁’을 계속 이어가야 했다. 전쟁 수행을 위한 비상 군사비는 1904년 경상예산의 7배에 해당하는 19억 엔에 이르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했고, 일반 백성은 전비 마련에 쓰인 공채나 외국 차관의 이자를 갚아야 했다. 전쟁 개시 전 5600만 엔이던 공채 잔액도 1907년 22억7000만 엔으로 껑충 뛰었다. 러시아로부터 배상금도 받지 못하게 되자 국고 부담으로 갚아야 할 액수가 국가 예산의 약 30%에 달했다.

국가재정에 가해지는 압박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전쟁 중인 1905년 1월 상속세를 제정해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갔고, 전격적으로 소득세를 인상했다. 담배(1904년)와 소금(1905년)을 전매제도로 운영해 세입 규모를 늘리려 했다. 영업세와 주세, 설탕소비세, 간장세, 등록세, 각종 거래세, 수렵면허세, 광업세, 인지세 등도 이 시기에 신설되거나 인상됐다.

전쟁은 '돈빨'이죠, 일본이 러시아를 꺾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 [세계를 바꾼 순간들]
러일전쟁은 산업혁명 이후 벌어진 최초의 기계화 전쟁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전과는 한 단계 달라진 재정 ‘수입’과 ‘지출’을 경험하며 국가의 ‘수준’과 ‘체급’을 한 단계 키워야 했다. 대규모 군대의 보유와 전쟁 수행 과정은 관료제와 재정 제도를 포함하는 강력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지닌 국가 제도를 전제로 했다. 조세 기구, 경찰, 법원, 상비군, 관료제도, 대의 기구 등은 ‘전쟁의 자식’으로 등장했다. 러일전쟁은 일본 근대국가를 완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