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애완동물 취급했던 中 왕권
당나라, 사방 막힌 방장에 사람들 살게 해
주거·통행의 자유, 생업의 종류까지 통제

남북조시대부터 시작된 '국민 감시제'
5개 집씩 묶어 연좌제 적용, 이웃들 서로 감시
고발과 은닉에 상벌 시행, 공포정치 체계화

상앙 "인민 어리석으면 통치 쉬워"
백성이 유약하고 가난해야 쉽게 다스릴 수 있어
中의 국민 통제, 동양 사회의 특질로 자리 잡아
당나라 여인의 생활상 /자료: 위키피디아
당나라 여인의 생활상 /자료: 위키피디아
‘세계 제국의 수도’라 불린 당나라 장안에 사는 사람들은 사실상 애완동물 취급을 받았다. 중국의 전제 왕권은 두꺼운 벽으로 사방이 막힌 방장(坊墻) 속에 사람들을 밀어 넣은 뒤 주거와 통행의 자유는 물론, 생업의 종류까지 통제했다.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을 지배할 때 말이나 양을 우리에 집어넣듯 사람을 가축 취급한 것이다.

당시 장안성은 거주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면적보다 훨씬 크게 조성되었다. 실제 필요보다 과도하게 큰 장안성은 면적이 비잔티움의 7배, 바그다드의 6.2배에 달했다. 그 결과, 장안 남곽 부근 방 39개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빈방으로 놀렸다. 높고 큰 우리를 108개나 만들어놓고선 장안으로 찾아오는 자들로 차곡차곡 채워나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속 동물처럼 ‘뚜껑 없는 거대한 상자’인 방 속에서 사육된 셈이다.

바둑판형으로 도시를 구획하면서 봉쇄식 방장제를 도입한 장안성은 성곽과 방장을 먼저 만든 후 주민들을 그 속에 들어가 살게 했다. 주민들은 성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2개나 4개의 방문을 통해 주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주민이 방장을 ‘넘어서’ 외출하면 중죄로 취급해 태장 70회가 가해졌다. 밤에 월장하는 경우에도 태장 20회의 중형에 처했다. 새벽과 저녁에 북 치는 소리에 따라 성문과 방문이 개폐됐고, 모든 주민은 황제가 정한 시간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생활했다.

또 방장 속 주민들은 국가가 지정한 일만 해야 했다. 주민들을 분할통치하면서 할당생산제를 추진했다. 각 방장의 문에는 수졸을 배치, 특정 산품을 생산하는 하층민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일정 지역에 주거를 한정시킨 뒤 감독하고 통제했다. 수공업자도 일반인과 격리돼 직능별로 배치된 방에서 거주했다. 장안에선 호적제를 시행하면서 세금을 납부하는 담세호에 대한 정밀한 통계도 작성했다. 장안에선 오직 ‘가축의 자유’만 있었을 뿐이다.

다만 소수의 기간에만 주민의 숨통을 틔워줬다. 정월 15일을 전후한 며칠, 입춘을 보름 정도 지나 봄기운이 태동할 때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당대 시인들은 “정월 15일 밤, 사흘 밤의 야행이 허락됐다. 사관(寺觀)과 가항(街巷)에는 등불이 대낮같이 밝고 사녀 가운데 밤놀이를 나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노래했다.

중국사에서 이러한 감시와 통제는 그 뿌리가 깊다. 방장제도 당나라에 앞서 남북조시대에 북위 효문제와 선무제가 낙양을 다시 건설하면서 주민 관리를 목적으로 거주 구역 주위 300보(약 500m)를 벽(坊)으로 둘러싸면서 시작됐다. 유목민의 가축 관리나 주민 강제 이주 경험이 반영된 조치였다. 북위는 또 485년 인공적인 향리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삼장제를 시행했다. 삼장이란 5가(家)로 구성된 린(隣)의 인장(隣長), 5린(25가)의 이장(里長), 5리(25린·125가)의 당장(黨長)을 가리킨다. 이들 삼장이 호적 작성과 조세 징수를 맡으면서 주민 통제가 강화됐다.

이처럼 인민을 손아귀에 쥐고 통제하며, 특히 ‘5’라는 숫자를 중심으로 감시 체제를 구축한 것 역시 오래된 전통이다. 구체적인 기원은 춘추전국시대까지 올라간다.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 재상이던 상앙(商鞅)은 변법(變法)을 통해 국가에 의한 인민의 통제를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2인 이상의 성인 남성으로 구성된 집안의 경우, 분가를 의무화한 것이다. 혈연으로 묶여 있던 대가족, 씨족제도를 해체하고 5인 가족을 표준으로 하는 단혼(單婚) 가족을 창출했다. 그에 따라 십오제(什伍制)가 만들어졌다.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은 십오제의 도입을 두고 “백성을 십(什)과 오(伍)로 조직해 서로 관리하여 연좌하도록 한다. 잘못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요참형에 처하고, 고발한 자는 적의 수급을 벤 것과 같이 취급하여 상을 내리며, 간악한 자를 숨겨준 자는 적에게 투항한 것과 같이 취급하여 처벌한다”라고 설명했다.

백성들을 5가(家)를 기본 단위(伍)로 묶었고, 연좌(連坐)제를 적용해 이웃 간에 서로 감시하도록 한 것이다. ‘고발’과 ‘연좌’를 통치의 기술로 삼은 것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상앙은 처음으로 그것을 제도화하고 체계화해 엄밀하게 만들었다. 고발과 은닉에 대해 상벌을 시행하며 조성한 공포정치는 사람의 행위뿐 아니라 심리까지 바꿀 수 있었다.

오(伍)는 징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기도 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공통분모로 하던 혈연 씨족사회를 파괴하고 오(伍)를 기본 단위로 국가의 관료조직이 인민을 한 명 한 명 직접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중국 사회 전반에 걸쳐 5인 구성을 기본으로 하는 보병전 체계가 구축되고, 그에 부합하는 형태로 인민을 5가(家)를 기초로 하는 군 편성이 조직이 일반화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상앙에게서 주목되는 것은 그의 ‘우민(愚民)적 인간관’이었다. 백성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중국 사회의 오래된 전통이기도 했다. “백성이 어리석으면 쉽게 다스릴 수 있다”는 <상군서(商君書)>의 도발적 표현은 상앙의 지론이었다. 모든 것을 통일하고 획일화함으로써 국가와 군주가 모든 것을 철저히 장악하면, 백성을 어리석고 유약하게 만들어 통제해 강국을 만들 수 있다는 사고였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감시'와 '처벌'의 공간, 중국 장안성(城)
상앙은 민중이 부유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도 거듭 주장했다. 백성들이 부유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도 했다. 백성을 조금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조금 부유하게 만드는 것보다 통치자에게 유용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중은 고도의 압력과 상호 감시 아래 사적인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둔하면서도 순박한’ 존재여야만 했던 민중. 관리를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신민이야말로 독재자가 가장 동경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중국의 전제 왕권은 국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이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동양 사회의 특질로도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