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침략 지지한 대중 언론
군국주의 일본의 중국 침략에
신문·라디오의 지원이 큰 역할
전쟁 찬성 고무한 매스미디어
특파원 파견, 호외 발행, 강연회로
호전적인 여론 조성에 앞장 서
대중정치인, 이미지 정치 강화
대중의 호감 얻는 데 전력한 정치인
고노에 총리 등 '정치 쇼맨십' 본격화
군국주의 일본의 중국 침략에
신문·라디오의 지원이 큰 역할
전쟁 찬성 고무한 매스미디어
특파원 파견, 호외 발행, 강연회로
호전적인 여론 조성에 앞장 서
대중정치인, 이미지 정치 강화
대중의 호감 얻는 데 전력한 정치인
고노에 총리 등 '정치 쇼맨십' 본격화
이 같은 분위기가 확산한 데엔 일본 언론의 영향이 컸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1931년)의 전개에는 라디오가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의 라디오 방송은 만주사변 1보가 새벽에 들어온 날 오전부터 정규방송(라디오 체조)을 중단한 채 관련 속보를 전했다. 신문도 질세라 맹렬하게 보도에 나섰다. 당시 65만 명이던 라디오 계약자 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월평균 6만 명씩 늘어 1932년 3월에는 105만6000명에 달했다.
라디오의 영향을 받은 신문들도 호외를 잇달아 발행했다. ‘호외 전쟁’이 벌어지면서 독자를 점점 더 선동하는 악순환이 빚어졌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군부가 ‘전 국민의 응원’을 받는 데는 신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론 조종에 적극적이던 군부 이상으로 아사히나 마이니치 같은 대형 신문사가 선두에 나서는 등 전 매스컴이 경쟁적으로 여론을 먼저 장악하려고 광분했다.
이를 반영하듯 ‘만주국 독립안’ ‘관동군의 맹진격’ ‘국제연맹의 항의’ 등 자극적인 어휘를 사용하며 새로운 국면이 열릴 때마다 신문은 군부의 움직임을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민중은 언론에 선동당했고, 이내 호전적으로 바뀌었다.
전쟁은 신문사에 최대 수익을 가져다주는 무기이기도 했다. 전쟁을 부채질해 발행 부수를 늘렸다. 만주사변을 본격적으로 보도한 것은 1931년 10월부터였지만, 이후 약 6개월간 아사히나 마이니치는 임시 경비로 100만 엔이나 사용했다. 당시 일본 총리의 월급이 800엔이던 시절이었다.
신문은 어디에 돈을 썼을까? 아사히신문이 대대적으로 선전한 바에 따르면 (취재) 참가 비행기가 8대, 항공 횟수 189회, 자사 제작 영화 공개 장소 1500곳, 공개 횟수 4024회, 관중 약 1000만 명, 호외 발행 횟수 131회에 달했다. 마이니치신문도 이에 질세라 아사히 이상으로 대선전을 했다. “마이니치 후원, 관동군 주최 만주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아사히신문의 경우 1932년에 ‘동서아사히만주사변신문전’을 개최해 자사의 만주사변 보도를 대대적으로 전시했다. 그해 만주사변 발발 이후 관련 사설 54회를 비롯해 통상 월 50~100회가량 게재되던 해외 송고 기사가 그해 9월에 월 360건, 11월에 525건 게재돼 연말까지 총 3758건이 실렸다. 호외도 1931년 9월 21일부터 1932년 1월 10일까지 131회나 발행됐다. 연일 조·석간 모두 한 페이지 이상이 특파원 기사나 특파원 강연회 등에 할애됐다.
정치인들도 이런 시대의 움직임을 적극 활용했다. 대표적 인물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당시 일본 총리를 들 수 있다. 1937년 집권한 고노에 총리는 중일전쟁 개시, 독일·이탈리아·일본 간 3국 동맹 결성 등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대외 침략에 적잖은 역할을 했다. 그는 매스미디어를 활용해 대중, 특히 젊은 여성과 인텔리층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았다. 젊은 귀족 출신인 고노에가 총리가 된 것이 국민들에게 무엇인가 신선한 느낌을 준 것이다.
그런 인기를 반영하듯 “공전의 인기를 끈 고노에 내각”이라는 말이 돌았다. 당시 고노에 내각에 열광하는 여성 지지자를 칭하던 ‘온나고도모(女子供, 여자아이)’ ‘부인 고도모(婦人子供, 부인 아이)’ 등의 용어는 지금까지 현대 일본어에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여학생들은 메이지진구에 참배하러 온 고노에 총리를 보기 위해 2열로 도열해 맞이하기도 했다. 마치 오늘날 아이돌 스타를 환영하듯…. 고노에 총리가 라디오 방송을 하면 정치에 무관심하던 각 가정의 온나고도모들이 “고노에 씨가 연설한다”라며 소란스럽게 라디오 스위치를 켰다고도 전해진다.
고노에가 인기를 얻은 이유로는 명문가 출신인 데다 총리 즉위 당시 40대이던 고노에 총리의 ‘청년성’과 ‘젊음’이라는 점 외에도 장신에 잘생긴 외모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1935년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4.2cm이던 시절, 180cm에 달하는 큰 키와 단정한 용모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선 드물게 연애결혼을 한 점도 여성들의 인기에 불을 지폈다. 보급이 급속히 늘던 라디오와 시각성을 강조하는 영화 등 20세기 대중 영상미디어가 확산한 점도 이런 경향에 힘을 보탰다.
고노에 총리도 이런 시류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킹(キング)’이나 ‘일출(日の出)’ 같은 대중잡지에 자주 기고를 하며 대중적 인기를 끌어올렸다. 총리 취임식 직후부터 라디오도 적극 활용했다.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노구교 사건 등이 일어난 직후 “정부의 소신” “제국 정부의 결의” 같은 제목의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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