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적 시선 강제한 파시즘
문학·예술·언어·학문에 대한 통제 강화
'게르만 성역' 강조…획일적 시각 강요
검열·박해의 일상화
서적 소각 등 '폐기 작업' 확산
유명 문화계 인사, 표적 삼아 퇴출
후유증 컸던 '문화 황폐화' 정책
정치적 이유로 인류문화유산 탄압
탄압 작품은 전후에도 저평가돼
문학·예술·언어·학문에 대한 통제 강화
'게르만 성역' 강조…획일적 시각 강요
검열·박해의 일상화
서적 소각 등 '폐기 작업' 확산
유명 문화계 인사, 표적 삼아 퇴출
후유증 컸던 '문화 황폐화' 정책
정치적 이유로 인류문화유산 탄압
탄압 작품은 전후에도 저평가돼
이런 움직임은 현대적인 예술 풍조를 억압하는 형태로 구체화했다. 또한 강압적으로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통일됐다. 반전사상을 담은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영화화한 작품처럼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예술작품은 모두 폐기됐다. 소위 불온서적들은 불태워졌고, 주요 박물관의 소장품은 깨끗하게 세탁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문화계의 수많은 거장이 ‘비독일적’이라는 이유로 숙청됐다. 하인리히 만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은 친사회주의 행보를 보였다는 이유로 공격받았다. 알폰스 파케트, 알프레트 되블린, 토마스 만, 리카르다 후흐 같은 문인은 강제로 문인협회를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비독일적·반독일적으로 분류된 서적들은 불에 탔다. 카를 마르크스와 하인리히 하이네, 지크문트 프로이트, 에리히 레마르크, 에리히 케스트너 등의 작품들이 대표적이었다.
회화와 사진 등의 분야도 나치 독일의 치밀한 감시를 받았다. “외래의 퇴폐적 사조에 오염됐다”고 평가받은 ‘부끄러운 예술 작품’을 그린 것으로 꼽힌 막스 리버만, 로비스 코린트, 막스 슬레포크트, 에드바르 뭉크 등의 작가가 공격받았다.
히틀러는 특히 현대미술에 혐오감을 표명했다. 그는 “모든 예술 작품은 대중에게 쉽게 이해되어야 하고, 국가의 자긍심을 고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에 따라 주요 미술관에 소장됐던 현대미술 작품들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에서만 수백만 마르크 상당의 미술작품이 피해를 본 것으로 파악됐다. 수많은 미술관에서 미술품이 압류되거나 해외로 판매됐다. 파괴된 작품도 적지 않았다. 헤르만 괴링 같은 경우는 개인적인 만찬 파티를 위해 주요 미술관의 작품을 사적으로 대여했다가 반환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1938년에는 압류한 작품들로 베를린에서 ‘퇴폐 예술전’이 열렸고, 1939년이 되면 베를린의 메인 화력발전소에서 소각된 미술작품이 그림 1004점과 드로잉 3825점에 달했다고 한다.
음악이라고 권력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유대인과 외래의 오염으로부터 독일 음악을 구하려는” 노력이 거세게 이어졌다. 베를린 국립음대를 비롯한 주요 음악 기관이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 시대 최고 인기를 얻었지만, 같은 독일계 작곡가인 안톤 브루크너와 한스 피츠너의 작품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대의 저명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슈트라우스가 유대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본에 기반해 1934년 오페라 ‘말 없는 여인’을 작곡하자 나치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현대음악가 파울 힌데미트는 더욱 심각한 대우를 받았다. 1934년 나치를 풍자한 그의 오페라 ‘화가 마티스’는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대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이 같은 처사에 반발해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비판 글을 기고했지만, 곧 입장을 바꿔 괴벨스에게 사과하고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이와 함께 구스타프 말러와 에른스트 크레네크, 쿠르트 바일의 음악은 “다양한 마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폐기됐다. 이들 유대인 음악가는 독일 음악가들과 분리되기 시작했고, 유대인이 빠진 자리는 독일인들로 채워졌다. 이를 두고 나치는 “열등한 것을 우등한 것이 대체한다”는 이론으로 정당화했다.
전방위적인 나치 독일의 문화 사업으로 주요 지식인들의 서가는 일급의 도서 대신 이류, 삼류 서적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정치와 전혀 무관한 책만이 연명할 수 있었다.
유명한 유대계 시인이던 하인리히 하이네조차도 새 판본 출간이 금지됐고, 강제로 잊힌 인물이 됐다. 하지만 하이네의 작품들은 독일 전통문화에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완전히 삭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이네의 시를 제외하고 독일 가곡을 듣는 게 불가능했고, ‘로렐라이’처럼 독일 문학사에서 제외하는 게 불가능한 작품의 경우는 ‘작자 미상(Anon)’으로 분류됐다. 하이네의 삶이 어려 있던 공간은 모두 압류되거나 압수됐고, 이는 멘델스존 등 다른 유대계 예술인의 유산에도 공동으로 적용됐다.
나치에게 볼프강 괴테와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안전한 작가였지만, 자칫 반정부 운동으로 번지기 쉬운 소재로 작품을 쓴 프리드리히 실러는 요주의 작가로 분류됐다.
수많은 걸작이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창작됐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고, 훼손·파괴되고, 주인을 잃고, 강제로 원래 창작자가 잊히도록 강요받았다. 집요한 흠집 내기와 전방위적인 정치적 공세로 한동안 특정 작가의 작품은 후대에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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