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재의 정점 '수권법'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해
다수파 나치당, 견제 세력 제거

자유헌정 시스템의 붕괴
히틀러에 입법·행정·사법 절대 권한
선거로 집권한 나치가 민주주의 말살

강화된 권력 견제·통제 움직임
대중의 광기·과속 견제 위해
전후, 비선출직으로 사법부 구성
1933년 독일 제국의회에서 수권법 관련 연설 중인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1933년 독일 제국의회에서 수권법 관련 연설 중인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1933년 3월 24일 독일 제국의회에서 나치당 주도로 ‘민족과 제국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법률’이 처리됐다. 흔히 ‘수권법(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법률)’이라는 용어로 번역되는 ‘전권위임법(Ermächtigungsgesetz)’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당시 수권법은 찬성 441표, 반대 94표로 가결됐다. 바이마르헌법 제76조에 규정된 참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 요건을 아슬아슬하게 충족했다. 실제 표결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81명의 공산당 소속 의원들과 적잖은 수의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구금 상태이거나 위압적인 분위기 탓에 표결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민당 당수 오토 벨스가 반대 연설을 남겼지만, 나치의 폭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수권법은 제국의회를 통과한 지 3주 후인 5월 5일부터 시행됐다. 이 법의 골자는 제국의회의 동의와 대통령의 연서 없이도 행정부가 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행정부에 무제한의 입법권을 부여하며 기존 헌법을 비롯해 의회와 기존 정당을 모두 무력화했다. 제국대통령직도 수상인 히틀러에 의해 허울만 남게 됐다. 1933년 여름까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해산되거나 스스로 문을 닫도록 강요됐다. 노조는 분쇄됐고 작은 이익단체도 금지되거나 나치당의 통제에 들어갔다. 사상 통제도 감행됐다. 스포츠 단체와 연구기관, 직업공동체, 청년 단체, 오케스트라까지 새 나치 국가에 대한 의무가 부여됐다. 사법부는 나치 폭주의 충실한 조수가 됐다.

나치당은 “국민의 통일성이 다시 세워졌다”고 선전에 나섰다. “독일이 국가적 강성함을 다시 찾고 1920년대 이래 지체됐던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극복해냈다”는 희망을 강요했다. 허울만 남은 제국의회는 ‘장식’ 역할만 수행할 뿐이었다. 독재 체제는 법적 정당성을 갖추며 완비됐다. 나치는 창당 이후 20여 년 동안 국가정책에 반영하려고 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이에 따라 독일의 내치와 외정, 경제정책,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부분이 빠른 속도로 변했다.

수권법의 등장은 자유주의적 헌정 국가 원칙으로부터 급격한 이탈을 뜻했다. 자유 헌정 시스템의 규범과 법치주의에 기반한 기존 국가의 권력은 급격히 위축됐다. 견제받지 않고 제한 없는 자의성과 폭력을 행사하는 정부가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것이다. 나치는 형식적으로는 바이마르헌법을 존속시켰지만, 한시적 예외법인 수권법을 상시화하며 현실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나치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새로운 독일을 위해 의회주의 시스템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선언했다. 수권법의 시행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이 무제한 강화됐다. 히틀러라는 개인은 행정 권력 그 자체로 형상화됐고, 그의 이름에 따라 법률이 집행됐다.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의 최고사령관이었으며, ‘최고 법관이자 무결점의 법관’이었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뒤 히틀러는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합쳐 지도자 겸 제국 수상, 즉 총통 직을 만들었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해 독일 국민의 90%가 찬성했다. 군인과 공무원은 “독일제국과 민족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히틀러의 권한은 헌법적·법적 제약을 받지 않았다.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며 이성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존재였다. ‘법은 총통의 의지’(헤르만 괴링)였으며 ‘입법은 권력의 흐름’에 불과했다.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총통께서 법을 보호하신다”며 총통절대주의가 법과 법률, 도덕, 그리고 국가 그 자체까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와 나치에 의한 민주주의의 종언은 히틀러와 나치가 선거에 의해, 민주적 방식으로 집권했다는 점에서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히틀러는 정치인이 이루지 못했던 대중의 동원과 통합을 이뤘다. 히틀러를 통해 농부와 노동자, 일반 회사원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대접받는다고 느꼈다. 히틀러에게는 강력한 자발적 대중 지지 세력이 있었다. 돌격대(SA)는 1934년까지 4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는데, SA의 주력은 18세에서 30세 사이의 하급 노동자·도제·학생·대학생이 대다수였다. 수만 명의 젊은이는 SA에서 안정감과 연대, 동료애, 신뢰,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을 이루기를 꿈꿨다.

나치 독재가 본격화한 이후 빚어진 처참한 역사의 비극을 겪은 뒤로는 히틀러 같은 괴물이 또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집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전체주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 구축에 주력했다. 통제되지 않는 군중에 의해 제한 없는 정치적 역동성이 초래한 혼란을 피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따라 견제와 균형이 강조된 정치권력의 분산 조치가 이뤄졌다.

[세계를 바꾼 순간들] '선출된 권력'이 폭주할 때
특히 사법부는 비선출직 기관으로 구성돼 대중의 광기와 과속을 제어할 의무가 부여됐다. 비합리적인 대중의 수중에 놓이기 쉬운 의회는 의도적으로 권력을 약화시켰고, 견제와 균형은 강화됐다. 비선출직으로 구성된 사법부에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전체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명이 부여됐다. 이처럼 전후 주요 국가에서 사법부를 선출된 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큰 혼돈과 비극을 야기한 대중 민주주의의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고뇌와 고심이 반영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