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바꾼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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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아라사'와 '노서아'를 다른 나라로 알았던 중국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아라사(俄羅斯), 노서아(露西亞). 러시아를 표현하던 옛 가차(假借)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기를 처음 만든 중국 청나라에서 아라사와 노서아는 단순히 표기법만 다른 게 아니었다. 적지 않은 기간 중국에선 아라사와 노서아가 다른 나라로 인식됐다. 아라사와 노서아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제 치세 후반부 때다.이처럼 하나의 나라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나라로 인식된 것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떨어진 지역을 지칭한 이유가 크다. 또 한쪽에선 전투, 한쪽에선 사절단이란 상이한 형식으로 러시아를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통역을 맡은 몽골인들의 ‘혀가 짧았던’ 것이었다.17세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접촉과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청나라 기록에 러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러시아 하바로프 원정대가 1653년 잉구타 아찬스크에서 청군과 충돌하면서다. 청나라 측 기록에 “나찰(羅刹·Rus, Ros의 음차어)과 전투했다”고 언급되면서 동양 사료에 러시아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하바로프의 후임으로 스테파노프의 선단이 또다시 아무르강에 등장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선정벌의 ‘나선(羅禪)’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만적들은 누런색의 비단옷을 입고 서양에서 온 것 같다”는 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러시아인에 대한 묘사다.비슷한 시기 제정 러시아는 청나라에 정식 사절을 파견했다. 몽골을 거쳐 들어온 이들 정식 사절의 출신국은 ‘악라사(鄂羅斯)’라고 불렸다. 악라사라는 국명은 ‘Oros’라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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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청어로 일어선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17세기 초·중반 세계무역을 주도하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물자 교환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학자 판 데르 쿠의 지적처럼, 17~18세기에는 유럽 대륙 물자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중앙 저장소 역할까지 수행했다.네덜란드 성장의 발판은 처음에는 소금, 곧이어서는 청어가 담당했다. 네덜란드가 국제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 발트해 교역에서부터다. 원래 스칸디나비아와 러시아, 발트해 주변 지역에선 필요한 소금을 북독일이나 폴란드의 암염 광산에서 생산한 암염으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사용했다.하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발트해 지역의 소금 교역은 네덜란드인의 주무대가 된다.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 서부 지역과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생산하는 풍부한 바닷소금을 공급하며 부를 쌓았다. 곧이어 프랑스산 와인 등으로 교역 품목을 확대했다. 벌크선을 통한 각종 화물 교역도 점차 늘려나갔다.소금 교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적잖은 위기와 저항도 있었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네덜란드와 대립하면서 스페인은 네덜란드 선박에 대한 엠바고를 시행했다. 이베리아반도산 소금 무역에서 네덜란드 상인이 축출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한자동맹 상인들은 선박이 부족해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북유럽에서 소금 부족 현상이 심해지고 소금 가격이 급상승하는 부작용만 빚어졌다.이베리아반도에서 소금을 얻기 힘들어지자, 네덜란드는 1621년 이후 포르투갈산 소금 교역 비중을 줄이는 대신 서부 프랑스산 소금으로 대체를 시도했다. 하지만 프랑스산 소금은 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생선 저장용으로 부적합했고,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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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벼랑 끝으로…기후가 바꾼 역사
명나라 말기 재난 기록인 <재황기사(災荒記事)>를 쓴 유학자 진기덕(陳基德)은 명나라 후기 물가와 관련한 기록을 다수 남겼다. 그는 만력(萬曆) 연간(1573~1619) 풍요의 시기를 “곡물 1두의 가격은 결코 3~4푼을 넘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는 물가가 낮을 때 모든 사람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먹을 것이 부족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당시는 번영의 시기였다. 진기덕도 “사람들은 콩과 밀 따위를 소와 돼지에게나 먹일 것으로 여기고는 내던졌다. 신선한 생선과 최고급 고기가 모든 가정에 충분했다. 모두가 이런 번영이 영원히 지속되리라 생각했다”며 풍요로운 시절을 회상했다. 가정 연간 이후 명나라에는 부성(府城) 152개, 주성(州城) 240개, 현성(縣城) 1134개, 선위사성(宣慰司城) 12개, 선무사성(宣撫司城) 11개, 초토안무사성(招討安撫司城) 19개, 장관사성(長官司城) 177개 등 모두 1745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세계에서 도시화도 가장 빠르게 진행됐다. 북경과 남경·소주·항주·개봉 등 대도시는 인구가 100만 명 안팎이었고, 부성과 현성 등 중간 도시 인구도 대략 30만~40만 명에 달했다.경제적 안정과 꾸준한 성장을 발판 삼아 원래 사회적 신분이 낮았던 상인도 부를 축적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명대 중기 상인 장내의(張來儀)는 ‘고객락(賈客樂, 상인의 즐거움)’이라는 시에서 “인생에서 장사가 제일 즐겁다(人生何如賈客樂)”고 읊었다. 휘주 상인 왕도곤(汪道昆)은 자식 교육과 관련해 “우리 집안은 대대로 평민이었지만 이제 유학을 배워 집안을 빛내려 하니 앞으로 자손들을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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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책을 '기성품'으로 만들다
르네상스 시기 재정 지원을 할 후원자를 찾는 것은 화가와 조각가, 음악가, 인문학자만이 아니었다. 인쇄업자들도 경쟁적으로 후원자를 구했다. 1450년경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 책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인쇄술은 마인츠와 라인강 주변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이어 1459년 스트라스부르, 1466년 쾰른, 1468년 바젤과 아우크스부르크, 1473년 파리에 인쇄기가 도입됐다.하지만 당대의 문화 선진국이던 이탈리아에선 인쇄기의 보급이 더뎠다. 글쓰기가 일상화된 사회였고, 그만큼 ‘인간 복사기’라고 부를 법한 필경사가 많았기 때문이다.실제로 1460년대 코지모 데 메디치로부터 200권의 책을 만들 것을 주문받은 필경사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45명의 ‘보조’ 필경사를 고용해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쇄기와 경쟁해서 이길 순 없었기에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1478년 파산하게 된다.하지만 1500년경 이탈리아에서도 필경사는 한물간 직업이 되었고, 인쇄기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베네치아에서만 150명의 인쇄업자가 활약하며 화려한 장정의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식자공·서적상·사서·출판업자·서적 행상인 등 인쇄업에 관련된 다양한 직업도 생겨났다.이 시기 가장 유명한 인쇄업자(출판인)는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희랍어(고대 그리스어)로 출판한 알두스 마누티우스(알도 마누치오)다. 그가 1501년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8절판(octavo)을 출판했을 때, 그는 마치 그것이 필사본인 것처럼 양피지에 여러 부를 인쇄해 중요한 인물들에게 배포했다. 책을 전한 이 중에는 만투아 후작인 프란체스코 곤차가의 부인이자 르네상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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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명작은 모두 '선전수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은 오늘날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탄생하던 시기에 이들 작품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회화는 수사학처럼 ‘설득’의 수단이었다. 그저 오늘날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보기 좋으라고, 즐기라고 만든 그림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지닌 실용적 도구인 셈이다. “교회 벽에 그림이 그려진 것은 문맹자들이 책에서 읽지 못하는 것을 벽에서 읽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르네상스 시기에 널리 애용된, 6세기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문구처럼 이 시기 예술 작품은 목적성이 강했다.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던 교황의 의뢰로 제작한 그림들은 교황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그림의 모티프가 된 역사적 사건과 현재의 유사점을 드러내 세속이나, 일반적인 교회 기구에 비해 교황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보티첼리는 <구약성서>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감히 도전한 후 땅이 갈라져 고라와 그의 부하들을 삼켜버리는 장면을 묘사한 ‘고라의 처벌’을 그렸다. 15세기 초의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바젤 공의회를 비난하면서 고라를 언급했다.라파엘로는 볼로냐의 벤티보길리오 가문과 갈등을 겪고 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려 했지만, 천사들에 의해 쫓겨난 헬리오도루스의 이야기를 그렸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기타 지역의 가톨릭교회에 그려진 그림은 개신교가 이의를 제기한 교리적 내용을 해명하기 위해 설명하고자 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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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이 유럽 장악한 비결 '결혼동맹'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광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부르고뉴의 대공 대담공(大膽公) 샤를에게 자기 아들 막시밀리안과 샤를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당시 사촌인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대립하고 있던 대담공 샤를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프리드리히 3세와 대담공 샤를 간 약혼 조약은 1473년 트리어에서 이루어졌다. 대담공의 사위로 예정된 18세의 막시밀리안은 그의 부인의 영지를 기반으로 자신의 야망을 조금씩 실현해나갔다. 1477년 1월 대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스위스 병사의 손에 사망하자, 약 8개월 뒤인 8월에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결혼식을 치르게 됐다. 이 결혼으로 막시밀리안은 각 지역으로 분할될 뻔하던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를 다시 통합했다.하지만 막시밀리안의 결혼이 과실을 맺게 된 데는 우연과 행운이 따랐다. 장인인 대담공 샤를의 때 이른 죽음이 대표적이다. 막대한 영지를 보유한 대담공이 갑자기 죽으면서, 부르고뉴 공작령과 부르고뉴 백작령(프랑슈콩테) 등 대담공의 영지를 탐냈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살리카법(Lex Salica)’에 근거해 영유권 분쟁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막시밀리안은 아버지를 잃은 부인을 지키는 역할을 자임했다.그 결과, 오랜 분쟁 끝에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플랑드르·아르투아·브라방·홀란트·림베르크·구엘드레란트·룩셈부르크 등의 영지를 보유하는 행운을 얻는다. 프랑스 왕의 공격을 막시밀리안이 막아내는 모습은 막시밀리안을 ‘탐욕스러운 친척의 위협으로부터 고아를 구해내는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보다 못한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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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옷 입은 죄"…사형 선고 받은 잔 다르크
백년전쟁 중 영국군에 잡혀 종교재판소에 넘겨진 잔 다르크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졌다. “잔 다르크가 남자 옷을 입었다”는 게 최고형이 내려진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혔다. 중세 서양 사회에서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행위의 대가는 몹시 가혹했다.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28년경 영국군은 무적처럼 보였고, 신은 영국인의 편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상황을 단번에 바꾼 것은 1412년 프랑스 샹파뉴 동부 지역 뫼즈 인근 동레미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라는 소녀였다.잔 다르크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428년 시농에서 잔 다르크를 만난 왕세자(도팽) 신분이던 샤를은 “사내아이처럼 옷을 입은 시골 소녀”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자가 남장한다는 것은 20세기 초 남자가 여장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 저술가 데즈먼드 시워드의 평이다.하지만 당시 신학자들이 잔 다르크를 살펴본 뒤 “이단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없으며, 미친 것도 아니다”라며 그녀가 오를레앙에 들어오도록 샤를에게 조언하면서 잔 다르크의 남장 문제는 일단락되었다.하지만 이후 샤를의 반대파들은 잔 다르크에게 백전백패하는 도중에도 국왕으로 즉위한 샤를에게 “왕의 칭호를 참칭한 자”라는 비난과 함께 “남자의 옷을 입은 수치스럽고 분별없는 계집애와 놀아난 자”라고 자극했다.이 시기 잔 다르크를 둘러싸고 있던 신비한 전설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생드니 요새 근처 전투에서 잔 다르크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은 채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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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바꾼 중세의 '위조 문서'
중세 유럽에서 ‘문서 위조’는 일상화된 현상이었다. 일반적으로 메로빙거 왕조 시대 사료의 50% 이상, 카롤링거 왕조 초기 4명의 왕에 관련한 사료는 15%가량이 위조품으로 알려져 있다. 샤를마뉴 대제 이름으로 작성된 270여 개 문서 가운데 100여 개는 위조본이라고 한다.중세인의 위조 개념과 그에 대한 죄의식은 현대인과는 매우 달랐다. 위조를 한 주체는 바로 세속의 권력자와 교회 관계자들이었다. 이 같은 중세의 위조 행위를 두고 ‘도덕성의 무감각화’라는 윤리적 비난부터 사기행각이라는 시각, 중세 고유의 일반화된 심성이라는 해석까지 다양하게 전개됐다. 중세인들이 “천국으로 가기 위한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으로 적극적으로 위조 행위를 벌였다는 분석까지 나온다.이런 흔하디흔한 위조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게 이른바 ‘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寄進狀, Donation of Constantine)’이라고 불리는 문서다. 교황의 수위권과 교황 중심 교회를 확립하는 과정에 관여한 대표적 위조문서다.‘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은 326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동방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옛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이탈리아 전 지역, 그리고 로마제국의 서방 영토를 당시 교황이던 실베스테르 1세(제위 314~335)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오랫동안 유럽 서방세계에서 세속 황제권에 대한 교황의 교권 우위를 정당화하는 증거이자 근거로 활용됐다. 역대 교황들은 황제와 갈등을 겪을 때마다 이 ‘기증 문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곤 했다.‘콘스탄티누스 대제 기진장’은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과 교황청 간 대립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