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굶주린 1차 십자군
인종·종교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없애
예루살렘서 유대인·무슬림 거의 사라져

지역 내 정치세력으로 용인했던 무슬림
"십자군은 몰아내야 할 놈들" 입장 돌아서

이슬람, 유럽의 야만적 행위에 깊은 상처
극단적 대립의 악연, 오늘까지 이어져
19세기에 제작한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을 묘사한 그림. /자료: 위키피디아
19세기에 제작한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을 묘사한 그림. /자료: 위키피디아
중세 시대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곽은 전 세계 요새 중 매우 강력한 방어 시설 중 하나였다. 로마제국 시기 하드리아누스가 성곽을 정비한 이래 비잔티움제국과 우마이야 왕조, 파티마 왕조에서 지속적으로 성곽을 개보수했기 때문이다.

1차 십자군이 원정을 떠났을 당시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의 태수인 이프티카르 웃 다왈라가 지휘하는 아랍과 수단 군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크족(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군로에 위치한 우물에 독을 풀고 가축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뒤이어 아랍 군대는 예루살렘 내에 거주하던 기독교 주민을 당시의 관행대로 성곽 외부로 이주시켰다. 유대인은 이전처럼 예루살렘 시내에 머무는 게 허용됐다.

기독교도를 성 밖으로 쫓은 것은 공성전 기간에 식량 소모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무기를 드는 게 금지돼 군사적으로도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십자군과 내통할 것이란 우려 또한 이런 조치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관례대로 종교적 관용은 유지됐고, 종교를 빌미 삼은 학살은 없었다.

비록 알하킴 칼리프 시대의 기독교 탄압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기독교도의 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정교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는 예루살렘 시내에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공성전은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벽에 도달한 1099년 6월 7일 시작됐다. 하지만 방어군의 준비가 우월해 공략은 실패했다. 식수 부족과 더위로 고전하던 십자군에게 이슬람 세력 지원군까지 들이닥치면서 어려움은 가중됐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을 더욱더 강하게 불 지폈고 공격을 계속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결국 7월 13일과 14일 밤 대대적인 공격이 재개됐다. 시온산과 예루살렘 성곽 북쪽의 동쪽 지역을 향한 십자군의 동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성곽 북서쪽에는 위장 공격도 병행했다.

아귈레의 레이몽에 따르면 “보병 1만2000명과 기사 1200~1300명이 공격의 주를 이뤘고, 이들 십자군과 동행한 수도자와 여자, 어린이들도 공격에 가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14일 저녁에 레이몽의 군대가 성 밖 해자를 넘어 탑 누상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 성곽 북쪽 성루는 고드프루아와 그의 동생인 불로뉴의 외스타슈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뚫렸다. 투르네의 길베르 등 플라망 출신 기사가 로렌 지역에서 온 군대의 선봉에 섰고 뒤를 고드프루아가 뒤따랐다. 교두보가 마련된 뒤 예루살렘 성문이 열렸다. 탕크레드가 이끄는 십자군 주력이 예루살렘 시가로 진입했다.

방어막이 무너진 것을 본 무슬림들은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있는 사원 지구를 최후의 요새로 삼기 위해 도망갔다. 하지만 방어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탕크레드의 십자군이 그들을 덮쳤고, 무슬림들은 서둘러 거액의 몸값을 약속하며 항복했다.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항복한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탕그레드의 깃발을 걸고 안전을 보장받았다.

나머지 다른 도시 거주자들은 이프티카르가 여전히 레이몽과 교전 중이던 도시 남부 섹터로 몰려갔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이프티카르 태수는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다윗의 탑으로 도피했다. 이곳에서 그는 십자군에게 자신과 호위병들의 안위를 보장한다면 엄청난 양의 보물을 몸값으로 지불하겠다고 레이몽에게 제의했다. 레이몽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프티카르는 안전하게 도시를 빠져나가 아스칼론 요새에 있는 무슬림 군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이프티카르와 소수의 무슬림만이 예루살렘에서 생명을 보전한 이슬람교도였다. 악전고투 끝에 승리한 십자군은 성공에 도취해 이성을 잃었다. 십자군은 시내의 모든 가옥과 모스크로 쳐들어가 만나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대학살은 오후 내내 그리고 밤새도록 이어졌고, 심지어 알아크사 모스크에 걸린 탕크레드의 깃발조차 이곳에 피해 있던 무슬림들에겐 보호 수단이 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다른 십자군 부대가 모스크로 들이닥쳐 전원을 몰살했기 때문이다. 아귈레의 레이몽이 그날 아침 사원 지구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사원으로 가는 길에 쌓인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무릎까지 찼다고 한다.

예루살렘 시내에 거주하던 유대인도 무리 지어 그들의 주요 시너고그(유대교 회당)로 도피했지만, 이들 역시 무슬림을 도왔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처단됐다. 유대인에게도 이슬람교도에게처럼 자비란 없었으며, 유대인의 모든 건물과 재산은 소각됐다. 십자군들은 더 이상 죽일 무슬림을 발견할 수 없을 때까지 살인 행위를 계속했다.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마이어 교수에 따르면 “십자군은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그들의 칼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쳐서 쓰러뜨렸다”고 전해진다. 오직 로렌 지방 출신 군대만 학살에 비교적 소극적이어서 “유대인 여인을 강간하는 것만 주저했을 따름”이었다.

당대의 기독교인조차 공포를 느낀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대학살로 희생된 무슬림과 유대인의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대학살은 예루살렘시를 텅 비게 했다. 대학살의 여파는 오래갔다. 프랑크인(십자군)을 지역 내 정치세력으로 용인해왔던 많은 무슬림은 학살 이후 “프랑크인은 몰아내야 할 놈들”이라는 확실한 기준을 세웠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천년 대립의 시작 '예루살렘 대학살'
피에 굶주린 기독교 광신주의는 다시 이슬람 극단주의를 야기했다. 이슬람 세계는 유럽의 야만적 행위에 마음속 깊은 상처를 입었다. 후일 일부 근동 지역 라틴 세력이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며 협력하는 기반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대학살의 기억은 언제나 그러한 시도를 방해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피가 피를 부르고 있다. 천 년 전 시작된 종교 간 극단적 대립이라는 악연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