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0년 독일서 인쇄기 발명…책 수요 폭발
바젤·파리 등 주변국 도시로 인쇄기 확산
필경사로 버티던 이탈리아도 신기술에 '항복'
1500년경 베네치아 중심으로 출판산업 활황
16세기 중반 로마서 상업잡지·전문지 등장
대량생산된 '기성품' 서적 시장에 쏟아져
바젤·파리 등 주변국 도시로 인쇄기 확산
필경사로 버티던 이탈리아도 신기술에 '항복'
1500년경 베네치아 중심으로 출판산업 활황
16세기 중반 로마서 상업잡지·전문지 등장
대량생산된 '기성품' 서적 시장에 쏟아져
하지만 당대의 문화 선진국이던 이탈리아에선 인쇄기의 보급이 더뎠다. 글쓰기가 일상화된 사회였고, 그만큼 ‘인간 복사기’라고 부를 법한 필경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460년대 코지모 데 메디치로부터 200권의 책을 만들 것을 주문받은 필경사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45명의 ‘보조’ 필경사를 고용해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쇄기와 경쟁해서 이길 순 없었기에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1478년 파산하게 된다.
하지만 1500년경 이탈리아에서도 필경사는 한물간 직업이 되었고, 인쇄기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베네치아에서만 150명의 인쇄업자가 활약하며 화려한 장정의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식자공·서적상·사서·출판업자·서적 행상인 등 인쇄업에 관련된 다양한 직업도 생겨났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인쇄업자(출판인)는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희랍어(고대 그리스어)로 출판한 알두스 마누티우스(알도 마누치오)다. 그가 1501년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8절판(octavo)을 출판했을 때, 그는 마치 그것이 필사본인 것처럼 양피지에 여러 부를 인쇄해 중요한 인물들에게 배포했다. 책을 전한 이 중에는 만투아 후작인 프란체스코 곤차가의 부인이자 르네상스 시기에 유명한 문화 후원자인 이사벨라 데스테도 포함됐다.
문학작품 시장이 성장하면서 지올리토 가문이나 지운티 가문 같은 성공적인 인쇄업자도 등장했다. ‘기계로 쓴 필사본’으로 여겨지던 인쇄본 서적은 크기와 가격이 표준화된 상품으로 취급됐다.
1498년 베네치아의 인쇄업자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발행한 카탈로그가 최초로 가격을 표시했다.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설립한 알디나출판사가 1541년 선보인 ‘알디나 카탈로그(the Aldine Catalogue)’에서 최초로 ‘폴리오(folio, 2절판)’, ‘콰트로(quatro, 4절판)’, ‘옥타보(octavo, 8절판)’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인쇄업자가 책의 끝부분에 산문이나 운문으로 광고를 게재해 독자에게 자신의 서점에서 다른 책을 사라고 권하면서 책의 판매가 촉진됐다. ‘고위험·고수익’ 사업이던 출판업의 불안정성을 안정적 수요처 발굴로 극복하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한 노력의 대표적 사례로 책 광고 등장을 꼽을 수 있다.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의 한 판(에디션)에는 “<광란의 오를란도>를 사거나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구매하고 싶다면 베네데토와 아고스티노 형제가 운영하는 빈도니형제출판사로 가십시오”라는 광고 문구가 실렸다. 실제로 인쇄업자 가브리엘 지올리토는 전문 작가인 로도비코 돌체를 고용해 집필과 번역, 편집을 맡겼다. 이러한 협업이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의 대운하 옆에 베네치아판 ‘출판 거리’가 형성된 이유다. 거의 같은 시기인 16세기 중반에는 특히 로마에서 상업화된 소식지(avviso)와 ‘전문 극장(commedia dell’arte)’이 등장했다.
고객들은 대량 생산된 ‘기성품’ 작품을 구입하거나, 중개상을 통해 작품을 손에 넣기도 했다. 예술작품의 경우엔 개별적으로 의뢰받지 않은, ‘기성품’의 판매가 적어도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모상,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세례자 요한을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 수요는 예술 공방들이 특정 고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제작해도 될 만큼 컸다. 예술 공방들은 최종 고객의 특별한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미완성 상태로 작품을 남겨두기도 했다. 14세기 피렌체에서는 이미 유명 조각품의 저렴한 복제품이 제작·유통됐다.
15세기에는 기성품이 점점 더 보편화됐다. 피렌체의 바르톨로메오 세라글리 같은 일부 상인은 기성품 판매를 전문으로 했다. 세라글리는 메디치 가문을 위해 로마에서 고대 대리석 조각상을 수소문했다. 아라곤의 알폰소를 위해선 피렌체에서 직물을 주문했고 도나텔로, 필리포 리피,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 등을 고용했다. 그는 채색 사본과 테라코타 성모상, 체스 세트, 거울 등의 상품을 거래했다.
이 시기에 복제품과 모조품 시장의 중요성도 커졌다. 경건한 이미지를 담은 목판화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부터 제작됐다. 15세기 후반에는 1468년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만남과 같은 시사적 사건을 그린 목판화가 추가됐다. 인쇄술이 발명된 후 책의 삽화가 중요해졌다.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의 작품에 삽화를 곁들인 유명한 판본을 제작했다.
일부 판화는 유명한 그림을 재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사한 판화는 1500년까지 유통됐다. 줄리오 캄파뇰라는 만테냐, 조반니 벨리니, 조르조네의 그림을 본떠 판화를 제작했다. 마르코 라이몬디는 라파엘로의 그림을 자유롭게 ‘해석’해서 그린 판화로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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