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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 유민, 대한해협 건너 일본국 탄생에 큰 역할…일본 일왕가와 혈연관계 깊어지고 문화발전에 기여

    고당(高唐)전쟁에서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 유민들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신라로 망명해 대당(對唐)전쟁에 합류했던 부류는 신라인이 됐고, 북만주나 동만주 일대 오지로 탈출한 유민들은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종족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또 한 무리는 이미 진출해 교류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한편,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이정기 일가는 청주, 서주 등 산둥반도와 장쑤성(江蘇省) 일대에 제나라를 세운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며 54년 동안 발전했다. 또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성장했다. ‘보트피플’ 백제 유민 일본으로 건너가그럼 백제 유민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660년 8월, 실정과 오만으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항복한 의자왕과 대신들 그리고 죄없는 병사들 1만2800명은 배에 실려 당(唐)으로 끌려갔다. 의자왕과 왕자들, 일부 대신은 당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복국군의 임금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던 부여풍은 붙잡혀 영남(廣東·廣西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산둥지역에 버려졌던 백성들은 다시 요동으로 이주당했다. 한편 주류성 전투와 백강(백촌강)해전에서 대패한 복국군은 “어찌할 수 없도다. 백제의 이름은 이제 끊어졌고, (조상)묘소에도 갈 수가 없구나…”(《일본서기》)라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반달족은 어쩌다 야만의 대명사가 됐을까

    8만 명이 넘는 북방 야만족 집단이 430년 지브롤터해협을 건넜다. 이 야만족의 정예병들이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로 진격했다. 히포는 북아프리카 최대 도시인 카르타고와 로마식 가도가 연결된 상업·군사 요충지였다. 그들은 히포를 지키던 로마 군대와 14개월간 공방전 끝에 결국 함락시켰다. 히포를 점령한 야만족이 바로 반달족이다.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은 본래 2~3세기께 북유럽에서 남하해 폴란드 남쪽 도나우강 유역에 살았는데, 5세기 들어 훈족의 압박과 기후 악화로 인한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부족 전체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달족은 ‘교활하지만 탁월한 왕’으로 평가받는 가이세리크의 지휘 아래 히스파니아(스페인)로 들어갔으나, 먼저 정착한 서고트족에 밀려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것이다.반달족은 5년간 마우레타니아(모로코)와 누미디아(알제리)를 평정하고 최대 도시 카르타고까지 점령한 뒤 반달왕국을 세웠다. 지브롤터해협을 건넌 지 10년 만이다. 그들은 카르타고를 거점으로 시칠리아섬, 샤르데냐섬을 수시로 약탈하고 이탈리아 본토까지 넘봤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서로마제국이 북방 훈족과 게르만족을 방어하는 데 전념하느라 남쪽을 대비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가이세리크의 반달족은 455년 수도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에 상륙했다. 이에 테베레강을 거슬러 로마에 입성했다. 겁에 질린 군중이 무기력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를 살해하자, 교황 레오1세가 가이세리크와 협상해 성문을 열었다. 반달족 병사들은 보름 동안 로마를 철저히 약탈해갔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반달족의 로마 약탈을 ‘로마 겁탈’이라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르네상스와 동의어가 된 메디치 가문

    중세에 위축됐던 예술과 문화에 대한 후원은 14~15세기에 되살아나며 르네상스를 열었다. 르네상스는 문자 그대로 ‘재생·부활’을 뜻한다. 르네상스가 번성한 그 중심에 이탈리아 도시국가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1400년께만 해도 두드러진 집안이 아니었다. 가문의 창시자 격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삼촌인 비에리 메디치가 교황청 환전 업무를 하던 메디치은행을 인수했다. 그리고 2년 뒤 상업이 번성한 피렌체로 옮겨왔다. 당시 피렌체에는 은행이 70개가 넘었다. 이때 은행은 지금처럼 거대 금융회사가 아니라 대부업자를 가리켰다. 조반니는 나폴리 귀족과 8년간 거래했는데, 이 귀족이 추기경을 거쳐 1410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가 됐다. 요한 23세는 메디치은행에 교황청의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주거래은행의 특권을 주었다. 그러자 메디치은행은 16개 도시에 지점을 둔 최대 은행으로 부상했다. 모험대차로 ‘피렌체의 국부’ 칭호 얻어1415년 요한 23세는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폐위돼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조반니는 떼일 각오를 하고 그에게 벌금 낼 돈을 빌려주었다. 이 대출은 고스란히 손해가 됐지만, 조반니는 고객과의 신뢰를 끝까지 지킨 금융업자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 덕에 후임 교황도 교황청 자금을 다시 메디치은행에 맡겼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과정과 비슷하다.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신뢰와 신용을 지킨 것이 성공의 요체인 셈이다.메디치 가문이 급성장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피렌체 권력자들과의 마찰이 커졌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 자금 거래가 끊기며 위기를 맞았다. 1429년 조반니가 사망한 뒤 장남 코시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