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정치적 목적 지닌 문화적 도구
가톨릭 교회, 교황권 확대에 예술품 활용
정치 수단인만큼 내용에 대한 통제도 강해
'최후의 심판' 등 명작 곳곳에 검열의 손길
특정 정책 미화·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사용
                                
                    가톨릭 교회, 교황권 확대에 예술품 활용
정치 수단인만큼 내용에 대한 통제도 강해
'최후의 심판' 등 명작 곳곳에 검열의 손길
특정 정책 미화·정치적 반대파 탄압에 사용
                    
                        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던 교황의 의뢰로 제작한 그림들은 교황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그림의 모티프가 된 역사적 사건과 현재의 유사점을 드러내 세속이나, 일반적인 교회 기구에 비해 교황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보티첼리는 <구약성서>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감히 도전한 후 땅이 갈라져 고라와 그의 부하들을 삼켜버리는 장면을 묘사한 ‘고라의 처벌’을 그렸다. 15세기 초의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바젤 공의회를 비난하면서 고라를 언급했다.
라파엘로는 볼로냐의 벤티보길리오 가문과 갈등을 겪고 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려 했지만, 천사들에 의해 쫓겨난 헬리오도루스의 이야기를 그렸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기타 지역의 가톨릭교회에 그려진 그림은 개신교가 이의를 제기한 교리적 내용을 해명하기 위해 설명하고자 제작한 경향이 있었다.
예술 작품이 강력한 선전 수단이었던 만큼 내용에 대한 통제도 강력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는 문학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문학보다는 덜하지만, 회화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로마교황청의 금서목록이 작성되었고, 이는 1560년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공식화됐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비롯한 이탈리아 문학 작품이 우선 금지된 후 철저하게 삭제됐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논의돼 무화과잎으로 나체를 덮도록 했다. 금지된 이미지 목록도 검토됐다. 베로네세는 ‘최후의 만찬’ 그림에 종교 재판관들이 “어릿광대, 술주정뱅이, 독일인, 난쟁이, 그리고 이와 유사한 저속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베네치아 종교재판소에 소환됐다.
회화 작품과 문학 텍스트는 특정 정책을 미화하거나 진실을 수정해 해석하는 데 동원됐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수많은 프레스코화에 과도한 ‘미화’가 적용됐다.
피렌체에서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통치 말기에, 피렌체를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하고 “평화와 공공의 자유(Pax Libertasque Publica)”라는 문구가 새겨진 메달이 주조됐다. 로렌초 데 메디치 치하에서는 파치가(家)의 음모를 진압한 것이나 1480년 로렌초 데 메디치가 나폴리에서 성공적으로 귀환하는 것과 같은 특정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메달이 만들어졌다. 조각가 지안 크리스토포로 로마노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루이 12세 간의 평화 협정을 기념하기 위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를 “정의, 평화, 신앙의 회복자(Iustitiae pacis fideique recuperator)”라고 묘사한 메달을 제작했다. 기계적으로 복제할 수 있고 비교적 저렴했던 메달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파하고 정권에 좋은 이미지를 부여하는 좋은 수단이었다.
조각상은 전사와 군주, 공화국을 찬양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파도바에 있는 도나텔로의 거대한 기마상은 1443년에 사망한 베네치아 용병 대장 에라스모 다 나르니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국가의 의뢰로 제작됐다. 피렌체의 여러 조각상에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밀라노와 같은 더 큰 세력과 벌인 전쟁의 기억을 조각상에 담았다. 그들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아시리아 대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벤 유디트, 용을 물리친 성 조르조와 자신들을 동일시했다. 1494년 피렌체가 공화정을 회복했을 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공화국이 성공적으로 극복했던 위험을 떠올리게 했다. 르네상스 문화사 전문가인 피터 버크 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는 “이런 조각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회화도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베네치아에서는 공화국의 영광을 위해 도제(총독)들의 공식 초상화를 제작하고 전시했다. 도제의 궁전 대의회 홀에는 베네치아의 승리를 담은 그림들이 전시됐다. 피렌체에서도 1494년 공화국이 회복되자 베네치아를 모델로 한 대의회를 설립했다.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의 회의장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의뢰한 앙기아리 전투와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카시나 전투의 승리를 기념한 그림이 있었다. 이들 그림은 1513년 메디치 가문이 돌아왔을 때, 아직 미완성이던 그림들이 파괴됐다. 토스카나 대공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도 정권의 업적을 담은 프레스코화로 베키오 궁전을 다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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