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판 '중화사상'
광개토왕비, 주변 깎아내리는 시각 노골적
백제, 쇠락해진 가야를 '번'으로 취급
신라 황룡사 9층 탑엔 자국중심주의 뚜렷
日도 주변 집단 이적으로 바라봐
500년대 천황 칭호 쓰며 중국 천자 비하
<일본서기> "삼국이 신하 청하며 조공"
삼국통일한 신라도 '번' 역할 국가로 낮춰
광개토왕비, 주변 깎아내리는 시각 노골적
백제, 쇠락해진 가야를 '번'으로 취급
신라 황룡사 9층 탑엔 자국중심주의 뚜렷
日도 주변 집단 이적으로 바라봐
500년대 천황 칭호 쓰며 중국 천자 비하
<일본서기> "삼국이 신하 청하며 조공"
삼국통일한 신라도 '번' 역할 국가로 낮춰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율령제(律令制)의 확산이다. 율령제는 중국식 화이사상(華夷思想)을 확산하는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중국과 가장 먼저 직접 접촉한 고구려부터 중국을 빼닮은 자국 중심적 세계관이 발현됐다. 414년에 조성된 광개토대왕비에서부터 자신을 높이고 주변을 깎아내리는 시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비문 곳곳에서 ‘노객(奴客)’ ‘귀왕(歸王)’ ‘궤왕(跪王)’ 등 남을 폄훼하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에게 복속한 주변 집단에 대해 자신들을 정점으로 하는 상하 관계로 서열을 매겼다. 백제를 겨냥한 ‘백잔(百殘)’ ‘잔국(殘國)’ ‘잔주(殘主)’ 등의 비칭(卑稱)에서도 자국 중심적 세계관이 진하게 느껴진다.
4~5세기경이 되면 고구려는 주변의 신라, 예(濊), 동옥저(東沃沮) 등을 포함한 자신들만의 세계관, 그들만의 질서를 구축했다. 고구려에 신라는 “예부터 속민(屬民)으로 고구려에 조공하는”(광개토대왕비) 존재였으며, 고구려는 “동이(東夷) 매금(寐錦) 위에 군림하는”(충주 고구려비) 존재였다.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모두루묘지)이자 ‘천손의 나라’(신포시 오매리 절골터 금석문)였다. 일본 역사학자 고치 하루히토(河內春人)는 “고구려가 수당과의 전쟁에서 말갈(靺鞨)을 동원하는 등 주변에 영향력을 실제로 행사하는 데 중화사상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분석했다.
백제에선 5세기 말에 ‘백제판 중화사상’이 등장했다. 당시 백제는 일시 쇠락해진 가야 지역에 진출했는데, 이때 가야를 번(蕃)으로 보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어 백제는 남서부에 있던 탐라(耽羅)를 복속시켜 탐라 왕에게 좌평(佐平)의 관작을 부여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속 ‘남만침미다례(南蠻枕彌多禮, 여기서 ‘침미다례’는 ‘탐라’를 의미함)’라는 기술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화사상에 근거해 탐라(제주도)를 ‘백제의 남만’ 자리에 배치했다.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금관국(金官國)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은 까닭에 백제에서와 같이 가야를 ‘번(蕃)’으로 여기는 의식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신라에서 자국 중심주의가 뚜렷이 보이는 것은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황룡사 9층 탑 건립 설화다. 7세기 전반에 황룡사 9층 탑을 건립할 때 탑의 각층에 신라가 멸해야 할 고구려와 백제, 왜국, 말갈 등 ‘구한(九韓)’의 주변국을 대입시키는 점에서 자국 중심주의를 뚜렷이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도 삼국통일 과정에서 ‘나는 귀하고, 타국은 아래로 보는’ 국제질서를 본격적으로 현실화하고 내재화해나갔다. 670년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이 신라에 망명하자 683년까지의 한시적 기간이지만 그를 ‘고구려왕(소고구려국)’에 봉해 신라 밑에 고구려를 거느리는 형태의 국제질서를 구축했다. 왜국(倭國) 등에 대한 외교사절에 소고구려국을 대동하고 나서 신라의 우위성을 대외에 과시하기도 했다.
왜국(倭國)에서는 7세기 전반에 불교에 기반을 둔 자국 중심 의식이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백제 공인들이 만든 수미산석(須彌山石)에 잘 나타난다. 수미산석은 아스카데라(飛鳥寺) 서쪽 광장에 설치한 조형물로 에조(蝦夷, 도호쿠 지방 및 홋카이도 지역에 살던 변경 거주 집단에 대한 비칭), 남도인(南島人)에 비해 중심지로서의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에조’로 불린 북부지방 아이누족은 중세기까지 대단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특히 ‘야만스러운’이란 뜻의 일본 고어인 ‘에비스’ 등에서 나온 에조는 야만인을 인간이 아닌 동물에 빗대 표현하는 중국식 용법을 차용해 ‘새우’를 의미하는 ‘하(蝦)’ 자를 빌어 표기했다.
일본에서도 7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화사상을 받아들여 주변 집단을 이적(夷狄)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자리 잡았다. 일본 열도 주변에 있던 에조(蝦夷)를 북적(北狄)으로, 사쓰마(薩摩) 서쪽 섬들과 류큐 등 남도(南島)를 남만(南蠻)으로, 하야토(準人)를 서융(西戎)으로 규정했다. 밖으로는 당(唐)에 대해선 인국(隣國)으로 바라보고, 신라를 번국(蕃國)으로 간주하며, 신라에 대해 종주권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6세기 말, 쇼토쿠태자(聖德太子) 집권기에는 천황이라는 칭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중국의 천자에 견주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국내적으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소천하(小天下) 관념이 형성되어갔으며, 천황은 초월적 권력자로서 위상을 강화해나가며 독선적 천하관을 공고히 했다. 그 결과로 편찬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삼국이 잇따라 일본에 신하를 자처하고, 조(調)를 바치며 조공했다는 기록이 담겼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 기사와 같이, 삼국이 상대(上代)부터 일본의 종속국이었다는 황당무계한 신화도 역사적 사실처럼 기술됐다. 자연스레 일본은 한반도의 부용국(附庸國)을 어루만지는 상국(上國)의 모습을 보이거나, 조공국의 무례함을 꾸짖는 모습으로 일관하게 된다. 삼국이 일본에 보낸 물품은 모두 ‘조물(調物, みつきもの)’로 불렸고, 과장되게 선전됐다. 삼국통일 이후 일본 왕권은 신라를 ‘번(蕃)’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로 일본 내에서 ‘연출’했다. 일본 사료에서 일본을 방문한 신라 사신(新羅使)은 ‘번객(蕃客)’으로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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