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가격'이란 이름으로
종교 교리가 일상 지배…경제적 규제 초래
"개인 사리사욕은 불의" 모든 거래·가격 통제

공정한 가격 직접 정하려 한 英의회
빈민층에 중요한 석탄·양초 등 가격까지 규제
대중 지지 못받고 통제로 물가상승 부작용

"차익거래는 공정치 못한 행위"
아리스토텔레스 영향, 부당이득은 지탄 대상
실제 경제와 괴리된 이념, 현실의 삶 왜곡시켜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재위 기간 내내 흉년에 적용하는 각종 가격표를 발표했다. 806년에 선보인 법령에선 “곡물이나 와인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탐욕에 따라 비축하는 자, 예를 들어 1모디우스(곡물 계량 단위)의 곡물을 2데나리우스에 사서 4데나리우스, 6데나리우스 혹은 그 이상의 가격에 다시 팔 수 있을 때까지 보관하는 자는 부정한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중세 유럽에선 ‘공정가격’ ‘정의로운 가격’이라는 개념이 널리 힘을 얻으면서 얼마 안 되는 소규모 시장마저 옥좼다. 종교의 교리는 일상생활의 의무가 됐고, 각종 신학적 개념이 덧붙으면서 더 많은 경제적 규제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생활 수준의 향상에도 걸림돌이 됐다.

당시 유럽에서 가격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국가 정부뿐 아니라 길드와 지방자치단체까지도 가격통제를 정상적인 행위로 여겼다. 13세기 영국 관리들은 “개인의 사리사욕이 불의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종류의 거래를 규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1199년, 영국 정부는 와인의 도소매 가격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이 무모한 시도는 시행되기도 어려웠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와인 가격을 통제하고자 하는 열망은 수그러지지 않아 1330년 상인들에게 수입 및 기타 비용을 합친 ‘합리적 가격’에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경제 상황이 변하면서 와인 가격은 1330년 가격보다 훨씬 뛰었고, 정부는 시장에 패배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밀과 빵 가격 관리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헨리 3세는 다양한 무게의 빵에 대한 정확한 가격을 명시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실효성은 미미했다. 경제사학자 사이먼 리트먼은 “이 법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 차례 시행되도록 정부가 노력했으나 점차 사용되지 않고 사문화됐다”고 지적했다.

대출과 차입에 대한 규제도 이어졌다. 1364년 에드워드 3세는 런던시에서 고리대금 금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1390년에는 이 문제에 관한 의회법이 제정됐다. 법은 계속 강화됐다. 1487년에는 더욱 엄격한 법률 제정이 요구됐다. 하지만 이 또한 무용지물이었고, 이 법은 9년 후 폐지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공정가격 개념은 중세 유럽 사회의 가격규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키피디아 제공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공정가격 개념은 중세 유럽 사회의 가격규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키피디아 제공
1485년 이후 영국 의회는 가격을 상승시키는 관행에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식료품은 물론 다른 상품에 대해서도 공정한 가격을 직접 확정하려고 노력했다. 빈민 계층에게 매우 중요한 나무, 석탄, 동물성 지방, 양초 등의 가격이 규제 대상이 됐다. 이러한 규제는 대부분 효과가 없었기에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튜더 왕조의 시대는 후일 섣부른 가격통제가 물가상승을 촉발한 ‘대인플레이션의 시대’로 평가된다.

이처럼 중세 유럽 사회가 ‘공정한 가격’에 집요하게 매달린 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미친 영향이 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두 교환 당사자는 서로 동등한 가치를 교환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교환이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한 당사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되고 다른 당사자는 더 적게 가지므로 공정하지 못하니 정의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공정가격이란 판매 품목이 본래 가격과는 다른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는 개념이었다. 이는 경제나 금융이 아닌 윤리와 법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스콜라학자들을 중심으로 유럽 사회는 고대 사상의 화신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구매자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이용하고 구매자의 복지를 위협하는 거래, 지나치게 낮은 가격을 부과해 생산자와 판매자의 생존과 가족 부양에 해를 끼치는 행위는 부도덕한 행위로 지탄의 대상이 됐다. 공정가격은 신앙의 문제가 됐다.

특히 ‘차익거래(arbitrage)’에 관한 논쟁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컸다. 낮은 가격에 사서 높은 가격에 팔아 빠른 이익을 얻는 것은 태생적으로 정의로운 행위, 공정한 가격이라고 할 수 없었다. 원래 판매자는 물건을 너무 싸게 팔아 손해를 봤고, 매수자는 부당하게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 상품의 가격은 ‘공정한 가격’이어야 했다. 이런 ‘정의로운 가격’은 거래 당사자 양측이 어느 한쪽에게도 부당한 해를 끼치지 않고 합의할 수 있는 가치여야 했다. 중세 시대에 상행위의 근간인 탐욕은 ‘순간적인 것’을 탐하는 ‘신에 반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속 군주들에게 그들의 신민이 부당한 이득을 얻는 대규모 상거래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이는 구체적 사례로 들어가면 허점투성이 개념이었고, 현실성도 없었지만 서구 거래의 기초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 채권자들은 로마법의 원래 원칙에 따라 이자와 원금을 받을 때 전액 상환과 구매력 손실 없는 것을 기본 전제로 요구했다.

김동욱 
한경M&B 편집주간
김동욱 한경M&B 편집주간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격 관념은 서구의 지적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그레셤은 공정한 ‘좋은 돈(양화)’과 부정한 ‘나쁜 돈(악화)’이 대결하는 것으로 봤고, 존 로크와 아이작 뉴턴은 금과 은의 정당한 교환비를 고민했다. 그뿐 아니라 공정한 거래, 공정한 가격에 관한 생각은 울피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고대와 중세 사상가뿐 아니라 ‘교환’과 ‘가치’ 문제를 고심한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를 거쳐 현대의 경제학자 어빙 피셔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실제 경제와 괴리된 이념의 힘은 그렇게 두고두고 현실의 삶을 왜곡하고 질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