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등장한 2차 산업혁명 주인공
증기기관 이어 전기·화학으로 혁신 확산
신산업 분야 주도한 건 후발국가 독일

독일의 급성장에 뒤바뀐 판도
국내총생산서 프랑스 등 추월하고
철강·석탄 생산량, 패권국 영국 위협

학문 중심지로도 부상
독일어 '학문의 언어'로 입지 굳혀
미국 명문대서 '獨 유학파'가 주류
산업혁명은 단선적으로 한 차례에 걸쳐 일어나지 않았다. 분야에 따라 시기를 달리하며 비약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어졌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곳은 영국이었지만, 철강·전기·화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2차 산업혁명’은 독일이 주도했다.

프로이센이 유럽의 주요 경쟁국보다 빠르게 성장하게 된 것은 1850~186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30년대만 해도 프랑스의 국민총생산(GNP)은 1960년 미국 달러화로 환산할 때 86억 달러로 프로이센(72억 달러)을 앞섰지만 1880년엔 프랑스 174억 달러, 프로이센 200억 달러로 역전됐다.

1913년 프로이센의 GNP는 498억 달러로 프랑스(274억 달러)의 2배 가까이 됐다. 유럽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830년에는 프랑스가 21%로 프로이센(5%)의 4배나 됐지만, 1880년이 되면 프로이센은 20%로 프랑스(13%)를 크게 앞섰다. 1913년이 되면 프로이센은 40%로 프랑스(12%)의 4배 수준으로 처지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1860년에 비등하던 에너지 소비량도 1913년엔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3배 수준이 됐다.

주요 산업별로 살펴봐도 독일의 성장세가 가팔랐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5만 톤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뿐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 지형도는 급격히 변했다.
철도 차량 제작에 몰입 중인 19세기 독일 기술자들.   자료: 위키피디아
철도 차량 제작에 몰입 중인 19세기 독일 기술자들. 자료: 위키피디아
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독일의 철강 생산량은 1890년대만 하더라도 연간 410만 톤으로 영국(800만 톤)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1900년엔 630만 톤으로 영국(500만 톤)을 추월했다. 1910년대에는 독일(1360만 톤)이 오히려 영국(650만 톤)보다 2배나 많은 철을 생산했다. 1914년 독일의 강철 생산량 1760만 톤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생산량을 합친 양보다 많았다.

석탄 생산도 1890년 8900만 톤에서 1914년 2억7700만 톤으로 증가하면서 1위 산업 국가였던 영국(2억9200만 톤)에 육박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4700만 톤)와 프랑스(4000만 톤), 러시아(3600만 톤)는 경쟁 상대라고 부르기 무색할 정도였다.

전기, 광학, 화학 같은 20세기 경제를 특징짓는 주요 산업 분야를 개척한 것도 독일이었다. 대표적인 전기 관련 기업인 지멘스와 AEG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14만2000명을 고용했다. 전기산업 종사자는 1890년 1만7000명에서 1900년 6만6000명으로 급증했다. 1913년에는 종사자 수가 20만 명에 달했다. 1913년 독일의 전기 관련 상품은 세계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다.

화학 분야에선 1913년 바이엘과 획스트, BASF 등 독일 8개 화학회사가 세계 공업용 염료의 90%를 생산했고, 생산 제품의 80%를 수출했다. 전 세계 합성연료 생산량 16만 톤 중에서 14만 톤을 독일 회사가 만들어냈다. 같은 해 전 세계 화학제품 생산의 24%가 독일 몫이었다.

독일의 수출도 1890년과 1913년 사이에 3배나 증가하면서 원조 수출 대국 영국에 육박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세계 제조업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14.8%로 영국(13.6%)보다 컸고, 프랑스(6.1%)의 2.5배나 됐다.

1851~1860년과 1881~1890년에 독일에서 연간 투자 총액은 최소 200% 늘었고, 1906~1910년 투자 비용은 독일 국내 총수입의 15.7%였다. 1847년 투자 비용이 국내 총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간신히 4%에 달한 점을 고려하면 60년 사이에 투자 비율 증가세가 4배로 늘어난 것이다.

독일 경제가 급부상하면서 독일어의 위상도 높아졌다. 학문 분야에서 과거 라틴어나 프랑스어가 하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공용어) 역할을 19세기 독일어가 이뤄냈다. 물리학과 화학, 지리학, 생물학, 법학, 철학, 역사학, 사회학 등에서 독일어는 오늘날의 영어와 같은 지위를 차지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전 세계 생물학 학술지에 실린 논문의 3분의 1이 독일어로 쓰였다. 1940년대까지 의학과 생물학에서 독일어를 읽지 못하면 최신 학문 동향을 쫓아가지 못했다. 1920년대 미국 학술지에서 높은 비율로 독일어 논문이 등장했다. 러시아와 일본 학술지도 해당 언어로 논문이 쓰여도 초록은 독일어로 요약된 경우가 많았다.

화학 분야에서도 독일어를 말하진 못해도 읽을 줄 아는 것이 기본 요건이 됐다. 1930년대까지 미국 대학에서 화학 교재는 독일어로 쓴 것을 사용했다. “학문의 세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독일어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말까지 등장했다. 자연스레 1910년대 노벨상 화학상을 받은 10명 중 5명이, 1920년대 수상자 8명 중 3명이 독일어권 출신이거나 독일 대학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영국의 생물학자 시어도어 사보리는 “과학 세계의 언어는 하이델베르크와 괴팅겐의 언어이기도 했다”는 평을 남겼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산업혁명의 '진짜 주역' 독일
1875년 미국에서 존스홉킨스 대학이 설립됐는데, 초대 총장 대니얼 길먼은 연구 중심의 학교로 만들며 독일 대학의 실험 및 세미나 수업 방법을 도입했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모델은 다른 대학에도 영향을 미쳐 클라크 대학과 시카고 대학이 이를 따랐다. 하버드대의 엘리어트 총장도 길먼의 모델을 적극 수용했다. 1800년대 미국인 1만여 명이 독일에서 공부했고, 하버드대·프린스턴대 등 미국 명문대 교수진은 대부분 독일 유학파로 채워졌다. 후발 주자 독일이 단기간에 이룬 성과는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