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전 전통경제 최고조 발전
사대부들 현악기 동호회·미식 모임 등
각종 분야 호사스러운 취미활동 즐겨

사치 심화되며 미인 기준도 '세분화'
경제 성장 힘입어 향락적 소비 확산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것으로 그려진 명말·청초의 이상적인 미인상. /대만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것으로 그려진 명말·청초의 이상적인 미인상. /대만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전통 시대 중국의 경제는 어느 수준까지 발전했을까. 명나라 말·청나라 초 변혁기 인물인 장대(張岱)의 삶을 통해 그 시절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명나라 말 만력(萬曆) 25년(1597년)에 태어나 청나라 초 강희(康熙) 23년(1684년)에 죽은 장대는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수필집인 <도암몽억(陶庵夢憶)>과 역사서 <석궤서(石匱書)>, <석궤서후집(石匱書後集)> 등을 썼다. 그가 쓴 책은 문학성이나 사상의 깊이보다는 당시 상류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에서 손꼽는 명문가의 장손으로 태어난 장대는 풍요로운 유년기를 보냈다. 처음에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차(茶)였다. 그는 차의 미묘한 맛을 구분했다. “1614년 여름 반죽암을 지나다가 계천의 샘물을 길어 맛을 보았다. 인의 톡 쏘는 쓴맛에 깜짝 놀랐다. 유심히 물 빛깔을 살펴보았는데, 마치 찬 서리가 내린 가을날 순백의 달빛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산을 휘감은 부드러운 안개가 소나무와 바위를 품고 있다가 막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샘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어떨까’ 하고 궁금해져서 실험을 거듭했다. 길어온 샘물을 사흘 동안 그대로 묵히면 돌의 비린내가 없어지며, 차의 향기가 더욱 진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혀를 입천장으로 밀면서 물을 입안에서 좌우로 굴리면 샘물의 오묘한 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차에 대한 취미가 식은 뒤엔 고금(古琴)이라는 현악기에 푹 빠졌다. 1616년 마음이 맞는 젊은 친척과 친구 6명을 모아 이 악기의 연주법을 함께 공부했다. 고금에 대한 관심이 시들자 이번엔 ‘완벽한 불빛’에 집착했다. ‘완벽한 등’을 만드는 장인을 찾아다닌 끝에 푸젠(福建)성의 불상 조각가가 만든 등을 거금 은 50냥을 주고 샀다. 곧이어 취미 목록에 투계가 추가되고 투계광들과 동호회를 결성했다. 그다음에는 배우들의 공놀이 묘기 경기인 축국을 관람하는 데 빠져들었다.

장대가 가장 애착을 가진 것은 민물 게 시식 동호회였다. 이 호사스러운 모임은 민물 게잡이 철인 음력 10월의 며칠 동안, 그것도 오후에만 만남이 이뤄졌다. 소금이나 식초를 사용하지 않아도 오미(五味)를 전부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 민물 게는 아주 특별하게 여겨졌다. 이 모임의 규칙은 회원 1인당 게 여섯 마리를 받아 각 부위, 즉 수분이 풍부한 기름 즙과 보라색의 긴 집게발, 반짝이는 작은 다리, 달콤하고 부드러운 살의 맛을 제대로 살려 요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삶은 게를 다시 데우면 미묘한 맛과 향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각 회원이 각자 맛을 보도록 그때그때 게를 한 마리씩만 조리했다.

그러나 고생을 모르고 살던 장대에게 조국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시련이 닥쳤다. 엄청난 재산을 모두 잃고 지방 사찰을 전전하며 목숨을 부지하던 그는 명나라의 멸망 원인을 담은 역사서를 저술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런 사치스러운 모습은 장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 말 이후 각종 분야에서 탐미주의가 확산했다. 만력 연간 사대부들의 연회에는 부드러운 육질의 고기를 얻기 위해 거위와 양을 산 채로 구워 살을 발라내는 ‘화적아(火炙鵝)’와 ‘활할양(活割羊)’이라는 요리가 유행했다. 신선한 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민물고기를 양식했고 얼음 창고에서 과일을 보관했다.

추상적 언어로 표현되던 미인에 대한 기준은 명나라 말에 구체적인 형태로 ‘표준화’됐다. 강남지역에서 유행한 ‘재주 있는 남성(才子)’과 ‘미모와 재예를 겸비한 여인(佳人)’과의 러브 스토리를 담은 애정소설 등을 통해 미인상이 구체화했다.

이들 ‘아름답고 재능있는 미인’의 전형은 장쑤(江蘇)·저장(浙江)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소설의 주 독자층이던 문인들은 미인의 자격과 요건을 구체적으로 세분화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말 쑤저우(蘇州) 출신으로 1640년대 주로 활동한 위영(衛泳)이란 인물은 <열옹편(悅容編)>이라는 글에서 미인이 갖춰야 할 행위와 표현, 장식, 거주지, 가구와 내부 장식 등을 자세히 규정지었다.

미인의 특성을 규정한 책은 줄을 이었다. 여수구(黎遂球)의 <화저십유(花底拾遺)>에선 미인의 전형적 행위와 분위기를 150개 항목으로 상세히 구분했다. 명대 말엽의 화류계 여인인 재기(才妓)들을 모델로 삼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미인의 자격을 언급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청초 서진(1659~1711)이라는 사람이 쓴 <미인보(美人譜)>에선 10가지 기준에 따라 시각적이고 구체적으로 미인을 묘사했다. 10가지 기준은 첫째 외모(一容), 둘째 분위기(二韻), 셋째 기예(三技), 넷째 취미 생활(四事), 다섯째 머무는 곳(五居), 여섯째 아름다운 배경(六侯), 일곱째 의상(七飾), 여덟째 장신구와 보조기구(八助), 아홉째 먹는 음식(九饌), 열째 태도(十趣)였다.

이 중 외모를 나타내는 부분에선 ‘매미 같은 머리’와 ‘살굿빛 입술’ ‘튼튼한 이빨’ ‘먼 산 같은 눈썹’ ‘연꽃 같은 얼굴’ ‘구름 같은 머리’ ‘새싹 같은 손가락’ 등이 미인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미인이 일구는 분위기에선 ‘주렴에 비친 그림자’나 ‘난간에 기대어 달을 기다림’ ‘떠나기 전에 뒤돌아 한번 흘끗 쳐다보기’ 등이 손꼽혔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향락에 빠졌던 명나라 상류층
명나라 말·청나라 초기의 소설가인 이어(1611~1680)가 쓴 <한정우기(閑情偶奇)>에선 희고 고운 피부와 눈썹 모양, 발 모양을 비롯해 손가락 모양, 팔뚝 굵기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눈에 대해서도 “눈이 고정돼 있고, 눈동자의 흑백이 분명한 눈이 아름다운 눈”이라고 설명했다. 장조라는 문인은 <십미요소인(十眉謠小引)>에서 미인의 머리 형태를 10가지 모범 사례로 분류해 설명했다. 방순은 <향련품조(香蓮品藻)>에서 전족의 형태를 다섯 가지 대분류와 18가지 소분류로 세분화해 묘사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전통 경제’가 최고조로 발전한 중국의 상류층은 손에 쥔 경제적 과실을 극단적인 향락이라는 형태로 소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