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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6~9세기 신라는 해군력이 막강했던 해양국가였죠…통일 후엔 중국·일본·동남아와 활발하게 무역했어요

    신라의 대외 교역은 532년 낙동강 중·하류의 가야국을 병합하고 왜와 외교를 튼 것을 계기로 바다로 방향을 바꿨다. 552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를 취한 뒤에는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히 전개됐다. 583년 중앙정부에 선부(船府)가 설치됐다. 선부의 책임자로는 병부(兵部)의 대감이 임명됐다. 이로부터 선부 설치가 군사적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신라는 바다로 향했다바다의 군사적 중요성은 통일 전쟁 과정에서 더욱 높아졌다. 통일의 중대 계기를 이룬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을 격파한 것은 당의 우수한 군선(軍船)이었다. 676년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당과의 전쟁은 바다와 연안을 주요 무대로 했다. 675년 9월 설인귀의 당군이 쳐들어 왔는데, 문훈 등이 맞아 싸워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치열한 해전이었다. 676년 11월에는 당과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사찬 시득이 병선을 거느리고 설인귀의 당군과 기벌포에서 싸웠는데, 대소 22회 전투에서 승리하고 4000명이나 머리를 벴다.6~9세기 신라는 해양국가통일 이후 678년 신라는 선부를 병부에서 독립시키고 별도로 관리를 뒀다. 관리의 지위는 최고 관부인 병부 및 조부(調府)와 동급이었으며, 장관급의 영(令) 1인에는 왕족이 임명됐다. 다시 벌어질지 모를 당과의 전쟁에 대비해 해군력을 부쩍 강화한 조치였다. 681년 통일 대업을 성취한 문무왕은 임종을 맞아서 동해의 호국룡(護國龍)이 되겠으니 자신을 화장해 바다에서 장사지내도록 명했다. 바다 건너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경계해서였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의 대왕암이 왕의 수중 무덤이다. 731년 일본의 병선 300척이 신라를 침입했는데, 신라가 이들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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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화랑세기는 메워진 경주 월성 ‘구지’를 기록, 삼국사기·삼국유사와 달라도 ‘가짜’라는 근거는 없죠”

    그에 맞서 이종욱 교수는 박창화가 필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본 어딘가에 있을 진서(眞書) 《화랑세기》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화랑도가 충절의 무사라는 이미지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것이며, 신라 귀족들의 성생활이 난잡하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후대의 윤리기준에 입각한 선입견일 뿐이라고 위서설을 비판했다.이종옥 교수의 진서설이 교수가 진서설의 근거로 제시한 여러 가지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경주 월성(月城)의 구지(溝池)다. 월성은 신라의 왕궁을 옹위한 성이다. 1980년대 후반 월성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월성에는 원래 그것을 둘러싼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는 여러 연못(池)과 그것을 잇는 도랑(溝)의 형태였음이 밝혀졌다. 구지는 8세기 이후 군사적 긴장이 사라짐에 따라 메워졌으며, 이후 1000년 이상 그것이 실재했음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는 월성의 벽 아래 그것이 설치됐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메워지기 이전의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역사 정보다.2002년 나는 별생각 없이 이 교수가 역주한 《필사본 화랑세기》를 읽었다. 나는 금방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 나오는 ‘노(奴)’, ‘비(婢)’, ‘천(賤)’ 글자의 용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내가 분석한 것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잠시 소개한 대로 삼국인에게 ‘노’라 함은 후대의 노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 내지 공동체 간의 정치군사적 신종관계를 대변했다. 예컨대 읍락의 지배층은 하층 성원을 ‘노’라고 불렀다. 백제왕은 고구려왕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을 ‘노객(奴客)’이라 칭했다. 이런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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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이 ‘미래의 왕’ 김춘추와 누이를 결혼시킨 일화…삼국사기·삼국유사·화랑세기 필사본 내용이 왜 다를까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 (후일의 무열왕)가 공차기를 하다가 유신이 춘추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가까운 자기 집으로 춘추를 데려가 큰 누이 보희에게 춘추의 옷끈을 꿰매라고 했다. 보희가 무슨 일이 있어 하지 못하고 작은 누이 문희가 대신했는데, 문희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춘추가 문희를 좋아해 혼인을 청했고 드디어 결혼했다. 아이를 낳으니 곧 후일의 문무왕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차이 이 이야기가 1280년경의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도입부는 같다. 유신이 보희에게 춘추의 옷을 꿰매라고 명하니 보희가 하찮은 일을 시킨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유신이 문희에게 명하니 문희가 따랐다. 이후 춘추와 문희가 사귀었는데 문희가 임신을 했다. 유신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다고 크게 성을 내며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소문을 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놀러 가기를 기다렸다가 유신이 뜰에다 장작을 쌓고 불을 붙여 연기를 피웠다. 여왕이 무슨 연기인지 좌우에 물어 전후 사정을 알게 됐다. 여왕이 춘추에게 “네 소행이니 빨리 가서 구하라”고 했다. 춘추가 왕명을 전하고 문희를 구한 다음 결혼을 했다.8세기 화랑세기 이야기《화랑세기(花郞世紀)》로 추정되는 원고가 있다. 이 원고에는 위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유신이 보희에게 춘추의 옷을 꿰매라고 시켰으나 병 때문에 할 수 없었다. 문희가 대신했는데, 유신이 자리를 피해줬다. 춘추와 문희가 사랑을 나눠 문희가 임신을 했다. 춘추에게는 보량이라는 아름다운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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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기 보급으로 9세기 한반도에 농업혁명…생산성 급증…12세기까지 인구 3배로 늘어

    논농사만이 아니었다. 밭농사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다. 쟁기의 보급이 그 원동력이었다. 삼국시대까지 쟁기의 보급은 제한적이었다. 쟁기가 출토된 유적의 수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고구려의 영역에 한정되고 있다. 통일신라기에 이르면 쟁기 유적은 그 수가 일층 많아지고 그 분포도 전국적으로 광역화한다. 쟁기의 보급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쟁기의 보습에 볏이 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개 9세기부터다. 볏은 쟁기로 가는 흙을 한 방향으로 몰아 왕복 쟁기질로 높낮이가 뚜렷한 이랑과 고랑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콩·밀의 건조작물과 보리의 습윤작물이 같은 포장에서 재배될 수 있는 농사의 큰 진전을 보게 됐다.앞서 소개한 대로 전쟁이 끝나자 문무대왕은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쟁기가 대량으로 제작돼 널리 보급됐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무기를 녹였다고 했으니 쟁기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소유였다. 쟁기는 신라의 지방행정 체제를 통해 농촌 구석구석으로 보급되고 관리됐다. 쟁기 유물이 대개 산성(山城)이나 현성(縣城)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부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신라 국왕은 전국의 토지만이 아니라 주요 철제 농구를 지배하고 통제했다. 그와 더불어 국왕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왕토주의가 점점 강화됐음이 8~9세기의 역사적 추세였다.인구의 증가정보가 빈약한 시대를 두고 지나치게 상상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괴이한 환상이 널리 자리를 잡는다. 적절히 통제된 상상은 권장돼야 한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3세기께 한반도 인구는 110만명 내외였다. 그 정도의 인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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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세기 통일신라때 ‘석등기’ 통해 토지가격 알 수 있죠…당시 귀족·관료는 토지 소유로 조세 거둘 권리 가져

    전남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높이 3.5m의 석등이 있다(보물111호). ‘개선사(開仙寺)의 석등’이라 한다. 개선사란 절이 언제 세워지고 언제 허물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반이 석등을 찾았을 때, 석등은 물이 가득한 논에 잠겨 있었다. 전남 개선사 석등의 기록 사진 자료는 1933년의 것인데 여전히 중대(中臺) 이하가 논 가운데 묻힌 상태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쇠락한 나머지 소중한 문화유산이 방치되고 있는 스산한 풍경이다. 등을 밝힌 불집은 여덟 기둥으로 둘러싸였다. 그 기둥의 표면에 개선사가 석보평(石保坪)의 논을 구입하게 된 전후 사정이 새겨져 있다. 이하 ‘석등기(石燈記)’라 부른다. 석보평은 조선시대엔 석보리라 했으며, 현재는 화순군 이서면 도석리다. 태반이 동복호에 수몰됐다.석등기를 대강 소개한다. 868년 2월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이들의 큰딸(훗날의 진성여왕)이 발원해 두 등을 걸었다. 그러자 귀족 김중용이 기름값으로 벼 300석을 시주했다. 그것으로 스님 영판이 석등을 세웠다. 891년 스님 입운이 진성여왕이 하사한 벼 100석으로 경주 오호비소리에 사는 공서와 준휴로부터 석보평에 있는 대업(大業) 명의의 물가 논 4결(結)과 구석 논 10결을 정상의 절차를 밟아 구입했다.(이하 생략)석등기는 현재 전하는 최고(最古)의 매전(買田) 기록이다. 거기에 9세기 신라의 지배체제 내지 토지제도의 실상을 전하는 정보가 담겨 있다. 그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1100년을 내려온 비밀이었다.토지매입 가격이 자세히한 가지 비밀은 매매된 토지의 실체에 관한 것이다. 개선사가 14결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벼 100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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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 토지는 왕실의 공전과 귀족의 사전으로 나뉘었죠…개인간 토지 매매가 가능해진 것은 15세기 이후에요

    이전에 지적한 대로 삼국의 발전과 상호 충돌 과정에서 대왕(大王)의 권력이 성장했다.그에 따라 전국의 토지와 자원을 국왕 소유로 간주하는 왕토주의(王土主義)라는 정치이념이 성숙했다. 722년의 정전제 시행은 그 정치이념을 전제하고 그에 추동됐다. 종래왕토주의는 비실체적인 관념이거나 법적 픽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널리 수용됐다.대부분의 연구자는 토지가 귀족과 관료의 사적 재산임을 보이는 몇 가지 사례에 근거해 그렇게 판단했다. 그들은 그 사적 재산의 실체와 특질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조성되고 관리됐는지, 무엇을 수취했는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신라의 토지제도에서 귀족의 수조권(收租權)과 농민의 경작권(耕作權)이 한 토지에서 중층적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에 주의를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토지가 귀족의 사적 재산으로 처분된 것은 그런 구조를 전제해서였다.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토지가 상업적이고 비인격적인 재산으로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었다.공전과 사전의 대립과 통합왕토주의의 실태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사건이 잘 알려져있다. 798년 원성왕이 죽었다. 신라 왕실은 왕도 주변의 곡사라는 절의 터와 주변의 구릉을 능역으로 수용하면서 그 일대를 소유한 어느 귀족에게 2000석의 벼를 지급했다. 그러면서 “비록 왕토라고 하나 공전이 아니다”고 했다. 920년께 지증대사라는 귀족 출신 고승이 이천에 있는 자신의 농장을 문경 봉암사에 기증했다. 그를 위해 지증은 요로의 지인을 통해 헌강왕의 허락을 구했는데, “비록 나의 토지라고 하나 왕토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헌강왕은 지증의 청을 들어주면서 이천에 관리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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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통일 후 정전제 도입해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 고려도 계승…통일신라와 고려는 '동질적인 시대'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국 문명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대 계기였다. 687년 신라는 9주와 5소경을 설치했다. 그 아래에 8세기 중엽까지 117개 군을, 군 아래에는 293개 현을 설치했다. 이로써 읍락과 국의 누층적(累層的) 연맹에서 출발한 신라의 국가체제가 중앙집권의 관료제 형태로 일신했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정전제인구와 토지에 대한 집권적 지배체제도 강화됐다. 722년 신라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했다”고 간략히 전할 뿐, 정전이 무엇인지, 어떻게 지급했는지 등에 관해선 아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이하 당시 시행된 토지제도를 정전제(丁田制)라고 부른다.고려 태조도 ‘정’과 ‘정호’ 사용204년이 지난 926년은 고려와 후백제가 통일전쟁을 벌이던 어지러운 시기였다. 벽진의 성주 이총언이 고려 태조에게 귀순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해 이총언을 벽진의 장군으로 임명한 다음, 벽진의 정호(丁戶)에 더해 이웃 고을의 229개 정호를 추가로 하사했다. 9년 뒤에는 신라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했다. 태조가 경순왕을 예우하기를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에 임명하고 1000정(丁)의 토지를 지급했다. 이 두 비슷한 사건에서 언급되는 정호와 정이 722년의 정전제에 그 기원이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호든 정이든 그것은 공통으로 일정 규모의 노동과 토지를 결합한 생산의 기초 단위이자 국가 지배의 기초 단위를 말했다.뒤이은 고려시대에도 정호의 실체는 마찬가지였다. 그 점에서 8~9세기 통일신라와 10~14세기 고려는 동질의 역사 시대다. 필자는 정호가 사회 구성의 기초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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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을 생산·수출하고 어물 등과 거래했죠…토지·자원은 왕의 소유…왕토주의 생겨나

    4개 촌이 생산한 비단은 연간 200필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촌민들은 그 상당 부분을 신라에 공납한 다음 나머지를 소금, 어물, 토기, 철기를 들고 촌을 찾아오는 상인에게 판매했다. 비단은 신라의 대외무역에서 인기 있는 수출품이었다.신라의 대외 무역필자는 4개 촌의 무성한 뽕나무 숲에서 그런 국제적 물류를 상상한다. 그 생태환경은 인구 과잉으로 산업이 곡작(穀作) 일변으로 찌그러진 15세기 이후와는 크게 구분되는 초기 농경사회의 그것이었다.7세기 신라는 백성을 어떤 제도적 용어로 불렀을까. 중국에서는 호(戶)라고 했다. 신라도 그랬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장적 어디에도 호라는 글자는 단 한 차례도 보이지 않는다. 장적에서 확인되는 농가의 보통명사는 연(烟)이다. 중국의 호에 해당하는 것을 두고서는 공연이라 했다. 공연은 장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장적의 역사적 개성을 다른 무엇보다 뚜렷하게 상징하는 말이다. 공(孔)은 ‘크다’ 또는 ‘모으다’는 뜻이다. 곧 여러 개의 연이 모여 크게 된 것이 공연이었다. 어느 공연은 일부 연이 다른 곳으로 떠나자 해체되고 말았는데, 다른 어느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공연이란 몇 개의 연이 분리의 가능성을 전제한 위에 무언가의 계기나 필요에 따라 결속한 상태, 곧 세대복합체를 말했다. 그 무언가의 계기가 생산과 공납을 위한 공동 노동임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그대로다.중국은 호, 장적에는 연공연에는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 중상(中上), 중중(中中), 중하(中下), 하상(下上), 하중(下中), 하하(下下)의 9개 등급이 있었다. 대개 인적 구성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등차로 구분한 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