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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들어 양반·상민으로 ‘반상’ 신분제 확립, 상민은 군역 의무…지방은 품관·향리가 지배세력
조선왕조의 국가체제가 정비된 1460년대를 전후해 농촌사회에는 양반이란 새로운 지배 신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반은 원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관료를 말했다. 고려의 양반은 국인으로서 개경에 집결한 지배공동체의 중심을 이뤘다. 농촌에는 양반이 없었다. 고려 말기에 개경의 양반은 경기도와 충청도로 내려가 토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설치했다.그들의 압력에 밀려 옛 지배세력인 토성(土姓)은 유망(流亡)했다. 그렇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에선 토성이 건재했다. 남부지방의 토성은 14세기 후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맞아 군공을 세우거나 여러 경로로 하급 군직이나 잡직을 취득해 개경으로 진출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에 더욱 활발했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많은 양반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했다. 그렇게 출현한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품관(品官)이라 했다. 중앙군의 해체 조선왕조는 농촌 품관에게 5∼10결의 군인전을 지급했다. 그 보답으로 품관은 1년에 3개월씩 한성으로 올라와 중앙군으로 복무했다. 갑사(甲士), 별시위(別侍衛), 친군위(親軍衛) 등이었다. 일정 기간의 복무를 마치면 관료로 출세하는 기회도 제공됐다.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한 농촌 품관이 원래 지녔던 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이어졌다. 15세기 후반 이래 다른 과전(科田)과 마찬가지로 군인전은 더 이상 지급되지 않거나 축소됐다. 세조가 정비한 농민군 중심의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중앙군의 위상은 격하됐다. 품관에게 요구된 정기적인 상경(上京)의 책무도 해제됐다. 한성은 고려의 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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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무역 봉쇄…개간으로 토지 늘리며 농업국가로, 여전히 밭농사 중심…최초의 농업서 펴내 생산성 높여
1452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전국 지역별 주요 생산물과 그것을 규정한 생태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최초의 지리서다. 전국 8도의 토지는 총 171만 결에 달했다. 1결은 대략 2헥타르(㏊)다. 고려 말기인 1389년에는 평안도와 함길도를 제외한 6도의 통계인데 총 79만 결이었다. 두 도를 합하면 108만 결로 추산된다. 이후 1405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 8도의 토지는 총 126만 결이었다.경지와 작목의 구성 이로부터 14세기 말과 15세기 전반에 걸쳐 토지의 개간이 무척이나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고려말에 성행한 민간의 육로와 해상을 통한 대중(對中) 무역을 일체 봉쇄했다. 그 대신 유교적 기풍의 질박한 농본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15세기 전반의 대규모 개간은 그런 문명사적 전환을 상징했다. 농업의 중심은 여전히 밭농사였다. 총 171만 결 가운데 밭이 123만여 결로 72%, 논이 47만여 결로 28%였다. 지역별 차이가 있어 경기·충청·경상·전라의 남부지방에서 논 비중은 37~46%인 반면, 황해·강원·평안·함길의 북부지방에서는 10%대에 불과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재배된 작목을 순위대로 열거하면 기장, 콩, 벼, 보리, 피였다. 이를 가리켜 오곡이라 했다. 섬유류 작물로서 지배적인 것은 뽕나무와 마였다. 1360년대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서 종자를 반입해 보급한 목면(木棉)의 재배는 전국 334개 군현에서 42개 군현에 불과했다. 15세기까지 의류의 주종은 견포와 마포였으며, 이를 위한 뽕나무와 마의 재배가 전국 대부분 군현에서 성하게 이뤄졌다. 뽕나무 재배가 가장 성한 지역은 황해도였다. 특히 서흥, 봉산, 장련의 3개 군은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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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과 귀족토지를 몰수해 과전법으로 재분배…15세기 후반부터 토지를 백성의 사유재산으로 인정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세력은 1390년 고려 왕실과 귀족의 토지를 몰수해 재분배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로써 고려왕조를 지탱한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했으며, 뒤이어 고려왕조도 멸망했다. 개혁 대상이 된 귀족·관료의 토지는 13세기 중엽부터 지급된 수조지로 녹과전(祿科田)과 별사전(別賜田)이었다.토지개혁 단행한 이성계 연후에 이성계 세력은 과전법(科田法)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에 수조지를 다시 분배했다. 과전법에서 전국 토지는 신라·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국전(國田), 곧 나라의 땅으로 간주됐다. 국전은 공전과 사전의 두 범주로 구분됐다. 공전은 중앙과 지방의 정부기관이 직접 조세를 수취하는 토지다. 사전은 관료·공신·군인·사원에게 수확량의 10분의 1을 조세로 수취할 권리를 지급한 토지다. 관료 등은 1~18과로 지위가 구분돼 5~150결의 사전을 받았다. 공·사전을 경작한 농민은 전객(佃客)의 지위로 규정됐다. 나라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이라는 뜻이다. 이전의 고려왕조는 전국 농민을 전호(佃戶)의 지위로 규정했다. 조선왕조는 전객으로 바꿔 불렀는데 그 뜻은 마찬가지다. 반면에 사전을 받은 관료 등을 가리켜서는 전주(田主)라고 했다. 토지의 법률적 소유자는 어디까지나 국가이거나 그로부터 수조권을 할양받은 지배세력이었다. 그렇다고 전객 농민의 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는 전주가 전객 경지를 함부로 빼앗거나 10분의 1 이상의 조세를 수취하는 것을 금했다. 전주가 전객 경지를 빼앗으면 그 정도에 따라 20~80대의 태형에 처했다. 농민은 비록 전객으로 규정됐지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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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했던 ‘하늘 제사’ 폐지하고 바닷길도 포기…조선은 중국의 책봉받고 조공하는 ‘제후국’이었죠
조선이란 국호는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유래했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고대 중국의 성인 기자를 계승한다는 도통론을 새로운 왕조의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면서 내건 명분은 “작은 자가 큰 자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대주의의 의리였다.조선 국호의 유래 조선왕조가 스스로를 중화세계의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국가체제를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재편하는 일은 세종에 의해 완수됐다. 세종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폐지했다. 고려왕조는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함으로써 하늘 아래 자존하는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조선왕조는 하늘과의 직접적 교섭을 포기했다. 조선왕조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그에 조공하는 제후국으로서 이상적인 모델을 이뤘다. 고려와 대조할 때 조선왕조의 국례(國禮)가 보이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차이는 예의 주체가 넓게 사회화 또는 지방화했다는 점이다. 고려에서 예의 주체는 중앙정부와 국인에 한정됐다. 지방과 향인은 예의 주체가 아니었다. 군사국가답게 고려는 흉례(凶禮)를 제정하지 않았다. 군왕과 부모의 죽음을 맞아 2년간이나 길게 상복을 입어서는 군사에 충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흉례는 약식으로 치러졌다. 대조적으로 조선에서 지방은 중앙과 마찬가지로 예의 주체를 이뤘다. 농촌의 사대부와 서인은 각종 국례의 거행에 신분별 격식을 갖춰 참여했다. 나아가 개별 가문의 가례가 국례의 일환으로 승격했다. 조선왕조는 중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해 농촌의 서인에까지 이르는 예의 국제질서로 자신의 국가체제를 순화시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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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군사국가…조선은 관료제로 지배한 영토국가, 사유재산·농촌시장 등장…현대 한국인 원형 나타났죠
새로운 시대에서 사회는 지배와 예속의 신분질서로 분열했다. 토지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성립했으며, 소규모 가족경영이 발달했다. 신분으로 갈라진 사회는 유교의 이념으로 통합됐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보다 나은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 몸부림의 과정에서 현대 한국인의 원형이 빚어졌다. 인구는 1392년 555만 명에서 1810년 1838만 명으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그에 상응해 경지가 확충되고 이용이 심화했다. 농촌시장도 성립했다. 조선 5세기에 걸쳐 경제는 세기에 따라 기복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성장했다. 1인당 소득수준이 개선됐는지는 의심스러운 ‘맬서스의 시대’였다. 이씨 왕가의 내력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에 만주 대부분은 웃치긴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이다. 웃치긴의 판도에는 다수의 고려인이 여진족과 섞여 살았다. 이성계의 가문도 그러했다. 1255년 이성계의 고조 이안사는 웃치긴으로부터 다루가치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이후 동 직위는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계승됐다. 이 가문이 고려왕조에 속하는 것은 1359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토를 수복할 때 그 지역의 이자춘이 호응해 큰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는 고려의 관직을 부여받았다. 이후 이성계는 고려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권력은 고려의 정규 중앙군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이성계의 친병 가별초군(家別抄軍)은 몽골식 기마전투와 거친 산악지대에 잘 훈련된 여진족을 핵심 전력으로 했다. 1388년 요동을 장악해 온 몽골 세력이 신흥 명(明) 제국에 항복했다. 고려와 국경을 맞댄 명은 이전의 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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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고려인구, 경제발전으로 12세기보다 2배 증가…지방 지배세력도 교체…조선 '역성혁명'으로 이어졌죠
팍스 몽골리카의 번성한 국제 교류는 고려의 경제 발전을 자극했다.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했다. 12세기 인구는 250만~300만 명이었다. 14세기 말의 인구는 대략 600만 명이었다. 13세기는 대전란의 시기이므로 인구 증가는 주로 14세기의 일이었다. 짧은 기간에 인구가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은 14세기가 경제적으로 일대 고양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농서 발간과 농장의 개간인구 증가는 농업의 발전을 촉구했다.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연작농법이 정착했다. 토지 연작을 위해서는 지력을 보충하는 비료의 투여가 필수적이었다. 농사는 보다 과학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1372년 원의 농서 <농상집요(農桑輯要)>가 간행된 것은 그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비록 수입 농서지만 한국사에서 최초로 발간된 농서였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는 토지의 활발한 개간을 불렀다. 관련해서는 안씨가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안향(1243~1306)의 손자 안목(?~1360)은 개경 부근 파주의 서쪽 들을 개간했다. 안목의 손자 안원(1346~1411)에 이르러 개간지 규모는 수만 결에 달하고 경작 노비는 수백 호나 됐다. 안씨가의 농장은 수조지 녹과전으로 이뤄진 권문세족의 농장과 달랐다. 그것은 농장주의 개인적 소유였다. 농장을 경작한 것은 노비들이었다. 노비노동에 기초한 새로운 생산양식(生産樣式)이었다. 그 점에서 안씨가의 농장은 조선왕조 15~16세기 농촌에서 일반화하는 양반가 농장의 선구를 이뤘다. 지방세력의 이동 13~14세기에 걸쳐 군현의 지배세력인 호장(戶長)을 위시한 토성(土姓) 집단이 해체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다. 몽골과의 전쟁에 따른 농촌의 황폐, 새로운 토지제도로서 녹과전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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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는 귀족들의 농민 수탈이 심해졌다고 썼지만 농업생산력과 농민 권리 커져 조세율은 크게 낮아졌죠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의 사회 구성에 큰 변화가 일었다.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하자 조세의 수취가 어려워졌다. 귀족·관료에 대한 녹봉 지급이 줄어 그들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1257년 그들에게 수조지(收租地)를 지급하는 제도가 부활했다. 1075년에 시행된 녹봉제는 182년 만에 폐지됐다.‘고려사’의 의도다시 지급된 수조지를 가리켜서는 녹과전(祿科田)이라 했다. 녹과전의 설정은 경기도에 한했다. 왕족과 공신에게도 수조지가 지급됐는데, 별사전(別賜田)이라 했다. 별사전은 경기도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설치됐다.녹과전 규모는 10∼12세기 전시과(田柴科)에서의 사전(私田)보다 훨씬 컸다. 예컨대 제1과 중서령(中書令)에게 지급된 사전은 100결임에 비해 녹과전은 300결이나 됐다. 특히 별사전의 규모가 커서 산천을 경계로 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 같은 13∼14세기의 토지제도를 두고 후대의 <고려사>는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귀족의 농장에 편입된 농민들은 수탈이 가중됨에 따라 점점 고달파졌다. 농장의 팽창은 정부 재정을 압박했으며, 이는 각종 잡세의 신설을 유발해 농촌 경제를 압박했다. 농민들은 처자를 팔거나 사방으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 같은 <고려사> 논조에는 조선 왕조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10분의 1 수조율의 성립이전에 소개한 대로 고려 왕조의 수조율은 공전과 사전에 따라 달랐다. 공전은 4분의 1, 사전은 2분의 1이었다. 이런 차이는 고려 왕조의 집권적 지배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점차 해소됐다. 12세기 초 고려 왕조는 공전과 사전의 농민을 전호의 지위로 일괄 규정한 다음 사전을 개간한 농민에게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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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몽골이 세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민간무역 번성, 新 지식인도 배출…조선을 열 신흥세력 잉태됐죠
1323년 남방산 향목(香木)과 2만 점 이상의 자기 및 28t의 동전을 싣고 중국 영 파를 떠나 일본으로 가던 200t 규모의 무역선이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 다. 1976년 우연히 발굴된 이 무역선은 대몽골 울루스의 질서에서 번성했던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전남 신안 보물선2만 점 이상의 자기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고려청자도 포함됐다. 고려 왕실만 그 번성한 동아시아 해상 교역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 상인도 참가했는데, 그들의 몫은 14세기 말까지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14세기 전반 <노걸대(老乞大)>라는 어학 교습서에 의하면 고려 상인들은 모시와 인삼을 말에 싣고 육로로 요동을 거쳐 원의 대도로 갔다. 대도에는 그들의 친척이 있어서 물화를 판매했다. 상인들은 그 대금으로 산동의 제령부로 내려와 비단, 바늘, 화장품, 장신구 등의 고급 물화를 구입해 배편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관인무역허가장을 지참했는데, 이외에 상인 자격이나 수출입 품목의 종류·수량에 특별한 제약이 있던 것 같지는 않다.14세기 중후반 원명(元明) 교체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민간 무역은 더욱 번성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모시였다. 권세가들은 그들의 농장에 모시를 재배했으며, 주변 사원으로 수공업자와 노비를 모아 모시 천을 대량 직조했다. 고려 상인에 관한 <박통사(朴通事)>란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1만 필의 모시를 싣고 중국에 입항하는 고려 상선이 있었다. 고려왕조는 상선이 직접 중국으로 출항하는 것을 금했다. 그 금령이 14세기 중후반에 사실상 해제된 상태였다. 민간 무역의 번성으로 대도의 외항인 통주 관내 완평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마을이 생겨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