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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국가는 개별공동체가 못하는 공공기능 수행하죠…삼국은 흉년때는 비축한 곡식 풀어 백성 구제했어요

    국가는 지배세력의 수탈을 위한 도구만이 아니다. 국가는 개별 공동체로서는 불가능한 공공 기능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창출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가는 산적 떼와 다를 바 없으며 결코 영속할 수 없다. 삼국은 논밭을 개간하고, 방조제를 쌓고, 저수지를 파고, 철제 농구를 보급하고, 곡식을 비축해 흉년에 대비했다.벽골제는 방조제《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 후 33년 백제의 다루왕(多婁王)은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게 했다. 그대로 믿기는 곤란한 이른 시기에 관한 기록이지만,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공공 기능으로서 권농(勸農)을 중시한 삼국인의 관념을 대변하고 있다.331년 김제에 벽골제가 세워졌다. 《삼국사기》는 신라 흘해왕(訖解王)이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당시 김제 일원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필자는 마한 55국의 하나인 벽비리국이 아닐까 짐작한다. 김제 일원은 표고가 해수면과 거의 동일한, 한반도에서 가장 낮은 연안 평탄지이다. 벽골제가 큰 저수지라는 통념은 후대에 잘못 형성된 것이다. 벽골제는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로 세워졌다. 502년 신라의 지증왕(智證王)은 처음으로 쟁기갈이를 보급했다. 531년 신라의 법흥왕(法興王)은 전국적으로 제방을 수리하라는 영을 내렸다. 536년에는 경북 영천에 청천제라는 저수지를 축조한 다음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따르면 축조에 동원된 사람이 7000명에 달했다.고구려는 진대법 실시삼국은 큰 흉년이 들면 창고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 기민을 구제했다.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사냥을 가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흉년에 품을 팔 데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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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의 중심은 밭농사…쌀은 지배계층의 주식이었죠…성인 남성 10명으로 된 호(戶)를 기준으로 세금 물렸죠

    4~7세기의 논 유적은 지금까지 울산, 창원, 진주, 대구, 부여, 화성 등 도합 10여 곳에서 발굴됐다. 한 곳의 예외가 있지만, 논 한 구획의 면적은 대개 99㎡(30평) 안팎으로 작은 규모다. 논의 위치는 구릉의 완만한 하단부이며, 관개는 구릉을 흘러내리는 소량의 물을 이용하는 자연 방식이었다. 논과 더불어 수로의 유적도 발굴됐는데, 취수(取水)시설이 없어 배수로로 보인다.인공관개는 없었다삼국시대의 논농사는 아직 저수지나 보를 통한 인공관개와는 무관했다. 자연관개이기 때문에 논 면적은 클 수 없었고, 혼자서도 조성·관리할 수 있는 정도였다. 논갈이 도구는 삽이나 괭이 같은 수경구(手耕具)였으며, 소를 이용한 쟁기갈이는 아직 보급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논은 쟁기를 들일 만큼 넓지 않았다.밭 유적의 수는 논보다 많다. 관개의 제약이 크지 않기 때문에 단위 구획이 논보다 넓었다. 앞서 미사리의 밭 유적을 소개했다. 발굴된 면적만 해도 9900㎡(3000평)인데, 원래는 그보다 훨씬 컸다고 짐작된다. 이랑과 고랑의 폭이 각각 1m를 넘어 토지 이용은 매우 조방(粗放)적이었다. 유적에서 쟁기갈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밭갈이는 호미 등의 수경구를 이용해 흙을 긁어내는 방식이었으며, 노동의 주체는 10개 연(烟)이 결합한 세대복합체의 집단노동이었다.하층민 주식은 조와 수수인골에 대한 안정동위원소 분석은 삼국시대의 주요 작물이 벼, 맥류, 두류 등 C3계 식료였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런데 논 유적의 상태로부터 농업의 중심이 밭농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논농사 수준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인골 분석은 여성이 남성보다 C3계 식료를 더 많이 섭취했음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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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지방에 중앙관료 파견…신라는 150년 늦은 6세기 이후 국가단계로 진입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한성(지금의 서울)을 함락하고 백제왕을 참수했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백제는 웅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후 백제는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한 동성왕(東城王)에 의해 재건됐다. 백제는 남조의 제(齊)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으며 양(梁)으로부터 불교·미술·서예·건축 방면의 선진 문물을 광범하게 수용했다.5세기 후반 고령, 합천 등 영남 서남부를 무대로 대가야(大伽倻)가 흥기했다. 그 새로운 연맹체는 호남 동부의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 호남 서부의 영산강 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5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에 걸쳐 영산강 유역에서는 왜의 고유한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축조됐다. 전방후원분은 이 지역과 왜의 긴밀한 관계를 상징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전방후원분 유적은 모두 14기다. 6세기 중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으며, 그와 더불어 전방후원분의 축조도 중단됐다.로마의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중국인의 관찰에 의하면 2~3세기 한국인은 금과 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금은이 부장품으로 출토되는 것은 4세기 이후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다. 4세기 중엽 신라는 조령과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개척했다. 4세기 말에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 하류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신라가 벌인 대외교역 범위와 내용에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바가 있었다. 4~6세기 신라의 거대 왕릉에서 발굴된 화려한 금세공품과 유리공예품은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건너온 로마 제품이거나 대륙을 건너온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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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과 함께 묻는 순장은 북방계 청동기문화, 고구려·신라·백제만 국가로 성장…가야는 좌절

    2004~2008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가운데 제15호 고분에서는 순장(殉葬)을 당한 4명의 유골이 나왔다. 2명은 남자, 2명은 여자였다. 순장의 추정 연도는 420~560년이다.창녕 고분과 순장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중 유골 상태가 온전한 인물의 생시를 복원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나이는 16세, 키는 154㎝,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는 소녀였다. 평평한 얼굴, 큰 광대뼈, 찢어진 눈매 등에서 현대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금동 귀고리를 하고 있어서 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소녀의 이 몇 개는 충치인데,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종아리뼈와 정강이뼈에는 충격이 반복해서 가해진 흔적이 있다. 이로부터 소녀는 주인 앞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었던 시종이었다고 짐작된다.4명의 순장자가 무엇을 섭취했는지는 인골에서 추출된 콜라겐에 대한 탄소 및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탄소 열량으로 쌀, 맥류, 두류, 견과류 등 C3계 식료를 주로 섭취했다. 제1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기장, 조, 피, 수수 등 C4계가 주요 식료였다. 이로부터 철기 보급과 함께 농사의 중심이 쌀, 맥류, 두류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단백질원과 관련해 2명의 남자는 주로 동물 단백질을, 2명의 여자는 주로 식물 단백질을 섭취했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유적에서 나온 인골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5~6세기까지도 남자는 수렵에 종사하고 농사는 주로 여자가 담당한 초기 농경사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지나친 억측일까.신라는 502년 순장 금지순장은 북방계 청동기 문화에 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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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로 성장하는 사로국은 6개 읍락이 결합한 것…2~5세기 한반도는 국가 이전 단계인 '족장사회'였죠"

    읍락은 보다 상위의 국(國)이란 정치체에 의해 통합됐다. 읍락이든 국이든 모두 중국인에 의한 한자 표기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삼한인들이 어떻게 부르고 썼는지는 알 수 없다. 3세기 전반의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은 마한에 55개 국이, 진한에 12개 국이, 변한에 12개 국이 있다고 했다.국의 규모에도 큰 편차가 있었다. 대국은 1만 호를 넘기도 하고, 소국은 수천 호에 불과했다. 후일 신라로 성장하는 사로국(斯盧國)은 6개 읍락이 결합된 것으로 범역의 직경이 30∼40㎞에 달했다. 아주 작은 600∼700호에 불과한 국도 있었다. 이 경우 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읍락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국은 2∼3개 읍락의 결합이었다.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국읍(國邑)에는 신지(臣智)라고 불린 장이 있었다. 그 호칭은 국에 따라 다양했다.국의 성장을 알리는 고고학적 증거는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 각지에 조성된 고분군(古墳群)이다. 규모가 큰 고분은 직경이 17m, 높이가 9m에 달했다. 고분군으로서는 경북 대구·경산·성주, 경남 김해·양산, 전남 나주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나주의 고분군은 7개의 소집단으로 구분되고 있다. 집단 간에는 묘의 크기나 부장품의 위세에서 차이가 있는데, 상위의 세 집단은 그 세력이 비등했다. 이로부터 나주 일대에서는 7개 읍락이 하나의 국으로 결집하고, 상위의 세 읍락이 국의 신지를 경쟁적으로 배출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철의 유통읍락과 국이 성장한 요인으로는 우선 철기의 보급을 들 수 있다. 철 자원의 분포는 지역적으로 불균등했다. 이에 철기의 보급은 광역적 유통을 전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토기, 곡류, 어염, 과실, 비단, 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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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 권력이 출현한 것은 2세기 후반이었죠…개별 '취락'에서 '읍락'으로 사회통합이 광역화 됐죠"

    지금까지 호남에서 발굴된 3∼4세기의 취락은 모두 139곳이며, 그에 속한 주거지는 총 3749기다. 취락의 규모는 다양했다. 주거지가 100기를 넘는 큰 취락이 있는가 하면 10기가 못 되는 작은 취락도 있다. 취락의 표준 규모를 구하면 주거지 50∼70기다. 여기서는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50기라고 하자.앞서 당시에는 5명 안팎의 소규모 세대가 10개 정도 모여 하나의 세대복합체를 이뤘다고 했다. 그렇다면 취락은 세대복합체 5개가 모여 사는 공간으로 소속 인구는 250명 정도였다. 당시 한반도의 총인구는 얼마였을까. 앞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아우르는 낙랑군의 인구를 대략 40만 명이라 했다. 그 남쪽의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인구에 관해서는 14만∼15만 호(戶)라는 중국 측의 기록이 있다. 호당 인구를 5명으로 잡으면 70만∼75만 명이다. 그렇다면 3세기 한반도의 총인구는 110만 명 정도였다. 물론 어림수인데,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당시의 사회·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인구수를 전제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서울시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바다와 강의 물길이 닿는 지역을 중심으로 4400개 정도의 취락이 듬성듬성 이어져 있었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사람 구경을 하기 힘든 가운데 노루, 멧돼지, 호랑이 등이 서식하는 수풀이 울창했다. 사람들의 경제생활에서 어로, 수렵, 채취가 여전히 큰 비중을 지닌 생태 환경이었다.권력의 출현이 같은 환경에서 국가로 향하는 권력의 출현이 뚜렷해지는 것은 2세기 후반부터다. 고고학자들은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라는 새로운 묘제(墓制)에서 이 같은 역사적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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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세기 후반부터 주거지엔 '부뚜막' 많이 갖춰…철기시대엔 소가족이 개별세대 이뤘다는 뜻이죠

    부뚜막은 불을 들이는 아궁이, 솥걸이와 솥받침을 놓는 연소부, 연기가 빠지는 연도(煙道·구들)로 구성됐다. 시설 재료는 초기에는 돌과 점토였는데 점차 판석재로 고급화했다. 그에 따라 부뚜막의 난방 기능이 강화됐다. 부뚜막이 설치됨에 따라 반지하 움집의 벽체도 고급화했다. 연도가 벽체에 시설되면 벽체는 내화성을 지녀야 한다. 이에 반지하 움집의 하부 벽체가 종래의 목재에서 점토를 덧칠한 더 견고한 형태로 바뀌어갔다. 벽체 높이도 높아져 반지하 움집이 점차 지상가옥으로 이행하는 양상을 드러냈다.연(烟)전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인간들은 야외 노지에서 공동 취사를 했다. 공동 취사 단위는 대개 20명으로 소규모 가족 4개의 복합체였다. 곧 청동기시대에서 생활자료의 취득과 소비 단위로서 개별 세대(household)는 20명 안팎의 가족복합체였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부뚜막이 주거지 내에 설치됐음은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성립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414년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비에서는 이렇게 성립한 소규모 가족의 세대를 가리켜 연(烟)이라 불렀다. 반지하 움집의 부뚜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솟은 연도를 통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그런 백성 칭호가 고안됐다고 여겨진다. 551년 세워진 신라 단양적성비도 그의 백성을 가리켜 연이라 했다. 문명 역사시대의 상징으로 국가가 솟아오를 때 그 저변에는 소규모 가족이 공동 취사의 집단에서 분리돼 개별 취사의 세대로 자립하는 역사의 진보가 가로놓였다.세대복합체그렇지만 소규모 가족 세대로의 자립성은 아직 생산 과정에까지 미치진 못했다. 생산력 수준에 제약이 있어 생산 과정은 몇 개의 세대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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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 성립이 원시시대와 문명시대 구분해요…한반도는 중국 연나라 진출로 철기시대 열렸죠

    인류 역사는 국가의 성립을 전후해 원시 선사시대와 문명 역사시대로 구분된다. 한반도에서 문명 역사시대로의 이행은 기원전 4세기 이후 장기에 걸쳐 완만한 과정을 밟았다. 기원전 4세기 한반도에 새로운 형태의 토기와 동검을 제작하는 청동기 문화집단이 출현했다. 이 집단에 밀려 송국리형으로 대표되는 기존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2세기까지 소멸했다.흉노 계통 옛 조선은 청동기 집단기원전 4세기 이후 중국 대륙은 전국시대의 혼란에 접어들었다. 동세기 중엽 중국인은 요하(遼河) 하류의 동쪽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선(朝鮮)이란 정치체를 인지했다. 기원전 3세기 전반 조선은 요동으로 진출한 연(燕)과 충돌했다. 조선은 연에 밀려 한반도 청천강 이남의 평양으로 그 중심을 옮겼으며, 연은 그 이북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정치체 조선은 원래 스키타이, 오르도스, 요서의 넓은 지역을 무대로 하는 흉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화집단이었다. 이 같은 정치적 변화와 같은 기간 벌어진 청동기 문화집단의 단절적 교체는 밀접한 상관을 지녔을 터다.철기시대와 문자생활 시작연의 서북 진출과 더불어 한반도에 철기시대의 문이 열렸다. 평북 영변군 세죽리 유적에서는 도끼, 낫, 칼 등 철제 농공구가 대량 출토됐다. 이후 철기 문화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동부로 확산했다. 중부 이남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강한 저항세를 보였다. 기원전 2세기 말 연이 망하자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망명해 왕위를 찬탈했다. 조선의 준왕(準王)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마한으로 내려가 왕이 됐다. 위만조선의 성립은 중국 철기 문화의 확산을 자극했다. 기원전 108년 한(漢)은 위만조선을 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