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이자놀이' 금지했던 기독교
돈에서 돈을 창조하는 것도 '신의 일'
중세 교회, 급전 필요한 사람 많아지자
"가족 아니라면 대출 가능" 규제 완화
'종교개혁 지도자' 칼뱅은 한술 더 떠
"성경서 금지 안 해…이자 맘껏 받아라"
나는 은행에 예금이 있다. 같이 사는 여자는 은행에 대출이 있다. 요즘 같은 금리 인상기에는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한다. 받는 이자와 내는 이자 사이에 은행의 수익이 있다. 내가 직접 대출해주면 은행의 수익만큼 절약할 수 있겠지만 회수 가능성이 매우 낮은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수는 없다. 그러나 금리 인상이 마냥 달갑지는 않다. 기쁨의 증가는 아장아장 소폭이지만 근심의 증가는 진격의 거인 수준인 까닭이다.돈에서 돈을 창조하는 것도 '신의 일'
중세 교회, 급전 필요한 사람 많아지자
"가족 아니라면 대출 가능" 규제 완화
'종교개혁 지도자' 칼뱅은 한술 더 떠
"성경서 금지 안 해…이자 맘껏 받아라"
구약시대, 신(神)과의 길고 지루한 협상을 마치고 내려온 모세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부터 전하겠소. 계명을 10개로 줄였소이다.” 예나 지금이나 규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다들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모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간통은 못 뺐소.” 모세의 말에 사람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하여간 한동안은 그렇게 10개만 지키면 됐다. 종교는 단순하게 시작해서 복잡하게 진화한다. 계명이 새끼를 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성경 출애굽기의 한 구절이 근거가 된다.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꾸어주면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교리에 따르면 생명 창조는 신의 영역이다. 해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 즉 돈에서 돈을 창조하는 것을 신의 업무에 대한 침해로 보고 금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가난은 보편이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은 항상 있었고 중세 교회는 숨통을 틔워준다. 이번에는 신명기의 한 구절이 동원된다. “타국인에게 네가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여도 가하거니와 너의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식을 취하지 말라.” 요렇게 자국인, 형제, 자매가 아니라면 대출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대금업을 허용했다. 출애굽기의 경고 잔향이 가시지 않은 터라 찜찜하던 기독교인들은 이 일을 유대인들에게 맡긴다. 싫은 일을 떠넘겨놓고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그 이유로 구박했다. 대금업자를 기독교식으로 매장하는 것을 금지했고, 대금업자의 시신을 짐승의 사체를 묻는 구덩이에 함께 던지도록 했다. 인간 취급을 안 했다는 얘기다. 유대인들을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들을 (토지 소유는 물론 다른 직업에 종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기독교인이었다.
돈이 돈을 버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인은 유대인에게 몰아준 일감에서 나는 돈 냄새에 밤잠을 설친다. 1515년, 독일의 한 가톨릭 신학자는 <계약에 관한 연구>라는 책에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합리적인 금리의 상한선으로 5%를 제시했다. 대부호인 푸거 가문의 돈을 받고 쓴 책이었고, 푸거 가문이 대금업을 공개적으로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같은 해 교황 레오 10세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출업법을 발표하면서 약간의 이자 수취를 합법화한다(이때도 상한선은 5%). 1179년 이자 받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파문하기 시작한 지 330년 만에 기독교인들은 이익에 순종했다. 1545년 금융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스위스의 종교개혁 지도자이던 칼뱅은 물었다. “그게 왜 꼭 5%여야 하지?” 그는 히브리 성경에서 대금업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 두 개를 찾아냈다. 물어뜯기라는 의미의 ‘네섹(neshek)’과 증가의 뜻인 ‘타르비트(tarbit)’다.
예시를 만들어보자. 100원을 빌리는 계약서를 쓰고 80원만 받았다면 네섹이다(20원 뜯김). 80원을 빌리면서 계약서에 100원을 갚기로 했으면 타르비트다(20원 증가). 좀 알쏭달쏭하지만 칼뱅은 이 논리로 성경이 금지하는 것은 네섹일 뿐이며 타르비트의 경우는 얼마든지 이자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이 개혁의 발판으로 삼고 있던 상업 자본가 세력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마치 짠 것처럼 같은 해인 1545년 영국의 헨리 8세는 금리 상한선을 10%로 끌어올린다. 이혼 문제로 교황청과 적대적으로 헤어지고 난 후 금리의 통제권까지 자신이 가져온 것이다. 이후 영국의 금리는 오르락내리락하다가 1713년 앤 여왕 때 다시 5%로 돌아온다. 중세라고 해서 경제관념이 야만스러웠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숫자 5%에는 분명 세상과 살림살이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도 과도한 이자는 사람을 죽인다며 금리에 상한선을 뒀다. 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사이 이자를 내는 사람들은 사경을 헤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책 입안자들이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