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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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책을 '기성품'으로 만들다
르네상스 시기 재정 지원을 할 후원자를 찾는 것은 화가와 조각가, 음악가, 인문학자만이 아니었다. 인쇄업자들도 경쟁적으로 후원자를 구했다. 1450년경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 책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인쇄술은 마인츠와 라인강 주변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이어 1459년 스트라스부르, 1466년 쾰른, 1468년 바젤과 아우크스부르크, 1473년 파리에 인쇄기가 도입됐다.하지만 당대의 문화 선진국이던 이탈리아에선 인쇄기의 보급이 더뎠다. 글쓰기가 일상화된 사회였고, 그만큼 ‘인간 복사기’라고 부를 법한 필경사가 많았기 때문이다.실제로 1460년대 코지모 데 메디치로부터 200권의 책을 만들 것을 주문받은 필경사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45명의 ‘보조’ 필경사를 고용해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쇄기와 경쟁해서 이길 순 없었기에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1478년 파산하게 된다.하지만 1500년경 이탈리아에서도 필경사는 한물간 직업이 되었고, 인쇄기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베네치아에서만 150명의 인쇄업자가 활약하며 화려한 장정의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식자공·서적상·사서·출판업자·서적 행상인 등 인쇄업에 관련된 다양한 직업도 생겨났다.이 시기 가장 유명한 인쇄업자(출판인)는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희랍어(고대 그리스어)로 출판한 알두스 마누티우스(알도 마누치오)다. 그가 1501년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8절판(octavo)을 출판했을 때, 그는 마치 그것이 필사본인 것처럼 양피지에 여러 부를 인쇄해 중요한 인물들에게 배포했다. 책을 전한 이 중에는 만투아 후작인 프란체스코 곤차가의 부인이자 르네상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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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명작은 모두 '선전수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은 오늘날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탄생하던 시기에 이들 작품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회화는 수사학처럼 ‘설득’의 수단이었다. 그저 오늘날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보기 좋으라고, 즐기라고 만든 그림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지닌 실용적 도구인 셈이다. “교회 벽에 그림이 그려진 것은 문맹자들이 책에서 읽지 못하는 것을 벽에서 읽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르네상스 시기에 널리 애용된, 6세기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문구처럼 이 시기 예술 작품은 목적성이 강했다.르네상스 시기에 살았던 교황의 의뢰로 제작한 그림들은 교황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그림의 모티프가 된 역사적 사건과 현재의 유사점을 드러내 세속이나, 일반적인 교회 기구에 비해 교황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보티첼리는 <구약성서>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감히 도전한 후 땅이 갈라져 고라와 그의 부하들을 삼켜버리는 장면을 묘사한 ‘고라의 처벌’을 그렸다. 15세기 초의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는 바젤 공의회를 비난하면서 고라를 언급했다.라파엘로는 볼로냐의 벤티보길리오 가문과 갈등을 겪고 있던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려 했지만, 천사들에 의해 쫓겨난 헬리오도루스의 이야기를 그렸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기타 지역의 가톨릭교회에 그려진 그림은 개신교가 이의를 제기한 교리적 내용을 해명하기 위해 설명하고자 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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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막시밀리안이 유럽 장악한 비결 '결혼동맹'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광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부르고뉴의 대공 대담공(大膽公) 샤를에게 자기 아들 막시밀리안과 샤를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당시 사촌인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대립하고 있던 대담공 샤를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프리드리히 3세와 대담공 샤를 간 약혼 조약은 1473년 트리어에서 이루어졌다. 대담공의 사위로 예정된 18세의 막시밀리안은 그의 부인의 영지를 기반으로 자신의 야망을 조금씩 실현해나갔다. 1477년 1월 대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스위스 병사의 손에 사망하자, 약 8개월 뒤인 8월에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결혼식을 치르게 됐다. 이 결혼으로 막시밀리안은 각 지역으로 분할될 뻔하던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를 다시 통합했다.하지만 막시밀리안의 결혼이 과실을 맺게 된 데는 우연과 행운이 따랐다. 장인인 대담공 샤를의 때 이른 죽음이 대표적이다. 막대한 영지를 보유한 대담공이 갑자기 죽으면서, 부르고뉴 공작령과 부르고뉴 백작령(프랑슈콩테) 등 대담공의 영지를 탐냈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살리카법(Lex Salica)’에 근거해 영유권 분쟁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막시밀리안은 아버지를 잃은 부인을 지키는 역할을 자임했다.그 결과, 오랜 분쟁 끝에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플랑드르·아르투아·브라방·홀란트·림베르크·구엘드레란트·룩셈부르크 등의 영지를 보유하는 행운을 얻는다. 프랑스 왕의 공격을 막시밀리안이 막아내는 모습은 막시밀리안을 ‘탐욕스러운 친척의 위협으로부터 고아를 구해내는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보다 못한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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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문, '혼테크'로 유럽 최강자 지위에
1516년경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는 화가인 베른하르트 슈트리겔에게 자신의 첫 번째 부인과 아들, 손주들이 함께 있는 장면을 담은 가족 초상화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막시밀리안이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제작된 이 그림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담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기도 하다.하지만 이 작품의 배경은 전적으로 꾸며낸 것이기도 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건강한 중년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실상 그는 관을 준비하고 여행을 떠나야 할 정도로 갖은 병마에 시달리는, 희끗희끗한 수염이 난 노인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부인과 아들(미남공 필리프)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부인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은 죽음을 암시한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세 아이는 서로 만나본 적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팔을 껴안고 있는 페르디난트는 스페인에서 자랐고, 한가운데 그려진 겐트의 카를은 저지대 국가에서 성장했다. 카를의 유명한 주걱턱은 상당히 완화된 채 묘사됐다.심지어 금발인 세 번째 아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가 흐르지도 않았다. 야기에우워 가문 출신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는 1515년 이중 약혼에 힘입어 합스부르크가와 인연을 맺었지만, 이듬해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됐다.막시밀리안은 후견인으로서 그를 가족 초상화에 등장시켰다.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러요시가 약관의 나이에 오스만튀르크와 전투에서 사망한 탓에 그의 왕국은 고스란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품으로 떨어졌다.이 같은 수다한 결점과 거짓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일군 최대 업적을 한눈에 보여준다. 바로 혼맥으로 유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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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남자 옷 입은 죄"…사형 선고 받은 잔 다르크
백년전쟁 중 영국군에 잡혀 종교재판소에 넘겨진 잔 다르크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졌다. “잔 다르크가 남자 옷을 입었다”는 게 최고형이 내려진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꼽혔다. 중세 서양 사회에서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행위의 대가는 몹시 가혹했다.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28년경 영국군은 무적처럼 보였고, 신은 영국인의 편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상황을 단번에 바꾼 것은 1412년 프랑스 샹파뉴 동부 지역 뫼즈 인근 동레미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라는 소녀였다.잔 다르크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428년 시농에서 잔 다르크를 만난 왕세자(도팽) 신분이던 샤를은 “사내아이처럼 옷을 입은 시골 소녀”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자가 남장한다는 것은 20세기 초 남자가 여장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 저술가 데즈먼드 시워드의 평이다.하지만 당시 신학자들이 잔 다르크를 살펴본 뒤 “이단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없으며, 미친 것도 아니다”라며 그녀가 오를레앙에 들어오도록 샤를에게 조언하면서 잔 다르크의 남장 문제는 일단락되었다.하지만 이후 샤를의 반대파들은 잔 다르크에게 백전백패하는 도중에도 국왕으로 즉위한 샤를에게 “왕의 칭호를 참칭한 자”라는 비난과 함께 “남자의 옷을 입은 수치스럽고 분별없는 계집애와 놀아난 자”라고 자극했다.이 시기 잔 다르크를 둘러싸고 있던 신비한 전설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생드니 요새 근처 전투에서 잔 다르크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은 채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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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상징' 고딕성당은 어떻게 탄생했나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의 독백으로 도도한 시대의 변화를 전한다. 인쇄술의 등장에 따라 정보 유통이 빨라지면서 성당 벽과 스테인드글라스에 빼곡하게 <성서>의 장면을 담아 문맹인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던 가톨릭교회가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장악하던 ‘대성당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위고의 표현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을 지닌 대성당은 중세의 상징이었다. 1248년 착공에 들어가 600여 년 뒤인 1880년 완공된 독일 쾰른 대성당과 같은 거대한 대형 석조 건물은 중세 유럽의 사회·경제적 역량이 장기간에 걸쳐 총결집된 작품이었다.중세 봉건영주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건물은 방어시설이었다. 수천 개에 달했을 중세시대 요새는 수없이 파괴됐고 재건됐다. 요새는 공격 무기와 방어 기술 간 끊임없는 경쟁을 의미했다. 성벽은 갈수록 높아졌고, 진입로는 복잡해졌다. 성벽과 탑은 모양이 바뀌고 더욱 견고해졌다. 프랑스 동부 랑그르 요새의 성벽 두께는 6.4m에 달했다. 노르망디 방어를 위해 사자심왕 리처드가 레장들리에 건설한 샤토 가이야르는 방어시설의 길이가 총 3170m에 달했다.당시 건축 설계자들은 오늘날 설계 전문가처럼 상세한 도면을 작성했다. 건축 마이스터는 목공품을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나무판과 점토, 슬레이트에 도면을 그렸고, 13세기 이후에는 양피지에 건축 도면을 남겼다. 당시의 양피지 도면 22개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보존돼 있기도 하다.오늘날 중세를 상징하는 건물은 대부분 돌로 만들었지만, 처음부터 석조가 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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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중국산 화폐가 키운 중세 일본의 상품시장
중세 일본에선 꽤 이른 시기부터 상품경제가 활성화됐다. 상품경제가 어느 정도로 원활하게 작동했는지는 당시 화폐 사용이 얼마나 활성화됐는지로 가늠할 수 있다. 중세 일본은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으로부터 대규모로 동전을 들여와 교환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일본에서 금속화폐 사용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때인 13세기다. 이 시기 일본에서 사용한 동전은 일본에서 주조한 것이 아닌 ‘중국 수입품’이었다. 고대 일본에선 ‘황조12전(皇朝十二錢)’이라고 불리는 여러 주화를 주조했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천황인 겐메이 덴노(元明天皇) 시절인 화동(和銅) 원년(708년)부터 헤이안 시대 무라카미 덴노(村上天皇) 때인 응화(應和) 3년(963년)까지 사용한 이들 12개 화폐는 품질이 열악해 위조가 손쉬웠다. 결국 율령제가 해체되면서 10세기부터 동전을 발행하지 않았다. 일본에선 쌀과 면, 포 등이 교환수단이 됐다.동전이 교환수단으로 다시 부상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에서 대량으로 주조한 동전이 일본에 들어오면서다. 일본 내에서 ‘도래전(渡來錢)’, ‘송전(宋錢)’으로 불린 이들 화폐는 12세기에는 오늘날 차이나타운과 같은 당방(唐坊)을 중심으로 대량 유통됐다.12세기 말기 일본 조정은 송전의 유통을 일시 금지했다. 하지만 이런 금령(禁令)은 사실상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13세기가 되면 화폐 유통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상품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그 유통수단으로 송전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송전은 가치 변동이 적었고, 쌀이나 직물처럼 품질이 불균질하거나 변질될 위험도 적었다. 안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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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짜리에게 '관직'을 준 고려 음서제
음서제(蔭敍制)는 고위 관료의 친족을 과거시험 없이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다. 고려는 초기부터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귀족사회의 성립 기반을 닦았다.음서제는 고려 7대 왕인 목종 때 기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제도는 고려시대 전 시기를 통해 일반화돼 귀족의 자손은 이 통로를 거쳐 관리에 등용되고 가문의 덕택으로 고관까지 오른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에 음서는 과거와 쌍벽을 이루는 관리 등용의 양대 기둥이었다.이처럼 음서제가 고려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의 관념에 음서제가 큰 저항 없이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에게는 생업을 무사하게 다음 세대로 계승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구현하는 것이 위민정치(爲民政治)를 추구하는 국왕의 소임이었고, 주요 관료 등 관리층(官吏層)도 신민(臣民)의 일원으로 그 대상이었다.그러나 사회 상층부를 구성하는 관리층을 무조건 대를 이어 계승시킬 수는 없었다. 이에 관리(官吏)의 소임(所任)을 설정하고, 그들이 쌓은 실적을 공(功)으로 삼아 공헌이 충분히 쌓이면 음(蔭)이 생성되어 후대로 전해지도록 했다. 국왕은 이런 ‘음’을 토대로 직(職)을 수여했다. 관료 등 사회 상층부가 ‘음’을 생성하기 위해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게 하는 장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음서제를 시행하는 데 제약이 적지 않았다. 초기 문음 출신들은 문한(文翰)·학관(學館)직을 맡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전원균이나 김방경 같은 사람들은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