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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스마트폰 없는 세상, 레닌이 ‘전기화’에 올인한 사정 [세계를 바꾼 순간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권력에다 전 국가의 전기화를 더한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태두 블라디미르 레닌은 위와 같은 말로 전기·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같은 표어가 국가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러시아혁명으로 집권한 소련 공산당은 1920년대까지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국가 경제는 침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1920년 공업 생산량은 제1차 세계대전 전인 1913년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1920년 6월 당시 전체 기관차의 60%가 운행이 불가능했다.1923년 소련의 평균 열차 운행 속도는 시속 10마일(16km) 이하였고, 열차 이용객 수는 1913년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많은 공장이 원자재와 연료 부족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러시아의 주요 탄전은 가동 중단 상태였고, 공장 시설도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대기업의 생산량은 전쟁 전의 18% 수준이었다. 곳곳에 기아와 질병이 만연했고, 혁명의 결과를 되돌리기 위한 백군과 외국 간섭군의 위협도 여전했다.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소련 정부는 1920년 2월 ‘고엘로(ГОЭЛРО)’라는 약칭으로 불린 러시아 전력화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구에서 ‘고엘로 계획(план ГОЭЛРО)’이라는 전력화 사업 계획을 마련했다. 이는 소련의 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5개년 계획이었고, 이후 소련의 계획경제 당국인 고스플란(Госплан)이 추진하는 5개년 계획의 원형이 됐다. 레닌은 “10년 안에 소련을 ‘전기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글레프 크르지쟈놉스키의 지휘하에 200여 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고엘로에 참여했다. 고엘로는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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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달러가 4조 마르크? 지폐가 낙엽보다 쓸모없어지면 생기는 일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08년부터 1923년까지 독일 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 총재를 맡았던 루돌프 하펜슈타인을 두고 당대 독일인들은 ‘돈의 총사령관(Geldmarschall)’이라고 불렀다. 후일 붙은 ‘초(超)인플레이션의 아버지(Vater der Hyperinflation)’라는 오명(汚名)이 더 익숙하긴 하지만 말이다.하펜슈타인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유지되던 금본위제에 종언을 고한 인물이기도 했다. 1914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하루 전, 하펜슈타인은 금본위제 탈퇴를 선언했다.독일 국민을 전시체제로 동원하기 위해 독일 중앙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많은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펜슈타인은 중앙은행의 금 태환 의무로부터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금을 보유한 독일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해 그들이 보유한 금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어찌 보면 ‘사기’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여성이 자신의 목걸이와 팔찌, 결혼반지 같은 보석을 내놨다. 남자들은 시계와 훈장, 메달 등을 국가에 헌납했다.어느 순간부터 금반지를 끼고 금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됐다. 국가에 금을 제공하면 ‘증명서’ 용도로 철로 된 장신구를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에 대적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원됐던 ‘(군수용)철을 위해 금을 내준다(Gold gab ich für Eisen hin)’라는 문구가 다시 한번 사용되면서 독일 사회에 위력을 떨쳤다.하펜슈타인 재임 기간 독일의 화폐 시스템도 출렁였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돼 제2 제국이 성립하면서 금본위 통화인 골트마르크가 독일 전역의 공식 통화로 통용됐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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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일에 4명씩 치여 죽던 '말똥 지옥💩' 뉴욕을 구한 구원투수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세기 말 미국 뉴욕 거리는 말똥 천지였다. 곳곳에 높이가 2m에 달하는 말똥 더미가 쌓여 있었다. 말의 분뇨에서 나는 악취와 셀 수 없이 달려드는 파리 떼는 도시의 상징이었다. 1867년 뉴욕에선 일주일에 평균 4명의 보행자가 말에 치여 사망했다. 뉴욕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1870년 보스턴은 인구 25만 명에 말이 5만 마리나 됐다. 시카고에선 매년 말의 사체만 7000마리씩 나왔다.말은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존재였다. 1872년 말들이 집단으로 감기에 걸리면서 미국 동북부 주요 도시는 그야말로 마비 상태였다. 대중교통 역할을 담당하던 마차업체는 운행을 무기한 연기했다. 도시 내 운송을 전담하던 말이 사라지면서 기차역엔 화물이 쌓였고, 도시민의 생활에 필요한 우유와 얼음, 채소, 맥주 등은 동이 났다. 공장들이 멈춰 섰고 소방업무와 쓰레기 처리 같은 도시의 행정 업무도 발이 묶였다. 교통과 물류 유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위상은 수백 년간 절대적이었다.말이 끄는 승합마차(omnibus)는 오늘날 택시나 버스에 비견되는 대도시의 대표적 출퇴근용 교통수단이었다. 승합마차는 1828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 등장했고, 1832년 영국 런던에서도 주요 이동 수단으로 부상했다. 미국에선 1853년 뉴욕에 처음 도입됐다. 사업가 제이컵 샤프는 뉴욕 브로드웨이 주요 도로에서 3100대의 승합마차를 운영했다. 이런 승합마차 서비스는 1840~1850년대 미국 동북부와 중서부 주요 도시로 빠르게 확산했다.교통수단으로서 말의 위상은 너무나 확고해 흔들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동차가 등장하자 말은 순식간에 시장에서 밀려났다. 원하는 때 움직일 수 있고, 사료를 먹지도 않고 배설물도 없는 자동차는 삽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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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TI보다 더 맹신했던 18세기 '골상학'…"외모가 성격을 결정한다"는 믿음의 최후 [세계를 바꾼 순간들]

    18세기 후반 두개학을 확립한 네덜란드 해부학자 페트루스 캄페르는 원래 화가 출신이었다. 그는 1770년 암스테르담의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교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한 재능 있는 학생이었다.사람의 외모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캄페르는 ‘사람 얼굴의 각도’과 관련한 대단한 ‘발견’을 해냈다. 흑인과 칼무크인(서몽골족), 그리고 유럽 인종의 두개골을 비교·관찰한 결과 두개골 각도의 이른바 ‘중요한 차이’를 찾아낸 것이다. 여러 인종의 두개골 각도를 재고, 이를 다시 유인원의 두개골과 비교한 캄페르는 윗입술부터 정수리까지 각도와 두개골의 좌우 비례를 꼼꼼히 따져 100분위 단위로 두개골 각도를 세분화했다.그는 이어 미학의 창시자 요한 빙켈만이 모범으로 생각한 그리스적인 얼굴을 100점 만점의 이상적인 미(美)로 삼은 뒤, 각 인종이 이상형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따졌다. 그에 따르면 70도 이하였던 흑인은 인간보다 유인원이나 개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반면 유럽인의 두개골은 각도가 97도 이상으로 평가돼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캄페르 이후 인류학자들은 소위 ‘두개골 각도’를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여겨 이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빙켈만 등에 의해 미적 기준으로 만들어진 각종 기준은 우수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을 나누는 과학적 징표이자 척도로 활용됐다.사람의 얼굴 생김새에 따라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된다는 생각은 서구 사회에선 16세기부터 어느 정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엔 곱슬머리나 매부리코 등은 개인의 운명이나 질병, 파산, 성격 등을 설명한다고 봤다. 그런데 캄페르 이후 생김새가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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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말 믿었다가 제대로 뒤통수 맞은 일본 국민들 [세계를 바꾼 순간들]

    1905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출발한 성난 시위대 중 일부가 고쿠민(國民)신문사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경관, 신문사 직원들과 뒤얽힌 난투 끝에 윤전기 2대를 파괴했다.일본의 유력 신문 중 유일하게 포츠머스 강화 회의의 결과에 대해 찬성 견해를 밝힌 이 신문에 대중의 분노가 집중됐다. 당시 일본은 비록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서구 열강과의 종전 협상에선 과거 청일전쟁 때와 같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획득이라는 결실을 얻지 못했다. 총동원병 수 108만8996명, 전사자 8만7360명, 부상자 38만1313명의 총력전을 벌인 것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결과였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되던 당시, 일본 대중의 기대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간 격차는 매우 컸다.이런 상황에서 고쿠민신문은 “배상금을 받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배상금 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며 “한국의 보호권을 취득하고, 뤼순과 다롄 등의 조차권을 획득한 것은 성과”라고 주장했다.앞서 포츠머스 강화회의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은 심상찮게 움직이고 있었다. 1905년 8월 31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교섭이 난항에 봉착한 사실이 일본 신문들에 알려졌고, 다음 날 오사카아사히신문이 “덴노(천황) 폐하께 화의를 파할 것을 명하시길 청원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다른 유력지들도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논설을 게재했다.9월 2일 강화문제동지연합회가 5일 정오부터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정담(政談)연설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어서 추밀원을 방문할 때 요청할 내용도 결정했다. 당시의 양대 정당인 정우회(政友會)와 헌정본당(憲政本黨)에 강화조약 반대 운동에 동참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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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돈빨'이죠, 일본이 러시아를 꺾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 [세계를 바꾼 순간들]

    ‘제국주의’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1897년. 우연히도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그해 1월 러시아가 금본위제를 시행한 데 이어 10월에 일본이 ‘화폐법’을 제정하면서 뒤를 따랐다.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금본위제를 받아들인 것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발걸음이기도 했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드는데,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운영 중이던 금본위체제에 들어가는 것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리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특히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뤄가던 일본 재정의 발전상이 주목할 만하다. 1893년 10월 마쓰가타 마사요시 일본 총리는 금본위제 도입을 검토하기 위한 전문가 기구로 ‘화폐제도 조사회’를 설치했다. 조사회에는 관계·재계·학계·정계 관계자 20명이 참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을 사사한 소에다 주이치, 통계학자 호소카와 유지로, 재무성 관리 및 미쓰이은행 간부를 지낸 하야카와 센키치로 등이 조사회 멤버였다. 당초 은본위제를 유지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요코하마정금은행장이던 소노다 고키치가 “장래를 위해선 금본위제를 도입하는 게 좋다”고 주장한 뒤, 격론 끝 표결을 통해 8 대 7로 금본위제 도입이 결정됐다.당시 아시아에서는 천 년 가까이 은화 경제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으로선 은본위제에 머무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일본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금본위제 도입 결정으로 일본은 청일전쟁 후 청나라가 지급한 배상금을 영국 런던에서 파운드화로 수령했고, 영국 내 은행에 이를 예치했다.일본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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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베를린도 제쳤다! 유럽 '최초의 지하철'이 부다페스트에 깔린 이유 [세계를 바꾼 순간들]

    나폴레옹전쟁 이후 전후 질서를 다루던 빈 회의가 막바지로 치닫던 1815년 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영국 귀족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헝가리 쪽으로 뻗은 길을 가리키며 “저기가 유럽이 끝나는 곳입니다. (헝가리는) 동양입니다”라고 말했다.그랬던 ‘변방’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19세기 말 화려한 변신을 이뤘다. 헝가리의 중심 도시 부다페스트는 여러 차례 수정된 도시계획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기획에 따라 설계된 일종의 계획도시다. 수 세기에 걸쳐 헝가리 왕국과 헝가리 공화국의 행정 중심지였던 부다는 13차례 적에게 포위당하고 5번이나 완전히 파괴된 역사를 지녔다.부다페스트의 환골탈태를 상징하는 사건은 1896년에 일어났다. 그해 1월 1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모든 교회의 종은 성대한 잔치의 개막을 알리기 위해 매시간 정각에 일제히 울렸다. 마자르족이 카자흐스탄 대초원에서 카르파티아 분지로 쳐들어와 훗날의 헝가리 땅을 차지한 지 1000년이 됐음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정확히 언제 마자르인이 헝가리로 이주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888년과 900년 사이인 895년을 건국 원년으로 정했다. 하지만 1000주년에 맞춰 진행하던 도시 건설 일정이 늦춰지면서 뒤늦게 공식 개국 연도를 896년으로 바꿨다. 헝가리 국민 시인 페퇴피 샨도르가 유럽 내에서 언어·민족적 특질이 도드라지는 헝가리를 두고 “우리는 외로운 민족”이라고 읊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자르족의 영광을 기리는 분위기가 끓어올랐다.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식을 위해 도시 곳곳이 과시적이면서도 세련된 대형 사업의 건설 현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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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 막으려고 길을 넓혔다고? 나폴레옹 3세의 '빅픽처' 파리 대개조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한 프랑스 제2제정 시대, 프랑스의 외양은 더없이 화려하고 장엄했다. ‘문명의 선두에(a la tête de la civilisation)’라는 슬로건에 따라 파리는 대대적으로 모습을 바꿨다. 조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은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낡고 복잡했던 파리를 통째로 뜯어고쳤다. 화려하게 디자인된 거리와 광장, 정원, 줄지어 늘어선 웅장한 저택 등 오늘날 파리를 상징하는 모습을 일궈냈다.앞서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 1세는 파리를 ‘멋지고 거대하며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끝내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대신 파리시는 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진정한 변신을 했다. 1851년 권력을 잡은 루이 나폴레옹은 파리를 ‘프랑스의 심장’이라고 선언하며 “이 위대한 도시를 장식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붓자”고 했다.당시 파리는 소비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했다. 1852년에는 정찰제로 판매하는 백화점인 벨자르디니에르, 프랭탕, 사마리텐 등이 등장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3세는 정부의 위신을 드높이고, 런던과 경쟁하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바리케이드를 건설하기 쉬웠던 도시의 면모를 일신하기를 원했다. 비좁은 파리의 시가는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하기 쉬운 구조였다. 나폴레옹 3세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넓게 만들어 바리케이드 설치를 어렵게 하고, 진압 병력은 손쉽고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기를 원했다.나폴레옹 3세의 야심 찬 선언을 실행한 인물은 당시 파리 지사이던 오스망 남작이었다. 그의 계획과 추진력 아래 직선의 넓은 대로가 생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