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엔 여자가 남자 옷 입으면 신성모독
잔 다르크, 백전백승에도 옷 때문에 비난 받아
종교재판 처형뒤 英선 200년간 마녀로 각인
'남장'했던 댓가는 가혹
죽음도 정치적 입장 따라 끊임없이 윤색
샤를 7세 집권뒤 마녀에서 성녀로 평가 바뀌어
잔 다르크, 백전백승에도 옷 때문에 비난 받아
종교재판 처형뒤 英선 200년간 마녀로 각인
'남장'했던 댓가는 가혹
죽음도 정치적 입장 따라 끊임없이 윤색
샤를 7세 집권뒤 마녀에서 성녀로 평가 바뀌어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28년경 영국군은 무적처럼 보였고, 신은 영국인의 편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상황을 단번에 바꾼 것은 1412년 프랑스 샹파뉴 동부 지역 뫼즈 인근 동레미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라는 소녀였다.
잔 다르크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428년 시농에서 잔 다르크를 만난 왕세자(도팽) 신분이던 샤를은 “사내아이처럼 옷을 입은 시골 소녀”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자가 남장한다는 것은 20세기 초 남자가 여장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 저술가 데즈먼드 시워드의 평이다.
하지만 당시 신학자들이 잔 다르크를 살펴본 뒤 “이단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없으며, 미친 것도 아니다”라며 그녀가 오를레앙에 들어오도록 샤를에게 조언하면서 잔 다르크의 남장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후 샤를의 반대파들은 잔 다르크에게 백전백패하는 도중에도 국왕으로 즉위한 샤를에게 “왕의 칭호를 참칭한 자”라는 비난과 함께 “남자의 옷을 입은 수치스럽고 분별없는 계집애와 놀아난 자”라고 자극했다.
이 시기 잔 다르크를 둘러싸고 있던 신비한 전설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생드니 요새 근처 전투에서 잔 다르크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상처를 입은 채 넓은 공터에서 늦은 밤까지 홀로 남겨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잔 다르크를 구하려는 조치를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녀가 그냥 죽었으면 하고 바란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잔 다르크의 ‘불패 신화’는 깨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친영국파이던 부르고뉴군 병사의 창에 찔려 낙마하게 된다. “당시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이 그 소녀만큼 두려움을 준 적군 지휘관이 없었기에 마치 500명의 전사를 사로잡은 것보다 더 기뻐했다”고 당시 사료들은 전한다.
이어 1431년 2월부터 종교법학자들이 진행한 잔 다르크의 종교재판에서 잔 다르크에게 적용된 여러 죄목 중에는 ‘남자 옷을 입는 것’과 같은 성적 측면에서 괴팍한 행동도 포함됐다. 여인이 남장한 것은 “신을 노엽게 하고, 매우 끔찍한 행동”이라는 게 당시 성직자들의 논리였다. 그 시기 영국 기록에는 “잔 다르크가 강간당할 두려움 때문에 남자 옷을 입었는데, 튜닉과 바지를 서로 꿰맨 옷을 입어 쉽게 겁탈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라는 폄하적 성격의 해설도 전해진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의 시장 광장에서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화형당했는데, 사형을 집행한 병사들은 타다 남은 잔 다르크의 시체를 꺼내 잔 다르크가 단지 한 사람의 여인에 불과했음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후 200년간 영국인 사이에서 잔 다르크는 ‘마녀’로 각인됐다.
사실 잔 다르크의 마지막 순간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상이하게 그려졌다. 잔 다르크의 최후를 처형 시점에서 다룬 기록은 매우 드물다. 잔 다르크가 루앙에서 화형당할 당시를 기록한 당대 자료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은 그녀의 반대파이던 부르고뉴 지역 연대기 작가가 쓴 <파리의 부르주아(Bourgeois de Paris)>다.
이 책에서는 “화형 결정이 내려지자, 그녀(잔 다르크)는 말뚝에 묶였다. 화형식을 치르는 무대 위에는 각종 유황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불이 붙자 잔 다르크는 곧 질식했다. 얼마 안 돼 잔 다르크 옷은 모두 타버렸다. 잠시 후 불길이 조금 누그러지자 잔 다르크 시체는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 군중에게 공개됐다. 물론 많은 사람이 의심을 가졌던 문제, 즉 그녀가 정말로 여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은밀한 부분도 드러났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사형집행인은 불길을 다시 일으켰고, 이내 모든 것이 타버렸다. 뼈와 살이 다 재가 되었다”라고 묘사한다.
마녀로 처형된 잔 다르크의 죽음은 이후 샤를 7세가 집권하면서 새롭게 쓰인다. 잔 다르크 덕에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던 샤를 7세로선 잔 다르크가 ‘정식’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당했다는 사실을 그냥 뒀다간 권력의 정당성에 흠집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잔 다르크 화형식 말뚝에 매달릴 때 신과 성자를 찾았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예수”였다는 증언이 추가됐다. 다른 기록에선 잔 다르크가 몸에 불길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광장에 있던 수사에게 근처 교회에 있는 십자가를 높이 들어달라고 부탁했다는 내용이 더해졌다. 사형집행인이 아무리 유황을 더 뿌려도 잔 다르크 심장이 타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는 미스터리에 가까운 내용이나, 적군인 영국군도 ‘위대한 순교자’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는 선전성 문구도 잔 다르크 죽음을 신비롭게 만들었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남자 옷 입은 죄"…사형 선고 받은 잔 다르크](https://img.hankyung.com/photo/202510/01.41157276.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