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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고려는 군사국가…조선은 관료제로 지배한 영토국가, 사유재산·농촌시장 등장…현대 한국인 원형 나타났죠

    새로운 시대에서 사회는 지배와 예속의 신분질서로 분열했다. 토지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성립했으며, 소규모 가족경영이 발달했다. 신분으로 갈라진 사회는 유교의 이념으로 통합됐다. 그 속에서 인간들은 보다 나은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 몸부림의 과정에서 현대 한국인의 원형이 빚어졌다. 인구는 1392년 555만 명에서 1810년 1838만 명으로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그에 상응해 경지가 확충되고 이용이 심화했다. 농촌시장도 성립했다. 조선 5세기에 걸쳐 경제는 세기에 따라 기복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성장했다. 1인당 소득수준이 개선됐는지는 의심스러운 ‘맬서스의 시대’였다. 이씨 왕가의 내력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에 만주 대부분은 웃치긴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이다. 웃치긴의 판도에는 다수의 고려인이 여진족과 섞여 살았다. 이성계의 가문도 그러했다. 1255년 이성계의 고조 이안사는 웃치긴으로부터 다루가치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이후 동 직위는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계승됐다. 이 가문이 고려왕조에 속하는 것은 1359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토를 수복할 때 그 지역의 이자춘이 호응해 큰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는 고려의 관직을 부여받았다. 이후 이성계는 고려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권력은 고려의 정규 중앙군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이성계의 친병 가별초군(家別抄軍)은 몽골식 기마전투와 거친 산악지대에 잘 훈련된 여진족을 핵심 전력으로 했다. 1388년 요동을 장악해 온 몽골 세력이 신흥 명(明) 제국에 항복했다. 고려와 국경을 맞댄 명은 이전의 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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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고려인구, 경제발전으로 12세기보다 2배 증가…지방 지배세력도 교체…조선 '역성혁명'으로 이어졌죠

    팍스 몽골리카의 번성한 국제 교류는 고려의 경제 발전을 자극했다.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했다. 12세기 인구는 250만~300만 명이었다. 14세기 말의 인구는 대략 600만 명이었다. 13세기는 대전란의 시기이므로 인구 증가는 주로 14세기의 일이었다. 짧은 기간에 인구가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은 14세기가 경제적으로 일대 고양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농서 발간과 농장의 개간인구 증가는 농업의 발전을 촉구했다. 휴한농법이 극복되고 연작농법이 정착했다. 토지 연작을 위해서는 지력을 보충하는 비료의 투여가 필수적이었다. 농사는 보다 과학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1372년 원의 농서 <농상집요(農桑輯要)>가 간행된 것은 그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비록 수입 농서지만 한국사에서 최초로 발간된 농서였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는 토지의 활발한 개간을 불렀다. 관련해서는 안씨가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안향(1243~1306)의 손자 안목(?~1360)은 개경 부근 파주의 서쪽 들을 개간했다. 안목의 손자 안원(1346~1411)에 이르러 개간지 규모는 수만 결에 달하고 경작 노비는 수백 호나 됐다. 안씨가의 농장은 수조지 녹과전으로 이뤄진 권문세족의 농장과 달랐다. 그것은 농장주의 개인적 소유였다. 농장을 경작한 것은 노비들이었다. 노비노동에 기초한 새로운 생산양식(生産樣式)이었다. 그 점에서 안씨가의 농장은 조선왕조 15~16세기 농촌에서 일반화하는 양반가 농장의 선구를 이뤘다. 지방세력의 이동 13~14세기에 걸쳐 군현의 지배세력인 호장(戶長)을 위시한 토성(土姓) 집단이 해체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다. 몽골과의 전쟁에 따른 농촌의 황폐, 새로운 토지제도로서 녹과전의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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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는 귀족들의 농민 수탈이 심해졌다고 썼지만 농업생산력과 농민 권리 커져 조세율은 크게 낮아졌죠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의 사회 구성에 큰 변화가 일었다. 전쟁으로 농지가 황폐하자 조세의 수취가 어려워졌다. 귀족·관료에 대한 녹봉 지급이 줄어 그들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1257년 그들에게 수조지(收租地)를 지급하는 제도가 부활했다. 1075년에 시행된 녹봉제는 182년 만에 폐지됐다.‘고려사’의 의도다시 지급된 수조지를 가리켜서는 녹과전(祿科田)이라 했다. 녹과전의 설정은 경기도에 한했다. 왕족과 공신에게도 수조지가 지급됐는데, 별사전(別賜田)이라 했다. 별사전은 경기도의 범위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설치됐다.녹과전 규모는 10∼12세기 전시과(田柴科)에서의 사전(私田)보다 훨씬 컸다. 예컨대 제1과 중서령(中書令)에게 지급된 사전은 100결임에 비해 녹과전은 300결이나 됐다. 특히 별사전의 규모가 커서 산천을 경계로 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 같은 13∼14세기의 토지제도를 두고 후대의 <고려사>는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귀족의 농장에 편입된 농민들은 수탈이 가중됨에 따라 점점 고달파졌다. 농장의 팽창은 정부 재정을 압박했으며, 이는 각종 잡세의 신설을 유발해 농촌 경제를 압박했다. 농민들은 처자를 팔거나 사방으로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이 같은 <고려사> 논조에는 조선 왕조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10분의 1 수조율의 성립이전에 소개한 대로 고려 왕조의 수조율은 공전과 사전에 따라 달랐다. 공전은 4분의 1, 사전은 2분의 1이었다. 이런 차이는 고려 왕조의 집권적 지배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점차 해소됐다. 12세기 초 고려 왕조는 공전과 사전의 농민을 전호의 지위로 일괄 규정한 다음 사전을 개간한 농민에게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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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몽골이 세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민간무역 번성, 新 지식인도 배출…조선을 열 신흥세력 잉태됐죠

    1323년 남방산 향목(香木)과 2만 점 이상의 자기 및 28t의 동전을 싣고 중국 영 파를 떠나 일본으로 가던 200t 규모의 무역선이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 다. 1976년 우연히 발굴된 이 무역선은 대몽골 울루스의 질서에서 번성했던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전남 신안 보물선2만 점 이상의 자기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고려청자도 포함됐다. 고려 왕실만 그 번성한 동아시아 해상 교역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민간 상인도 참가했는데, 그들의 몫은 14세기 말까지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14세기 전반 <노걸대(老乞大)>라는 어학 교습서에 의하면 고려 상인들은 모시와 인삼을 말에 싣고 육로로 요동을 거쳐 원의 대도로 갔다. 대도에는 그들의 친척이 있어서 물화를 판매했다. 상인들은 그 대금으로 산동의 제령부로 내려와 비단, 바늘, 화장품, 장신구 등의 고급 물화를 구입해 배편으로 귀환했다. 그들은 관인무역허가장을 지참했는데, 이외에 상인 자격이나 수출입 품목의 종류·수량에 특별한 제약이 있던 것 같지는 않다.14세기 중후반 원명(元明) 교체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민간 무역은 더욱 번성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모시였다. 권세가들은 그들의 농장에 모시를 재배했으며, 주변 사원으로 수공업자와 노비를 모아 모시 천을 대량 직조했다. 고려 상인에 관한 <박통사(朴通事)>란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1만 필의 모시를 싣고 중국에 입항하는 고려 상선이 있었다. 고려왕조는 상선이 직접 중국으로 출항하는 것을 금했다. 그 금령이 14세기 중후반에 사실상 해제된 상태였다. 민간 무역의 번성으로 대도의 외항인 통주 관내 완평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마을이 생겨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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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오랜 항쟁 끝에 몽골에 항복한 이후 큰 변화…13세기말 ‘대몽골 울루스’에 편입돼 세계와 교역

    1231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과 고려왕조 28년에 걸친 항쟁은 고려의 사회와 경제에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안겼다. <고려사>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254년의 일이다. “이해에 몽골병에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6800여 명이요, 살육된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나가는 주군(州郡)마다 모두 잿더미가 됐으니, 전란이 있은 이래로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몽골 침입과 세계 편입 결국 1259년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는데, 이후에도 전란은 끊이지 않았다. 1270년 고려 중앙군의 핵심 전력인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 근거지를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면서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끈질기게 저항했다. 1273년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자 원(元) 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몽골은 일본 정벌에 나섰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 정벌에서 군수를 조달하고 병사로 동원된 고려 인민의 고통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피해가 컸던 만큼 전란 이후 재건된 고려의 사회와 경제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13세기 말 전란의 피해는 거의 복구됐다. 1296년 개경에 1008개 기둥으로 연결된 긴 복도의 시전(市廛)이 다시 세워졌다. 그보다 앞서 1279년에는 원과의 역참로가 개통됐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한반도에서 발칸반도까지, 베트남에서 헝가리까지,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의 광활한 유라시아대륙과 지중해에서 인도양을 거쳐 동중국해와 발해만에 이르는 광대한 해원(海原)을 종횡으로 엮는 대(大)몽골 울루스에 깊숙이 포섭됐다. 울루스는 국가 또는 백성이란 뜻이다. 이전의 세계는 7개의 비교적 자급적인 지역으로 구성됐으며, 이슬람이 각 지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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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때 노비는 ‘사회적 인격’ 있어…조선과 달랐죠…무신정권기엔 정계진출도…‘노예제 사회설’은 잘못

    고려는 노비의 복식을 차별하려고 노력했다. 사노(私奴)는 모자를 쓸 수 없다는 금령이 내려졌지만 얼마 있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노는 요대(腰帶)를 할 수 없다는 금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12세기 초 개경을 방문한 서긍은 귀천 간에 복식의 차별이 없음을 기이하게 여겨 그의 견문록에서 몇 차례나 이를 지적했다.동시대 일본의 노비에게 강요된 복식의 차별은 엄격했다. 일본 노비는 동발(童髮)이며 오모자(烏帽子)를 쓸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고려 노비와 주인 간의 신분율(身分律)은 의외로 느슨했다. 어느 비부(婢夫)가 처의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비부는 유배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조선시대라면 예외 없이 참형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다. 주인의 범죄를 고발해 처벌받게 한 노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려왕조는 유교의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입각해 형사(刑事)에 관한 행정을 엄격하게 집행한 나라가 아니었다. “장상에 어찌 종자가 있느냐”…노비 ‘만적의 난’ 고려의 노비에게서 그의 사회적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을 찾기는 힘들다. 그들의 사회적 인격은 살아있는 편이었다. 이 같은 고려 노비의 존재 양태는 그들이 원래 형벌에 기원을 둔 국가노예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정치적 이유로 노비가 됐으며,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얼마든지 해방될 수 있는 존재였다. 무신집권기에 노 출신으로서 고관이나 장군으로 출세한 사람이 많았다. 집권자의 한 사람인 이의민은 경주의 어느 사비(寺婢)의 아들이었다. 그러자 개경의 사노 만적이 난을 모의하면서 “장상(將相)에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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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때 ‘노비는 주인의 재산’이라는 첫 노예법 생겼죠…고려 노비는 해방 가능성 있는 ‘기한부 채무노예’ 성격

    한국사에서 노비(奴婢)는 삼국시대에 왕실과 귀족의 가내 노예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삼국의 통일전쟁 과정에서 포로 출신인 노비가 증가했다. 7세기부터는 범죄자의 가속을 노비로 적몰(籍沒)하는 형벌이 생겨났다. 그 연장선에서 고려왕조는 노비법을 제정하고 강화했다.삼국시대의 가내 노예 986년 노비의 가격이 정해졌다. 노는 포 100필, 비는 포 120필이었다. 이 법은 노비가 주인의 재산임을 명시한 최초의 노예법이었다. 1039년에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 제정됐다. 주인이 다른 노와 비가 출생한 아이는 비의 주인에 속한다는 취지다. 이 법은 노비의 결혼과 신분 세습을 당연시하는 가운데 소속이 다른 노와 비가 결혼하는 일이 잦아진 시대상을 전제했다. 1136년에는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다가 스스로 목을 맨 경우 주인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주인이 노비를 처벌하는 중에 노비가 두렵거나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하더라도 주인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법을 계기로 고려의 노비는 생사여탈이 주인에게 장악된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했다. 노비 해방 반대했던 충렬왕 1287년 충렬왕은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반포했다. 당시 고려는 원(元)제국에 복속했다. 원의 황제는 고려왕에게 노비제를 폐지하라고 명했다. 그에 대해 충렬왕은 “우리의 태조가 ‘노비는 그 종자가 있으니 이를 해방하면 끝내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유훈을 내렸으며, 그 이후 노비제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내려왔다”고 항변했다. 태조 왕건이 그런 유훈을 내린 적은 없다. 충렬왕의 변명은 거짓말이라기보다 10세기 이래 그 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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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수도인 개경은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죠…고려는 귀족·관료·중앙군 등 국인과 지방 향인 차별

    전호란 말의 기원은 중국 송(宋)이다. 송은 민간의 토지 임대차 관계와 소작농을 가리켜 각각 주전제(主佃制)와 전호라고 불렀다. 11세기 말 송은 주전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전주(田主)와 전호의 지위에 차등을 두는 법을 제정했다. 고려왕조는 그 법을 백성의 지위를 규정하는 데 적용했다.전호란 말의 유래 종래 고려의 전호를 송의 전호와 동질의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고려사 연구에, 나아가 토지제도사 연구에 큰 혼란이 빚어졌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발전 단계와 수준을 동일시한 역사가들의 선입견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전에 소개한 대로 12세기 고려의 인구는 250만~300만 명에 달했다. 그중 왕도 개경과 인근 주현(州縣)에 밀집한 인구는 대략 50만 명이었다. 그 중핵은 4000여 명의 문관과 무관, 대략 3만 명에 달한 중앙군, 그리고 그들의 가속이었다. 《고려사》는 이들을 가리켜 국인(國人)이라 불렀다. 국인은 개경에 살면서 왕실을 옹위하는 귀족, 관료, 중앙군의 집단을 말했다. 국인은 조정의 정치를 주도했고, 여론의 향배를 결정했으며, 나아가 왕위 계승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고려의 개경은 신라의 금성과 마찬가지로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다. 지방 향인으로 내쳐지는 귀향형은 가혹한 형벌 고려왕조는 개경에 집주한 국인의 군사공동체가 전국의 580여 주현과 같은 수의 향(鄕)·부곡(部曲)을 예속공동체로 지배하고 그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수취하는 공납제 국가였다. 고려는 국인과 향인을 차별했다. 지방의 향인은 거주와 직업을 속박당했다. 관청의 허락 없이 함부로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었다. 향인이 국인으로 승격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