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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예루살렘·메카 가는 길은 천년의 대박 아이템

    지금은 관광으로 먹고살지만 베네치아는 한때 세상의 물류를 쥐고 흔들던 해상 제국이었다. 15세기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베네치아의 알짜 사업이 순례선단 운용이다. 물자 대신 사람을 실어 날랐으니 그게 그거긴 하지만 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 파편을 모신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기독교도들의 꿈을 사업으로 승화시킨 ‘촉’하나만은 알아줄 만하다. 물론 이전에도 순례자는 있었다. 선박을 이용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루트도 존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순식간에 업계 1위를 달성한다. 비결은 베네치아만의 독보적 순례 패키지였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쉬운 시대가 아닌 데다 절차는 복잡하고, 순롓길에 오른 동안 몇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 리는 순롓길. 이에 베네치아는 여행에 필요한 각종 통행증과 허가증, 그리고 숙박과 통역 등의 서비스 일체를 제공했다. 여행 허가증은 셋이다. 교구 사제가 발행하는 허가증, 교황이 발부하는 허가증, 그리고 마지막이 시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이다. 교황의 허락 없이 순례를 갔다가는 파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를 발부받으려면 로마까지 발품을 팔아야 한다. 기독교도가 맘루크 제국까지 허가증을 받으러 간다? 명백히 미친 짓이다. 베네치아 패키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이 중 교구 사제 허가증만 받아오면 됐다. 베네치아는 교황과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을 책임졌고(수수료가 오간 것은 물론이다) 순례자가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순례선단 사업 독점 150년 동안 매년 수천 명이 순례를 위해 베네치아를 찾았다. 1인당 운임은 그 시기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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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종하면 세금 면제"…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과 면세 카드

    그리스도교는 일요일에 예배를 본다. 유대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는다. 이슬람의 대예배일은 금요일이다. 그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무얼 할까. 서로 싸운다. 내내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말하지만 그게 지켜지는 일은 별로 없다. 자신들이 죽여놓고 신의 승리라고 말한다. 종교 때문에 싸우는 건지 싸우기 위해 종교를 개발한 건지 모르겠다. 셋 중 가장 최신 종교가 이슬람이다. 무함마드가 마흔이 되던 610년 첫 번째 계시가 들려온다. 산에서 돌아온 무함마드는 아내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다섯 살 연상인 아내는 기뻐하며 무함마드가 민족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포교 성적은 형편없었다. 1년 동안 무함마드의 말에 넘어간 사람은 가족, 친구, 친척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하인까지 70여 명이 전부였다. 보험판매업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팔고 난 뒤부터가 진짜 실력이다. 포교도 마찬가지. 70여 명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얼굴을 봐서 그냥 믿어주기로 했을 뿐이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친척이니까(심지어 숙부도 무함마드가 하는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일단 무함마드의 설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맞지 않았다. 약탈과 보복 전쟁이 일상인 사막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아랍인은 과음(過飮)과 과음(過淫)으로 불안을 잊었다. 그런데 도덕적이고 순종하는 삶이라니. 게다가 무함마드가 하는 이야기는 별로 신선하지 않았다.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지금의 예멘 지역)에 ‘힘야르’라는 왕국이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후 525년까지 존속했는데, 이 왕국이 유대교를 믿는 왕국이었다. 왕국 바로 위가 무함마드가 살던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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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퉁 제국'이 남긴 건 인종청소와 헬게이트

    남의 나라의 의사결정을 대신 해주는 나라를 ‘제국’이라고 부른다. 재미있으라고 지어낸 말이 아니다. 제국을 뜻하는 ‘empire’는 라틴어 동사 ‘imperare’에서 파생한 말로, 원래 의미는 ‘명령하다’ ‘지시하다’다. 그렇다고 제국을 지배와 권리 대행의 폭압적 존재, 영토와 자원에 환장한 약탈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제국은 아무리 강성해도 문 닫는 데 한 세기도 걸리지 않는다. 제국은 식민지에 ‘제약’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지배당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굴종의 스트레스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을 때 제국은 첫 관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여기에 포용과 관용이 토핑되면서 비로소 롱런 가도에 진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피정복 민족을 동물이나 식물 다루듯 하라고 조언했지만, 제자는 스승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조언대로 했더라면 그의 제국은 암살과 폭동으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지배 이념은 윤택하고 편리한 생활 방식의 유혹이었다. 알프스 북쪽과 지중해 서쪽의 식민지들은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대신 도시와 목욕과 청결을 얻었다. 윈스턴 처칠이 로마가 브리타니아에 상륙했을 때 드디어 영국에 문명이 시작됐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겠다. 중세 끝 무렵 시작된 대항해시대는 대륙과 대륙에 걸친 제국이 다시 등장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이 동지중해를 봉쇄하자 “지중해만 바다냐 대서양도 바다다” 하며 서쪽으로 훌쩍 나가버린 일이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개막한 대항해시대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문명사적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는 헬 게이트가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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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면 남는장사…배상금 뜯어내며 침략전쟁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서구식 내각 제도를 수립하고 초대 총리로 취임하는 1885년까지 일본은 하루도 쉬지 않고 근대화에 매진했다. 성실하게 두 번의 내전(보신 전쟁·세이난 전쟁)을 치렀고, 성실하게 구미(歐美)를 베끼며 내치를 다졌다. 이제 그만 성실해도 되련만 이들에게 뒤늦게 ‘중2병’이 찾아오면서 일본은 갑자기 성실한 불량 학생이 된다. 정한론(征韓論)으로 시작된 힘 자랑과 욕심 채우기를 전쟁이라는 최악의 방식으로 펼친 것이다. 외우기 편하게 이들은 10년 단위로 큰 전쟁을 치렀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세계대전이다. 전쟁 목록은 이게 다가 아니다. 큰 전쟁 사이마다 작은 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간에 타이완 정복전쟁과 의화단 전쟁을 치렀고, 러일전쟁 후에는 대한제국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의병 투쟁을 진압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전쟁 주도 성장은 계속된다. 세계대전이 휴전 상태로 접어든 1918년에는 시베리아로 출병해 1922년까지 주둔했고(남들은 다 철수),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대망의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 말 그대로 전쟁으로 흥했다가 전쟁으로 망한 ‘전흥전망’의 나라가 19세기 말, 20세기 중반의 일본이다. 전쟁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은 아편전쟁에서 배웠다. 자기들이 먼저 침략해놓고 상대가 반항하면 이를 진압한 뒤 배상금을 받아내는 수법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챙긴 배상금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하면서 받은 환부금 포함 3억6000만 엔이다. 일본 1년 국가 예산의 3~5년 치인데(재정 규모가 7000만 엔에서 1억 엔까지 책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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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전쟁 배당금' 노렸다

    대체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 것일까. 사람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동일한 행위를 할 때, 이유는 하나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피눈물을 흘려놓고도 호모사피엔스가 여전히 전쟁을 끊지 못하는 것은 그것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인간 세상에서 평화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전쟁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했다. 물론 영구 평화라는 자신의 주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사였겠지만, 허위로 세상을 진단할 분이 아니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분이 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철학서인 <전쟁론>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유혈을 꺼리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 의해 반드시 정복당하며,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의 연속”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왜”라는 물음에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답을 하기가, 진실을 말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책 속에 암호처럼 숨겨놓은 정답은 ‘개인적인 의지’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정치가와 군인들의 의지가 클라우제비츠가 간파한 전쟁의 이유였다. 이처럼 철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전쟁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경제학적으로 전쟁을 설명하는 것은 허무할 정도로 쉽다. 거기에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익이 통상적인 경제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을 월등하게 뛰어넘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에서 이겼을 경우다. 지면 즐거움을 상대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 즐거움 중의 하나가 물질적·신체적인 약탈이다. 고대와 중세의 전쟁에서 약탈은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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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進 칭기즈칸, 육상 무역 독점국부터 쳤다

    헤로도토스는 부드러운 나라에서는 부드러운 남자들이 태어나는 법이어서 풍요로운 곡식과 용감한 전사들이 같은 땅에서 태어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파봐야 힘만 빠지는 땅과 씹을수록 허탈해지는 음식과 인간의 생존에 적대적인 기후에서 자란, 악에 받친 남자들이 전쟁에 강하다는 얘기겠다.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제공해 남자들을 구조적으로 전사(戰士)로 만드는 땅이 있으니 바로 몽골이다. 흔히 몽골 ‘초원’이라고 한다. 몽골의 초원은 푸르고 그림 같은 집이 있는 곳이 아니라 거지 같은 천막에다 나를 죽이려 드는 인간들만 득실대는 곳이다. 몽골어로 ‘강(gan)’이라 불리는 가뭄 때문에 초원의 풀은 늦여름부터 마르기 시작한다. 가축들이 굶어 빼빼해질 무렵, 이번에는 주드(dzud)라는 겨울 재해가 찾아온다. 우리는 섭씨 영하 10℃만 돼도 강추위라고 부르지만, 몽골의 추위는 평균 영하 35℃, 심할 경우 50℃까지 내려간다. 허기진 양들은 흙과 돌을 먹는다. 양들의 젖이 마르면 인간도 덩달아 굶어야 한다. 벌레와 쥐를 잡아먹으며 버티면 그때야 겨우 봄이 온다. 이런 곳이 이른바 몽골 초원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생존 원정을 떠날 법도 한데, 이들은 내내 그 생활을 반복한다. 수많은 부족으로 쪼개져 있다 보니 군사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약탈하고 죽이는 동안 서로에게 원한이 쌓여 더더욱 뭉치지 못하는 게 유목민족의 굴레다. 이때 등장한 루키가 칭기즈칸(어린 시절 이름은 ‘좋은 쇠’라는 뜻의 테무친)이다. 중급 부족장의 아들이던 칭기즈칸은 10대 초반 아버지를 잃는다. 독살로 리더가 사라지자 부족 구성원 대부분은 제 살길을 찾아 떠나고, 마을에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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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포용 통해 헬레니즘 확산시켜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의 기술을 모두 포기할 수 있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이런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전제로 하는 말은 나도 한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남은 생의 절반을 기꺼이 투척할 용의가 있다. 비슷한 용례인데, 이 사람의 말로 알려진 것 중 하나가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를 찾아갔을 때의 에피소드다.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저 사람처럼 되었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수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는 절대 디오게네스처럼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적고 검소하게 먹었는데, 누군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위해서는 아침을 적게 먹어야 하고, 맛있는 아침식사를 위해서는 야간 행군을 하는 게 최고다.” 세상에 언제나, 영원히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은 없다. 음식 맛보다 더 중요한 두 가지는 배가 얼마나 고픈지와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무엇이나 맛이 있고, 병이 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절대 그 맛을 즐기지 못한다. 음식과 맛에 대한 세련된 통찰인데, 왜 하필 예로 든 게 야간 행군일까. 그는 전쟁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에게 저녁이란 대부분 다음 날 전투를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전날 그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치를 전투(사람 죽일 것)를 생각하면 흥분이 돼서 그랬다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염통이 쫄깃해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소년 시절 그의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아버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을 재건해 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위대한 두뇌를 모셔 온 것이다. 독(獨)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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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거덜 낸 펠로폰네소스전쟁…페르시아만 '빙긋'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암살당했을 때 이 사건이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달 뒤 일곱 나라가 연달아 선전포고를 주고받으며 상황이 험악해졌을 때도 전쟁이 해를 넘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전선으로 가는 군용열차 앞에서 젊은이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약간 ‘빡센’ 군사훈련 정도로 여긴 전쟁은 그러나 5년을 끌면서 지옥이 됐고, 전선에 투입된 병사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촉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오래된 책 한 권을 불러냈다. 고대 그리스 내전을 다룬 투키디데스의 다. 깜찍하게도 토인비는 그 오래된 전쟁에서 세계대전의 원인을 찾아냈다. 급부상하는 독일이 기존 패권국인 영국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 끝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설명이었다.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이 걸음마 단계이던 시절이다. 가설로는 그럴듯했지만 어딘지 어설펐던 그의 주장은 제2차 대전을 거치고 냉전이 펼쳐지면서 우세 학설이 된다. 기존 패권국이 신흥 강국의 팽창을 견디지 못한다는 이 이론은 저자의 이름을 따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 불렸고, 현재는 주로 미·중 갈등을 염려할 때 동원된다. 개인적으로는 살짝 마뜩잖다. 영국과 미국처럼 평화적인 패권 이양이 이뤄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앵글로색슨 대서양 동맹 사이에서 벌어진 예외적인 상황이다. 예부터 패권국과 후발 강국의 군사적 충돌은 늘 있었고, 이를 피해 간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표현보다는 ‘투키디데스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다. 차라리 함정은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