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두 기근 때 왕실 식구까지 굶어 죽어
양반들 노비 먹여 살리기 힘들어 권리 포기
이후 조선 노비제도 실질적 해체 국면으로
기근 이후 지주들, 농장 운영 대신 소작 선호
"가뭄피해 감당할 필요 없어"…1945년까지 지속
한국전쟁 1년 전 농지개혁법 국회 통과
유상몰수·유상분배 원칙 따라 농지 나눠줘
北, 점령지 농지 분배 제안에도 호응 못 얻어
250만 명에서 350만 명 사이 사망자가 발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하는데, 이는 아사를 뜻한다.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악마적 행정 결정으로 비롯됐기 때문에 이를 ‘집단학살(genocide)’로 부르기도 한다. 사진은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와 장병들이 2023년 홀로도모르 광장 소녀상 앞에서 ‘우크라 대기근’ 91주년을 추모하고 있다.
뉴스1 기근(飢饉)의 사전적 정의는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다. 유명한 대기근으로 아일랜드 기근, 벵골 기근, 우크라이나 기근이 있고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아사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찰리 채플린 주연의 영화 ‘황금광 시대’에는 산속 외진 오두막에서 식량이 떨어진 남자 둘의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 1은 자기 구두를 삶아 먹는다.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남자 2의 눈에 남자 1이 칠면조로 보이기 시작한다.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장면이지만 이게 현실이 된다고 가정해보라.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대기근 2년 동안 지옥 같은 일들이 무수히 벌어졌다.대기근은 전쟁보다 더 큰 재앙우리에게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 기근인 경신대기근(1670~1671, 현종 11~12년)과 을병대기근(1695~1696, 숙종 21~22년)이다. 소(小)빙하기가 주요 원인으로 전 세계가 다 같이 고통받았지만 한반도만큼 끔찍한 곳은 없었다. 경신대기근 때는 최소 100만 명, 을병대기근 때는 141만 명이 굶어 죽었다. 보통 조선 국가 체제 몰락의 단초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꼽지만, 재앙의 강도로 치면 이 두 기근을 따라가지 못한다. 아사(餓死)라고 하면 흔히 중산층 이하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두 기근 때는 고위 관료까지 굶어 죽었다. 임금을 지키는 호위무사도 쓰러졌고 왕실 피붙이도 죽었다. 기근은 사회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기근 전까지 조선 사대부는 부를 축적하려는 이기심과 싸워 이겼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굶주림의 시대가 끝나자 지배계급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경신대기근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쌀 생산량 기준) 2달러를 1달러로 떨어뜨린 임진왜란보다 조선을 더 많이 바꿨다. 노비 부릴 권리 벗어나고 싶어 한 양반들경신, 을병 대기근이 바꿔놓은 사회 변화 중 또 하나 주목할 것이 노비 숫자의 변동이다. 폭증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급감했다. 노비제에서 주인은 노비를 먹여 살려야 한다. 노비 입장에서는 적어도 밥을 달라고 보챌 대상이 있는 셈이다. 게다가 노비는 군역, 부역, 세금이 면제다. 스스로 양인의 지위를 내려놓은 자매(自賣)노비는 주로 그렇게 발생했다. 숫자가 급증한 이유다. 대기근 이후 양반들은 노비를 부릴 수 있는 권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자기 식구 먹고살기도 힘든데 노비까지 책임지기 싫었던 것이다. 양반들은 기꺼이 그들을 포기했다. 무료 방면은 아니었을 것이고 다만 조건이 훨씬 후해졌을 것이다. 노비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든 주원인이다. 노비제의 양면성이다. 노비가 되면 어쨌거나 밥은 먹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주인이 감당할 수 있을 때다. 권리와 책임에서 후자의 비중이 늘어나면 주인은 권리를 포기한다. 드라마에서 보면 노비 문서를 태워버리는 양심적인 양반이 종종 등장하는데 무상으로 방면하는 것에 더해서 토지 문서까지 얹어주지 않으면 실은 무책임이나 임무 방기에 가깝다. 양대 기근 이후 노비제도는 실질적인 해체 국면에 들어선다.브라질 대통령 룰라도 부러워한 우리나라 농지개혁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까지 한국식 장원인 대농장을 직접 운영하던 지주들은 직영 대신 소작으로 시스템을 바꿨다.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걷는 방식으로 자연재해가 와도 자기는 소작료만 받으면 끝이다. 가뭄 피해 같은 걸 직접 감당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이 제도는 1945년까지 이어졌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 농토 232만 정보 중 67%는 소작지였다. 그리고 전 농가 206만 호 중 소작 농민은 84%나 되었다. 지극히 전근대적 경제구조다. 1949년 6월 유상몰수와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농지를 재분배하는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한다. 몰수 대상 농지에 대한 보상액은 연간 수확량의 1.5배였다. 일제강점기 농지의 가격이 대략 연간 수확량의 6배였으니 4분의 1 가격이다. 농민들은 매년 생산량의 30%를 5년간 갚으면 자신의 소유가 되었다. 신속하고 발 빠른 이 농지개혁은 몇 달 후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다. 점령 지역에서 북한은 농지개혁을 실시한다. 농민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조치였는데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미 다 끝난 건데 왜 저런 디야. 농지개혁이 없었더라면 전쟁은 힘든 조건 또 하나를 추가했을 것이다. 한국의 농지개혁은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가장 부러워했다. 일본·대만도 했지만, 미군정의 손을 빌려 했다. 직접 한 것은 대한민국뿐이다. 덧붙이는 글러시아 석유 산업의 시작을 이야기하다 보니 당시 러시아의 굴레였던 농노제를 빠뜨릴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조선의 노비제도와 소작제도까지 얘기하게 됐다. 다음 회는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두 형들이 러시아 석유 사업에 뛰어드는 이야기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둘째 형 루드윅은 ‘바쿠의 석유왕’으로까지 불린 인물인데 1888년 그가 사망했을 때 유럽의 몇몇 신문이 형제들을 혼동해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고 보도했고 부음 기사에 자신을 소개한 ‘죽음의 상인’이라는 표현에 충격을 받아 알프레드가 노벨상을 제정한 일화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