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무너뜨린 석유

미국 국가안보결정지침 66호
소련과 경제 전쟁 선언…천연가스 수출도 제한
세계 석유 31% 맡았던 소련, 10년도 안돼 몰락

66호 재현 선포한 트럼프
지난달 다보스포럼서 "OPEC에 유가 인하 요구"
유가 떨어지면 러시아엔 전쟁 비용 고갈 '치명적'
2017년 독일 G20 회의에서 만난 트럼프와 푸틴. 트럼프의 등장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인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정의라는 불편한 진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2017년 독일 G20 회의에서 만난 트럼프와 푸틴. 트럼프의 등장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인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정의라는 불편한 진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대선 기간 내내 트럼프는 24시간 안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장담했다. 선거 앞두고 뭔 소린들 못하겠냐마는 다들 트럼프 특유의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언어는 과격할지는 몰라도 무책임하지는 않다. 24시간은 그냥 상징이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내겠다는 표현을 드라마틱하게 한 것뿐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화상 연설에서 종전 작업 개시를 선언했다. 우크라이나는 준비가 됐고 러시아에 물어볼 차례라고 했는데, 구체적인 방안으로 국제유가를 낮추자는 제안을 했다. 이는 자원 수출로 먹고사는 러시아에 치명적인 압박이다. 유가가 떨어지면 재정이 마르고 전쟁 비용 고갈이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협상장에 안 나올 수가 없다. 국가를 지탱하는 기반이 반대로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미국은 석유로 러시아를 압박한 적이 있다. 냉전(cold war) 말기 때 이야기다. 스타워즈와 서울올림픽, 소련 붕괴의 원인?보통 소련 붕괴의 가장 큰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사회주의 집단주의적 경제 시스템의 부패로 인한 내부 취약성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이다. 전자는 약간 미국의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후자는 그보다는 훨씬 객관적인데, 레이건 행정부는 우주를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이른바 ‘스타워즈’ 프로젝트에 소련이 보조를 맞추도록 유도했으며 과잉 지출 끝에 소련을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했다. 개인적으로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게 88 서울 올림픽이다. 올림픽에 참가한 동구권 사회주의 세력은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전까지 전 세계 사회주의 공동체는 한국이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이며 당연히 생활 수준도 변변찮다는 소련의 주장을 그대로 믿어왔다. 웬걸. 서울에 와보니 도시의 화려함이 자기들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것은 물론 사회주의권 최고 선진국인 소련보다 나았던 것이다. 이 충격이 동구권 제국(諸國)의 분리독립 주장으로 이어졌고, 결국 1991년 12월 소련은 해체된다(1988년 서울올림픽 소련 해체 촉매설은 탈북자들의 증언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크라이나도 이때 독립한 나라로 엄밀하게는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이 소련 붕괴를 가속화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보다 더욱더 장기적이고 다면적인 대소(蘇) 전략이 있었으니 유가를 가지고 소련의 힘을 빼는 작전이었다. 핵 보유 강대국들이 등장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다.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만은 피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별로였던 국가들 사이의 불화나 이질적 세계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때 재래식 소모전 대신 비군사적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 ‘돈’이다. 사실 별로 새롭고 특별한 전략도 아니다. 2500년 전 스파르타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 필요한 것은 첫째로 돈, 두 번째로 더 많은 돈 그리고 세 번째로 더욱더 많은 돈.”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여러분, 스파르타는 돈이 없소이다.” 그러나 그 부족한 돈을 재화가 넘쳐나는 페르시아가 대주는 바람에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한다. 현재도 사정은 같다. 강대국이 경제성장을 가로막고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면 상대국은 내부에서 무너진다. 군사적 대결에 필요한 부와 힘을 축적하지 못하고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 끝에 체제 혹은 최소한 정권이 붕괴되는 것이다.

1982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은 ‘국가안보결정지침(NSDD) 66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과의 경제 전쟁을 선언하는 신호탄으로, 1995년 기밀 분류에서 해제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 전략의 핵심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협력을 얻어 유가를 낮추고 서구로의 천연가스 수출을 제한해 소련의 돈과 기술을 말리는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채 못 되어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트럼프는 이번 화상 연설에서 아예 ‘66호’ 재현을 선포했다. 그는 현재 석유 가격이 높아 전쟁이 지속되는 것이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OPEC에 유가 인하를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중동 산유국의 석유 생산 확대를 주문해 석유와 가스 수출에 재정 수입의 절반을 의존하는 러시아의 목을 죄겠다는 얘기다. 어쩌면 푸틴에게 고마운 일일 수도 있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경제 제재로 어쩔 수 없이 종전한다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1900년대 석유수출량, 美·사우디 앞서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러시아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3대 원유 생산 국가다. 2018년 세계 원유 생산에서 11%를 차지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각각 18%, 12%이고 석유 하면 빠질 수 없는 이란, 이라크가 모두 4%대인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비중이다. 그러나 시계를 100년 전으로 돌리면 이 수치는 수직으로 올라간다. 1904년 러시아의 세계 석유 수출량은 무려 31%로 지금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합친 숫자다. 이 시기는 노벨 가문과 로스차일드 집안 그리고 록펠러라는 석유 거인이 경합을 벌이던 시기다. 경합이라 하면 낮은 가격으로 상대를 주저앉히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석유 산업의 본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경쟁은 경쟁이되 담합과 협력이라는 묘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이 업종을 러시아 석유 산업 발전사를 통해 좀 더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