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들이 공장 운영하며 빚 갚아 나가
엉뚱한데 돈 쓴 큰 형에 둘째 분통 터트렸지만
사업성 보고 정유공장 현대화 적극 지원
벌크 유조선 만들어 대서양 항해까지 성공
명민하며 사업 수완이 뛰어난 노벨 가문의 두 살 터울 형제 루드비그와 앨프리드(왼쪽). 루드비그는 ‘바쿠의 석유왕’으로 불렸다.스웨덴의 위대한 발명가 임마누엘 노벨이 러시아로 이주한 게 1837년이다. 화학제품 공장을 설립한 그는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지뢰와 수중 기뢰를 러시아 군부에 납품했는데 파병을 위해서는 죽으나 사나 바다를 건너야 하는 영국군에게 이보다 위협적인 무기는 없었다. 상대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은 수요가 엄청나다는 의미이기에 임마누엘은 돈방석에 앉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 정부는 잔금 지불을 잊었고,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에게도 미운털이 박혀 노벨은 파산하고 만다. 이에 공장은 채권자들의 손에 넘어갔는데, 문제는 생산품이 워낙 전문 영역이다 보니 이를 돌릴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세 아들 로베르트·루드비그·알프레드가 자신들의 인건비와 수익으로 채무를 변제하는 방식으로 공장을 운영했고, 덕분에 형제들은 일하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먼저 대박을 터뜨린 건 둘째 루드비그다. 그는 일명 ‘노벨 수레’를 발명했는데 지면이 고르지 못한 러시아 도로에 안성맞춤인 제품이었다. 셋째 알프레드는 니트로글리세린에서 힌트를 얻어 다이너마이트에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가문의 막내인 에밀이 알프레드의 공장에서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동생의 그늘 벗어나려 한 형의 돌발 행동수레에 이어 러시아 정부에 소총을 납품하는 대규모 계약을 따낸 루드비그는 소총 개머리판에 필요한 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형 로베르트를 캅카스 남쪽 지역으로 파견한다(발명은 물론 경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루드비그와 달리 이렇다 할 재능이 없던 맏형 로베르트는 동생 밑에서 일하는 처지였다). 1873년 바쿠에 도착한 로베르트는 대형 사고를 친다. 동생이 호두나무를 사 오라고 준 2만5000루블로 대뜸 작은 석유 공장을 사버린 것이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이던 바쿠에는 당시 석유 열풍이 불고 있었는데, 로베르트의 석유 공장 매입이 ‘촉’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동생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장남의 갑질’이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형의 만행에 루드비그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치밀한 사업가이던 그는 2만5000루블을 매몰 비용으로 포기하는 대신 석유 산업에 관심을 돌리는 쪽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사업성 검토 결과 충분히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한 루드비그는 형에게 추가로 자금을 지원했고, 로베르트는 정유 공장 현대화 작업에 들어간다. 얼마 후 형제의 석유 공장은 바쿠에서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한다. 1876년 10월, 드디어 정제된 조명용 등유를 실은 노벨의 배가 페테르부르크에 입항한다. 노벨 가문이 주도하는 러시아 석유 산업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석유를 꼭 나무통에 담아야 합니까?”석유 산업의 모든 분야를 마스터한 루드비그는 황제의 동생이자 코카서스 총독인 대공으로부터 전폭적 후원까지 이끌어냈고, 이는 석유 공장의 실질적 장악으로 이어진다. 다시 로베르트는 찬밥 신세. 루드비그가 파악한 바쿠 석유 산업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장거리 수송이었다. 바쿠에서 출발해 소형 기선으로 카스피해 북쪽인 아스트라한까지 운반한 다음 이걸 다시 거룻배에 실어 볼가강을 거슬러 올라가 철도가 닿는 지역에 도착한 후 배송 지역으로 보내는 엄청난 여정이다. 또 하나는 석유 담을 통에 들어갈 나무를 구하는 문제였다. 바쿠 지역의 산림만으로는 필요한 석유통을 다 만들 수 없었고,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심지어 미국에서까지 나무통을 구해 와야 했다. 루드비그는 두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다. 배 위에 커다란 탱크를 만들어 석유를 담고, 거대한 탱크를 탑재한 ‘조로아스터’라는 이름의 벌크 유조선을 건조해 대서양 항해에 성공한 것이다. 1880년대 중반 노벨 브러더스 석유생산회사는 러시아 석유 업계를 완전히 장악한다. 형인 로베르트의 삐딱선 때문에 얼결에 시작한 사업이 불과 10여 년 만에 거둔 성공이다.노벨 형제, 전 세계로 시장 확장 나섰지만…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1874년 60만 배럴에도 못 미치던 러시아의 원유 생산량은 1884년 1080만 배럴로 늘어난다. 이는 미국 석유 생산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었는데, 물론 이게 전부 노벨 형제의 성과만은 아니다. 바쿠에는 노벨 형제의 석유 공장 외에도 크고 작은 200여 개 정유공장이 가동하고 있었고, 이들이 뿜어내는 검은 연기와 악취로 바쿠는 ‘암흑의 도시’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방문객은 굴뚝 속에서 사는 기분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광부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어 한 공장은 당연히 노벨 브러더스 석유 생산 회사였다. 성과에 걸맞게 노벨 형제의 공장은 대우가 좋았고,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벨 가족’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노벨 가족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막내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아 장애인이 된 아버지가 사망했고, 장남 로베르트는 결국 회사를 떠나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공장부터 세우고 자금을 구하러 다니는 루드비그의 방식을 알프레드가 비난하자 루드비그는 알프레드가 권한 주식 투자에 대해 그런 일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나 하는 나쁜 일이라고 각을 세웠다. 노벨 브러더스 석유회사의 다음 목표는 시장을 전 세계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과 막강한 경쟁자가 버티고 있었으니, 전자는 러시아 석유 산업에 진출하려는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후자는 석유 재벌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