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농노제 폐지와 석유산업의 태동

농노제 기반 농업사회, 자본주의 확산에 '흔들'
농민 분배 땅값, 49년 분할상환 요구 '무리'
토지개혁 등 실패…국가 변혁 타이밍 놓쳐

석유 채굴 작업 본격화
해방선포 때 이미 제조·광업 노동자 많아
손으로 갱 파다 1871년부터 기계 굴착
노벨의 장남, 러 석유사업 아버지로 떠올라
제정 러시아의 근대화에 힘쓴 차르 알렉산드르 2세. 그는 1861년 농노제 폐지와 토지개혁을 실시하지만, 188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제정 러시아의 근대화에 힘쓴 차르 알렉산드르 2세. 그는 1861년 농노제 폐지와 토지개혁을 실시하지만, 1881년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19세기 중반 제정러시아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은 농노제였다. 황제도, 귀족도, 심지어 당사자인 농노도 그게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폐지하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농노제를 폐기할 경우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토대인 귀족계급이 몰락한다. 그러면 뒤이어 거대한 사회변혁이 따라올 것인데 러시아 구(舊)지배계급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증유의 사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정치체제를 놓고 가장 방황을 많이 한 것은 황제인 차르다. 대세는 전제군주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의 이행이다. 따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황제는 상충하는 욕구를 털어버리지 못했다. 차르가 생각하는 헌법은 ‘군주의 행동에 제약이 없는’ 이상한 헌법이었다. 바꿀 생각은 있으나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상한 심리 상태에서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3세가 정책 실행에 따른 중압감과 과다한 스트레스로 사망한다(중간의 알렉산드르 2세는 피살).인구 6700만 명 중 4000만 명이 농노농노(農奴)는 고대 로마제국에서 본격적으로 유래해 유럽 중세 봉건제까지 이어진 농업 생산양식에서 생산을 담당하던 하층민을 총칭한다. 땅에 예속되어 그 땅의 소유주인 영주에게 종속되었지만 사유재산이 인정되었으며, 다만 각종 권리의 제한으로 자유민과는 구별된다. 사유재산권 유무로 노예와 구분하기도 하지만 시대별·지역별로 경우가 다 달라(가령 사유재산을 가진 노예도 있었다) 실재하는 계급이라기보다 학술을 위한 추상적 개념이나 전근대적 농업사회의 주류 생산양식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재산을 가진 노비처럼,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조건과 처지다. 18세기 중엽 러시아 인구는 약 6700만 명이었다. 이 중 5000만여 명이 농민과 그 가족이었고 이 중 일부 자유농민을 제외한 4000만여 명이 농노로 추산된다. 이 4000만 명 중 절반이 넘는 2만2000만여 명이 사유지, 즉 귀족계급의 농장에서 일했는데 이들은 인두세를 납부하고 병역에도 복무했지만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했다. 지주는 농노를 마음대로 사고팔았으며 매질 등 사형(私刑)에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인구의 3분의 2가 농노에 이 중 절반이 노예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나라가 갈 길은 명확하다. 개혁해서 농노제를 없애거나 망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이 중차대한 순간에 오락가락하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국가 변혁의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기는커녕 개혁을 시도하다가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으니 1833년에 제정된 ‘러시아 제국 법전’이 그 대표적 사례다. 법전 1조를 보자. “전 러시아의 차르는 독재하는 절대군주이며 그 최고 권력에 외경심을 가지고 마음으로 복종할 것을 신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19세기 중반에 신의 이름이라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러시아판 위정척사파 “서유럽 자유 혁명 홍수 막자”우리에게만 위정척사파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러시아 제국 법전’ 선포 시기 러시아 문교부 장관 우바로프는 전제-정교-국민정신의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50년간 유보하고 서유럽에서 밀려오는 혁명의 홍수에 댐을 쌓자는 정책을 편다. 차르에게 충성, 러시아 정교에 순종 그리고 러시아 고유의 애국심과 민족성 고양 운동이다. 시대착오를 넘어 망상에 가까운 이 정책은 대외적으로는 니콜라이 1세의 ‘유럽의 헌병’ 역할로 나타난다. 유럽을 휩쓰는 자유주의 혁명의 물결을 막아내고 전 세계를 전제왕권 시대로 되돌리려는 야심 찬 시도였지만 정작 유럽 각국에서는 콧방귀를 뀐다. 그래도 뭔가 있으니 나서겠지 싶었는데 1853년 크림전쟁의 완벽한 패배로 러시아의 실력은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다. 나라 안팎 개혁 요구에 더 물러설 곳이 없었던 차르(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마침내 농노해방을 선포한다. 너무 늦었고 농민들은 분배된 토지 대금을 49년에 걸쳐 분할 상환해야 하는, 그보다 더 나쁠 수 없는 농노 폐지와 토지개혁이었다.고통스럽게 소멸하는 구체제구체제와 신체제는 자연스럽게 바통 터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생산양식이 기세를 얻는 동안 낡은 생산양식은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농노제로 지탱되는 전근대 농업사회가 서서히 질식하는 동안 러시아 자본주의는 빠르게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농노해방이 이루어진 1861년 러시아에는 이미 70여만 명 가까운 제조, 광업, 철도 노동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근육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 역시 채굴 작업이 본격화되는 중이었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지역 바쿠에서는 1829년 손으로 판 갱이 82개나 있었고, 1871년에는 기계에 의한 굴착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 러시아 ‘석유 사업의 아버지’라 부를 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로베르트 노벨이라는 화학자로, 그는 1837년 러시아로 이주한 스웨덴의 위대한 발명가 임마누엘 노벨의 장남이었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농노 이야기를 하면 우리나라 노비가 안 떠오를 수 없다. 노비에 대한 처우가 어땠는지는 이들이 꼬리표를 떼고 평민으로 올라서기 위해 벌인, 수백 년에 걸친 신분세탁의 지난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재미있는 건 자발적 노비, 즉 자매(自賣) 노비가 의외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정말? 자유를 반납하고 자신을 스스로 판다고? 여기에 노비제의 미묘한 양면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