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보다 강한 '결혼의 힘' (下)

정략결혼으로 거대한 영지 독점
아들·딸 결혼 활용해 영토확장 본격화
동유럽·아메리카 대륙 식민지까지 지배
자손들도 4세기 걸쳐 유럽 정치에 영향력

결혼정책 댓가는 근친혼의 폐해
300년간 합스부르크가 친족간 혼인 73건
각종 정신병·뇌전증·사산 등 질병 잇따라
합스부르크 가문 ‘결혼 정책’의 주역 막시밀리안 1세.  위키피디아 제공
합스부르크 가문 ‘결혼 정책’의 주역 막시밀리안 1세. 위키피디아 제공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광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부르고뉴의 대공 대담공(大膽公) 샤를에게 자기 아들 막시밀리안과 샤를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당시 사촌인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대립하고 있던 대담공 샤를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프리드리히 3세와 대담공 샤를 간 약혼 조약은 1473년 트리어에서 이루어졌다. 대담공의 사위로 예정된 18세의 막시밀리안은 그의 부인의 영지를 기반으로 자신의 야망을 조금씩 실현해나갔다. 1477년 1월 대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스위스 병사의 손에 사망하자, 약 8개월 뒤인 8월에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결혼식을 치르게 됐다. 이 결혼으로 막시밀리안은 각 지역으로 분할될 뻔하던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를 다시 통합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의 결혼이 과실을 맺게 된 데는 우연과 행운이 따랐다. 장인인 대담공 샤를의 때 이른 죽음이 대표적이다. 막대한 영지를 보유한 대담공이 갑자기 죽으면서, 부르고뉴 공작령과 부르고뉴 백작령(프랑슈콩테) 등 대담공의 영지를 탐냈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살리카법(Lex Salica)’에 근거해 영유권 분쟁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막시밀리안은 아버지를 잃은 부인을 지키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 결과, 오랜 분쟁 끝에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와 프랑슈콩테·플랑드르·아르투아·브라방·홀란트·림베르크·구엘드레란트·룩셈부르크 등의 영지를 보유하는 행운을 얻는다. 프랑스 왕의 공격을 막시밀리안이 막아내는 모습은 막시밀리안을 ‘탐욕스러운 친척의 위협으로부터 고아를 구해내는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보다 못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막시밀리안을 직접 공격하기로 한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1481년 구이네게이츠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막시밀리안에게는 또 다른 죽음이 가문 부흥의 계기로 작용한다. 바로 부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사냥 중 낙마해 일찍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막시밀리안에게 거대 영지의 ‘독점권’이 주어졌다. 막시밀리안은 마리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필리프와 딸 마르가레테를 확장된 결혼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우선 마르가레테를 세 살 때 자기 라이벌인 루이 11세의 아들인 도팽(프랑스의 왕세자, 후일의 샤를 8세)과 약혼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그 결혼은 실제 이뤄지진 못했고, 한동안 마르가레테는 일종의 인질로 프랑스에 잡혀있어야 했다.

불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막시밀리안은 이베리아반도의 카스티야와 아라곤 영지를 물려받을 예정이던 후한 및 후아나와 1496년 이중 결혼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필리프를 후아나와, 마르가레테를 후안과 결혼시켰다. 이 혼인 덕에 막시밀리안은 스페인뿐 아니라 나폴리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까지 획득했다. 여기서 또 한 번 영지 소유권을 주장할 경쟁자가 우연히 죽음으로써 막시밀리안의 영지는 더 넓어지게 된다. 바로 후안의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이었다. 그 덕에 막시밀리안의 자손이 1519년에 스페인과 부르고뉴의 영지를 지배하게 됐다.

막시밀리안은 자식들만 결혼정책에 동원한 것이 아니었다. 홀아비인 자신도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인 스포르차 가문의 비안카 마리아와 재혼하기로 한다. 비안카 마리아는 지참금으로 100만 플로린의 현찰을 가지고 왔다.

혼인 정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영지를 바탕으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부유한 지역을 확보한 뒤 다시 스페인에 진출한 막시밀리안은 결혼을 통해 동유럽으로도 영지를 넓힌다. 헝가리의 야기에우워 결혼동맹을 맺어 헝가리 지배권을 차지한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손자 페르디난드와 야기에우워 가문의 딸을 결혼시킨다. 이번에도 러요시 2세가 죽으면서 이 지역의 영지들이 막시밀리안의 품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유럽 내에 엄청난 영지를 확보한 것을 발판으로, 막시밀리안의 손자 카를 5세 시대에 이르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원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된다. 그의 후손들은 14세기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이었던 루돌프 4세가 만들었다는 표어 ‘AEIOU’를 현실로 즐기며 살아가게 됐다. ‘AEIOU’란 ‘오스트리아는 세계를 지배할 운명이다(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라거나 ‘모든 지상의 제국은 오스트리아에 복종한다(Alles Erdreich ist Ösrerreich untertan)’라는 의미로 흔히 해석된다.

결혼정책은 치러야 할 대가도 적지 않았다. 근친혼의 폐해가 잇따랐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으로 결혼 상대로 적합한 가문이 줄어들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내 근친혼은 더욱 흔해졌다. 1450년부터 1750년까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중앙 유럽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맺은 총 73건의 혼인 관계 중 4건은 삼촌과 조카딸, 11건은 사촌, 4건은 오촌, 8건은 육촌, 나머지는 그보다 먼 친척 사이에서 맺어졌다.

근친혼 탓에 기형과 정신장애도 흔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자들은 ‘포첸포이들(Fotzenpoidl, 아랫입술이 튀어나온 얼굴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각종 정신병과 뇌전증, 사산, 유아 질병도 따라붙었다. 1527~1661년 사이에 스페인 왕가 혈통으로 태어난 34명 중 10명이 1세가 되기 전에, 또 17명이 1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80%의 유아사망률은 당시 평균 유아사망률의 4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막시밀리안이 유럽 장악한 비결 '결혼동맹'
막시밀리안은 전략적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중앙 유럽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요한 왕조로 한 단계 ‘도약’시켰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막시밀리안의 ‘전략’을 이어받아 4세기에 걸쳐 유럽 정치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