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미·중 갈등의 시작
100년 가까이 미국 '연기 산업'에
희생당하고도 호감 보였던 중국
조미수호통상조약서 조선 지위 두고 대립
'속방' 의견 무시당해 자존심 구긴 후
한국전쟁터서 만나 최악의 사이로
소련 고립시키려 다시 친선 맺지만
최근 패권전쟁 겪으며 재점화
100년 가까이 미국 '연기 산업'에
희생당하고도 호감 보였던 중국
조미수호통상조약서 조선 지위 두고 대립
'속방' 의견 무시당해 자존심 구긴 후
한국전쟁터서 만나 최악의 사이로
소련 고립시키려 다시 친선 맺지만
최근 패권전쟁 겪으며 재점화

중국인들의 담배 애호는 유난하다(현재의 전자담배를 발명한 것도 중국).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중국인들은 연기 뿜는 맛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편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미국은 자동 담배 생산 기계를 발명해 이번에는 중국에 담배를 팔아먹는다. 엄청난 광고 공세로 1902년 12억5000만 개비이던 판매량은 10년 후 120억 개비로 증가한다. 거의 한 세기 가까이 미국은 ‘연기 산업’으로 중국을 정말 알뜰하게 빨아먹었다. 그럼에도 청나라 말기 중국인은 미국인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일단 영국과 프랑스처럼 살기등등하지 않았고(2차 아편전쟁 당시 파머스턴 영국 총리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제를 몰아내겠다고 공언했다), 온건한 문호 개방 정책을 펼쳤으며, 선교사들은 교육, 위생 사업으로 호감을 줬다. 두 나라 사이가 틀어진 것은 조선 때문이었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다. 참 이상한 조약이었다. 당시 조선인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청나라로 유학 간 학생 둘이 이제 막 영어를 배우고 있었을 뿐이다. 말도 안 통하는데 무슨 수로 조약을? 간단하다. 조선은 완전히 배제된 채 미국과 중국 사이에 협상이 이뤄진 것이다. 미국 측 대표 로버트 슈펠트와 중국 측 대표 이홍장은 조선의 지위를 놓고 각을 세운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하자는 미국과 중국의 속방으로 하자는 중국의 의견 대립이었다. 결국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라는 문구를 삭제하는 대신 조약 체결 후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청나라 간 종속 관계를 밝히는 타협안이 만들어진다. 1887년 조선은 전권 대표를 미국에 파견한다. 12월 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박정양 일행은 미국 대통령을 위시해 많은 고급 관리를 만난다. 의전 때마다 박정양은 독립적이고 자주권을 가진 나라 대표처럼 행동했고, 이는 이홍장을 격분시킨다. 미국 역시 조선을 국제법상 평등한 독립국으로 대우했고, 중국이 주장하는 종속국의 정치적 의미를 ‘일부러’ 무시했다. 중국의 자존심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1차 미·중 갈등이라고 본다.
2차 미·중 갈등은 한국전쟁이다.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스탈린은 1950년 4월 김일성의 전쟁 계획을 승인하면서 동양 문제는 마오쩌둥의 이해가 높으니 그와 상의하라고 권고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을 자신이 차지하고 실패하면 김일성과 중국에 책임을 돌리려는 간악한 술책이었다. 여기에 미국의 궁극적 목표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이라는 오판으로 마오쩌둥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중국은 졸지에 전쟁 당사자가 된다. 2년 10개월이나 전투를 벌인 미국과 중국은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게 최악으로 헤어진다. 미국과 중국이 다시 만난 것은 1972년이다.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은 미·중 데탕트를 열었고, 1979년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면서 두 나라의 우호는 절정을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