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조선 숙종과 영국 헨리 8세
형수를 아내로 맞았던 헨리 8세
20년 뒤엔 시녀 앤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 불허 가톨릭 떠나 성공회 세워
거액 헌금 아끼고 재혼까지 '일거양득'
형수를 아내로 맞았던 헨리 8세
20년 뒤엔 시녀 앤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 불허 가톨릭 떠나 성공회 세워
거액 헌금 아끼고 재혼까지 '일거양득'

숙종이 환국의 동력으로 활용한 것은 여인들이었다. 그중 두 번째 환국에 동원된 인물이 장희빈인데, 아시다시피 숙종은 그녀를 사사(賜死)한다. 이 때문에 왕비를 둘이나 죽인 영국 왕 헨리 8세와 단골로 묶이지만, 실은 숙종과 헨리 8세의 공통점보다 더 닮은 게 장희빈과 첫 번째 참살(斬殺) 왕비인 앤 불린이다. 둘 다 정통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고, 정실부인을 쫓아내고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에게 살해된 후 자녀가 왕위에 올랐다.
왕비를 밀어낸 실력으로는 앤 불린이 몇 수 위다. 장희빈은 여흥 민(閔)씨 등 외척 세력과 서인이 그 상대였지만 앤 불린은 카스티야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녀를 몰아냈다. 헨리 8세의 정실이자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원래 헨리 8세의 형수다.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원수인 프랑스와 대립하던 에스파냐에서 며느릿감을 물색했고 두 살배기 캐서린을 찜한다. 나이가 찬 캐서린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결혼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다. 남편인 아서는 캐서린이 마음에 들었고, 동생인 나중의 헨리 8세도 미모의 외국 공주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영국의 엄청난 지참금 요구로 몇 차례 위기 상황을 맞긴 했지만 아서와 캐서린은 우여곡절 끝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아서가 감기로 사망하자 졸지에 과부가 된 캐서린의 입지가 난처해진다. 그 와중에 헨리 7세는 사돈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지참금을 다 보내지 않았다며 잔금 지급을 요구했고, 페르난도 2세는 지참금을 다 보냈다고 잡아뗀다.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가 서로 나 몰라라 하는 동안 캐서린은 오리알이 되어 궁핍의 세월을 보낸다.
헨리 7세가 병사하자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다른 나라 왕녀들과의 혼담도 물리치고 캐서린에게 청혼한다. 근친상간이었지만 헨리 8세는 혼인 무효 사유인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는 캐서린의 주장을 근거로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연합 왕국으로 부부 별산제였고 이미 카스티야의 여왕이자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여왕이 사망했기 때문에 캐서린이 물려받을 지분은 없었다(그래서 호칭이 아라곤의 캐서린). 그보다는 첫사랑의 실현이라는 게 더 타당한데, 실제로 금실도 좋아 3남 3녀를 출산했다. 다만 높은 영아 사망률 때문에 이 중 딸 하나만 생존했고 이 여아가 나중에 메리 1세로 영국 왕에 등극한다.
세월이 지나 캐서린의 가임 불가 상황에서 어리고 세련된 데다 머리까지 좋은 캐서린의 시녀 앤 불린이 헨리 8세를 사로잡는다. 문제는 이혼이다. 이때부터 헨리 8세는 툭하면 신하들 앞에서 자기가 캐서린과 결혼한 것이 도리에 맞지 않아 마음이 찜찜하다는 말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결혼 생활 20년도 더 지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헨리는 구약 레위기의 한 구절에서 근거를 찾는다. “남자가 자기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그것은 부정한 일이니라. 그가 자기 형제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었는즉 그들이 자식이 없으리라.” 헨리 8세는 반복해서 그 구절을 읽으며 감동에 몸을 떨었다. 헨리 8세는 이런 주장을 담은 편지를 로마 교황청에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