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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함무라비 법전이 뿌린 '신뢰'…상업 발전 싹 틔우다

    함무라비 법전은 오랫동안 인류 ‘최초의 법전’으로 불렸지만, 사실 그보다 앞선 시대에 만들어진 법전이 적지 않다. 나중에 발견된 ‘우르남무 법전’이나 ‘에슈눈나 법전’ 등이 함무라비 법전보다 이른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행한 법률이지만 함무라비 법전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고대 바빌로니아의 6대 왕인 함무라비(BC 1792~1750)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재통일한 군주다. 그의 시대에 조성한 건축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쐐기문자 텍스트를 통해 당대의 모습이 상세하고 생생하게 전해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lex talionis)”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가 새로 건설한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여 년 전 우르 왕국이 몰락한 뒤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던 여러 도시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법규범을 도입한 것은 대단히 중요했다.2.35m 높이의 검은색 섬록암에 아카드어로 새긴 함무라비 법전의 작성 연대는 기원전 1772년경까지 올라간다. 1901년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드모르강이 이끄는 탐험대가 발견한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282개 법 조항으로 구성된다. 텍스트 첫 줄에서부터 함무라비는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대하는 ‘정의로운 왕’으로 소개한다.법전에는 경제적 내용이 가득하다. 거짓 증언과 절도, 은닉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고, 노동·재산·상거래·결혼·이혼·상속·입양·농업·급여·임대료에 관한 사법적 문제도 다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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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에 숨 쉬는 '스파르타 평등주의'

    “만약 스파르타라는 도시가 폐허가 돼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시간이 흐른 뒤 후손들은 이 지역이 과연 펠로폰네소스반도의 5분의 2를 점령하고 지역 맹주로 군림하던 강력한 장소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도시에는 신전이나 웅장한 기념물도 없다. 그저 마을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다. 외관만 비교하면 아테네가 스파르타보다 2배는 강성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당대의 라이벌 스파르타를 두고 ‘검소함의 모범’으로 높게 평가했다. 오늘날에도 스파르타를 가 보면 과거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는 이렇다 할 유적을 찾을 수 없다. 명목상 그리고 실제로 검소한 평등사회를 지향했던 스파르타의 특색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플루타르코스 등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의 전설적 입법자 리쿠르고스는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누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사실상 화폐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토지는 추첨으로 균등 분배했다고 전해진다.실제로 스파르타 지배층들은 새로운 부의 창출보다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고, 이 같은 규범을 실천에 옮겼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함께 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보통의 스파르타인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개인의 자유, 사적 재산의 소유 등은 극도로 제한됐다. 교육도 좋게 보면 의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강제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이 지향한 목적은 문자 그대로 ‘개·돼지’로 여기던 피정복민 노예인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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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 vs 집단지성…경쟁·협력하며 시대 이끌었다

    서구 문학의 첫 장을 연 작품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전쟁을 배경으로 영웅 아킬레스의 분노를 다룬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10년 모험담을 다룬 <오디세이아>는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각종 콘텐츠로 재생산되면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이 두 작품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호메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시인으로 전해진다. 전설 속에서 키오스섬 출신이라고도 하고, 스미르나·콜로폰·살라미스·로도스·아르고스·아테네 같은 도시도 연고권을 주장하는 이 시인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이름부터 ‘보다’라는 뜻을 지닌 고대 그리스어 ‘호로스’와 부정을 뜻하는 ‘메’가 합쳐져 ‘눈먼 사람’을 뜻하는 호메로스로 불리는 게 심상치 않아 보인다.많은 사람이 궁금해했다. 호메로스라는 시인은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 정말로 존재한 사람이라면 단 한 명일까, 아니면 여러 시인의 개별 작품을 호메로스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은 것일까.이런 궁금증은 오래전부터 학문적 논란으로 이어졌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어디까지가 예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전통의 산물인지, 어디부터 개인의 창작물인지에 대해서도 학자마다 의견이 갈렸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창작자가 같은 사람인지를 두고서도 서로 다른 견해가 쏟아졌다.19세기 이래 고전학자들은 이런 논쟁점들을 두고 ‘호메로스 문제(Homerische Frage)’라고 불렀다. 학자들은 크게 ‘분석론자(analysts)’와 ‘단일론자(unitarians)’라는 2개 진영으로 나뉘었다.분석론은 호